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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 HOLLY WOOD COLUMNS 3 - 1956-1965

올드코난 2010. 6. 25.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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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HOLLY WOOD COLUMNS

(출처: 내일)


3탄 (1956~1965)

  A New Age


2차 세계 대전이란 격동기, 공산주의자 색출, 투옥이란 냉전 체제하의 과도기를 거치면서 영화계는 온갖 시련 속에서 나름의 꽃을 피우기 위해 거듭나기 위한 노력을 쏟기 시작했다.

그러한 새 시대로의 기틀이 1950년 중반부터 열리기 시작했다.

  낡은 가죽 부대에 새 술을 담을 수 있겠느냐는 고 장덕수 선생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새 시대는 새 인물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은 단순히 격변기, 과도기를 거침으로써 파생된 문제는 아니었다.

  영화 산업 예술계는  공산주의자 색출, 투옥의 거센 태풍 외에도  큰 바람을 두어 차례 맞았는 , 그 하나는 1948년 미국 최고 재판소의 판결에 따른 스튜디오 시스템 체제의 붕괴였다. 이로써 프로덕션 코드의 강제력 저하가 초래되었다. 또 하나 할리우드에 엄습한 시련은 1948텔레비전의 본격적인 보급, 확대 경향이다.  미국에서 상업 방송이 시작된 것은 1941년으로 거슬올라가지만 그 보급의 확대는 제2차 대전이란 격란으로 인해 일시 동결 상태에 머물렀다. 종전과 동시에 그것이 해금되어 엄청난 스피드로 확장이 진행되었고 48년에는 주파수 조정을 위한 방송국의 신설을 억제해야 할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가정에서의 TV수상기 보유 대수도 48년 한 해만 전년에 비해 10배나 뛴 17 2천 대나 증가하였고 그 이듬해인 1949년에는 100만대에 달하였다.

  위 두 가지 바람은 영화 산업계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그 이전에는 극장을 갖지 못했던 '리틀3' 상영의 기회조차 얻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놓였던 인디펜던트 제작자들에겐 최고 재판소의 충격적인 판정이 유리한 것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극장 경영자는 상품이 되지 않을듯 싶은 작품에 대해서는 당당히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연기하는 스타들 또한 스튜디오를 떠나 스스로의 프로덕션에서 영화를 만들어낼 수도 있게 되었다.

  더욱이 1952년 최고 재판소는 이전의 판단을 버리고 영화에도 표현의 자유를 인정해,

50년대에는 미국에서도 예술적인 영화의 상영을 위한 제작인들의 자유로운 노력이 그 꽃을 피워낼 수 있었다. 제작, 보급 시스템의 변화는 나름대로의 자구책, 신진 세력의 대두로 서서히 적응할 수 있었으나 당초 자신들의 적이라 생각지 못했던 TV로 인해 48년 이후 영화 관객이 현저히 감소하자, 아니 영화가 TV에 먹혀들어가자 대응책이 강구되기 시작했다. 이는 곧 TV달리 영화가 아니면 줄 수 없는 '즐거움'의 중시로 나아갔다.

  그 하나는 영화관에서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스타의 적극적인 기용. 더 나아가 테크놀로지의 진보로써 흑백 TV에 대한 컬러 영화의 공세, 입체 화면인 3-D, 대형 화면의 시네라마, 시네마스코프, 비스터비전 등 새로운 아이디어 상품으로 무장하는 것 외에도 대작 영화가 속속 제작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TV로부터 '관객의 완전 탈취'가 무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영화인들은 오히려 TV와 공존하려는 방책의 하나로 전술을 전환하였다.

  그 공존의 형태는 갖가지로 나타났으나 그 중심이 되는 것은 할리우드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것으로, 50년대 말까지는 TV프로그램의 대부분이 할리우드산이 되었다. 역으로 이러한 상황은 TV출신의 인재를 할리우드로 부르기도 하고 또 스튜디오 출신이 아닌 감독, 즉 신진 인물들이 등장하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새술은 새부대에 - 할리우드의 '신풍'

  스튜디오 체제의 붕괴, 즉 스튜디오의 전용 극장 경영을 금지함으로써 영화의 대량 공급은 막을 내리고 TV가 엔터테인먼트의 대량 생산을 시작, TV시대가 시작되었다. TV의 황금 시대가 도래한 후 TV를 싫어했던 사람들조차 영화관에 발을 옮기기보다는 방안에서 편히 볼 수 있는 텔레비전 수상기 앞에 앉게 되자 영화인들도 자신들의 여력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는다. 비미활동 위원회의 조사, 투옥 등으로 많은 각본가 등 영화인들을 잃었던 할리우드에서는 53-57년경 새로운 감독이나 각본가 및 일꾼을 찾기 시작했다. 즉 영화계의 난관을 극복하고 TV와 공존하기 위한 인물들을 말하는 것이다.

  할리우드에 새바람을 불어넣은 청신한 작가들로는 태드 모젤, 패터 차이예프스키, 스튜어트 스탠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자유로운 소재 속에서 기발한 드라마를 작성, 할리우드의 새시대를 여는 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2대 주역으로 대두된 것이 연출가 리스트라스버그와 영화 감독 엘리어 카잔이다. 이 두 사람 역시 격변기를 겪고 난 할리우드에 새바람을 불어 넣어 영화 산업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제작진 외에 또 필요한 인물이 바로 뉴스타의 발굴이었다. 이에 찰턴 헤스턴, 폴 뉴먼, 에바 마리 세인트 등 TV에 얼굴을 내밀었던 연기인들이 영화에도 진출, 신예 감독의 지휘 아래 열연을 보여 스타로 발돋음했다.

 

  프레시한 뉴스타들

  18세의 노마 진 마릴린 먼로는 평범한 소녀였다. 갈색 머리에 경관 존 더거티와 이혼한 직후의 가슴이 풍만한 소녀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한 시대를 주름잡는 은막의 뉴스타로 나서기에 충분했다. 그녀 가슴 깊숙이 숨겨진 고독감은 독특한 아름다움, 곧 태양처럼 빛을 발하는 섹시함을 발산, 팬들의 가슴을 뒤흔들었던 것이다.

  먼로 외에도 마론 브란도, 줄리 해리스, 제임스 딘 등이 찰턴 헤스턴, 폴 뉴먼의 TV스타의 뒤를 이어 영화 예술계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뉴스타로서 뛰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서도 제임스 딘의 인기는 가위 폭발적이었다. 그의 닉네임은 '반항아', 무엇엔가 짓눌린 듯 폭발할 것만 같은 우울, 분노가 배어 있는 표정, 유연한 연기, 나약해 보이면서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 끈질긴 저력 등이 그에게는 있었다. 바로 그런 점이 젊은 여성팬들을 사로잡았고 그는 순식간에 우상화되었다.

  독특한 컬러를 가진 뉴스타의 행렬-그 밖에 제랄딘 페이지, 킴 스탠레이, 이라이 위렉, 애니 잭슨, 칼 마르덴 등- 이 잇달아 할리우드를 매우자 TV와는 다른 대작에의 감동이나 스타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서서히 영화가는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이는 시대적 변화에 적절히 대응한 영화 산업계의 노력과 신진 영화 예술인들의 창작욕, 그리고 신예 연기자들의 노력이 삼위 일체를 이뤄 빚어 낸 값진 결과인 것이다. 만약 구태의연한 대안으로써 낡은 사고 방식을 가진 원로 영화인들이 득세하며 옛영화를 그리는 데만 급급했다면 할리우드는 주검화하여 그 생명을 되찾는데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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