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장왕(楚 莊王, ? ~ 기원전 591년, 재위 : 기원전 614년 ~ 기원전 591년)은 초나라의 제 23대 왕이며,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한 사람이다. 성(姓)은 미(羋). 씨(氏)는 웅(熊). 휘(諱)는 려(侶)이다. 초나라의 역대 군주 중에서도 최고의 명군으로 여겨져며 춘추 오패의 한 명으로 꼽힌다. 성왕(成王) 원(員)의 손자로, 폭군이었던 목왕(穆王) 상신(商臣)의 적자. 공왕(共王) 심(審)의 아버지이다.
불비불명(不飛不鳴) 춘추오패 세 번째 패자 초장왕 (楚莊王)
초장왕은 아버지 목왕이 사망후 왕위에 오른 직후, 공자(公子) 섭(燮)이 모반을 일으켰다. 일단은 수도와 왕실을 완전하게 지배하여 스스로 왕을 자칭했지만 반대 세력의 확대로 신변의 위험을 느껴 왕인 장왕을 가두고, 북방으로 도망쳤다. 진(晉)나라와 진(秦)나라, 초나라의 국경 가까이의 상밀(商密)이라는 곳에서 반격을 개시하려는 했지만 도중의 노(盧)라고 하는 마을에서 섭(燮)은 살해당하고 장왕은 풀려나 수도로 돌아왔다.
초장왕은 즉위한 후 삼 년 동안 밤낮으로 놀기만 하고, 나라 전체에 이렇게 영을 내렸다. “감히 간언하는 자가 있거든 죽여버리겠다.”
어느 날 장왕은 왼쪽에 정나라 여자를 껴안고, 오른쪽에는 월나라 여자를 껴안고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 이때 오거(伍擧)가 간하였다. “수수께끼를 올리겠습니다. 언덕 위에 새가 있는데, 삼 년 동안 날지도 울지도 않습니다. 이 새는 무슨 새입니까?”
장왕이 답하였다.
“삼 년을 날지 않았으니 한 번 날아오르면 하늘을 찌를 것이고, 삼 년을 울지 않았으니 한 번 울면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물러가라. 나는 수수께끼를 맞혔다.”
여러 달이 지나고, 장왕은 더욱 방탕해졌다. 이에 대부 소종(蘇從)이 간하니, 장왕이 말하였다.
“내가 영을 내렸던 것을 듣지 못했는가?”
“제 한 몸 죽어 임금을 깨우치는 것이, 신이 바라는 바입니다.”
장왕은 놀이를 그만두고 정사를 살펴, 간신 수백 명을 주살하고 또 수백 명을 등용하였다. 또한 오거와 소종에게 정무를 맡기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 사건에서 불비불명(不飛不鳴: 울지도 날지도 않는 새)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였다.
국정을 정비한 초장왕은, 주변 국가를 공략하며 영토를 넓히며 패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는데, 기원전 606년에는 중원을 제패할 야심을 품고 주나라 땅에 주둔하였다. 주나라로부터 사자가 오자, 초장왕은 사자에게 구정(九鼎)의 무게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구정은 천자국(天子國)에 대대로 전해지는 9개의 솥을 가리키는데, 왕권에 대한 상징물이다. 그 무게를 묻는 것은, 주나라의 왕위를 빼앗을 수도 있음을 은연중 암시한 일종의 협박이었다. 주나라의 사자 왕손만(王孫滿)은 장왕의 속내를 간파하고, 솥의 크기와 무게보다는 덕이 중요하며 천명은 아직 주나라에 있다고 대답하였고, 이에 장왕은 철군하였다.(問鼎輕重)
장왕은 야심한 밤에 신하들을 연회에 불렀다. 많은 사람이 취한 가운데 갑자기 강풍이 불어 촛불이 꺼져 버렸다. 그 때, 장웅(蔣雄)이라는 사람이 장왕의 총희의 몸을 만졌다. 총희는 곧바로 장웅의 갓끈을 잡아 뜯었고, 장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촛불이 꺼진 틈에, 나에게 무례를 저지른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의 갓끈을 당겨 뜯었습니다. 촛불만 켜면, 누군지 금방 알수 있습니다." 장왕은 "여기 온 자들은 지금 당장 갓끈을 잡아 떼어라."고 명해 모두 그대로 했다. 덕분에 장웅은 죄를 추궁받지 않고 넘어갔고, 장웅은 진심으로 장왕에게 감사했다.
그 후 초나라가 진(秦)나라에게 공격당했을 때, 장웅은 선봉에 서서 큰 공로를 세웠다. 장왕이 장웅에게 "과인은 너를 그렇게 아낀 기억이 없는데, 무슨 이유로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이렇게까지 한 것이냐?"라고 묻자 장웅은 "아닙니다. 왕께서는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저는 절영의 모임 때, 총희의 몸을 만진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이야기는 훌륭한 군주를 뜻하는 절연지연(絶纓之宴)의 유래가 된다.
장왕은 진(陳)나라의 내란을 틈타 그 나라를 일시에 병합하고, 정(鄭)나라를 공격하여 진(陳)나라와 함께 속국으로 삼았다. 기원전 597년 정나라의 원군으로 온 진(晉)나라군을 격파했다. 이 때 진나라군은 허겁지겁 배를 타고 후퇴했는데, 배가 뒤집힐 것을 두려워한 병사가 배에 매달려 있는 병사의 손을 잘라 떨어뜨렸고, 배 안에는 손가락이 수북히 모였다고 한다.
대승한 뒤, 신하들은 경관(京觀)을 만들 것을 상소했지만 장왕은 물리친다. 무(武)라는 글자는 과를 멈추어 쓰기, 난폭함을 막고 전을 세우고 대를 유지해, 공을 정하고 백성을 생각하고 사람들을 화합하고, 재물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자신이 한 것은 이 무덕에 들어맞지 않으며, 자신의 조국을 위해 충성을 다한 진나라 병사들의 사체로 경관을 만들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여기서 초장왕은 춘추의 패자로 여겨지게 된다.
진(晉)나라를 패퇴시키고 패업을 이룬 장왕은 진나라를 따르는 송나라를 표적으로 정했다. 장왕이 제(齊)나라에 보낸 사신이 송(宋)나라를 지나가다가 피살당하자, 전광석화 같이 송나라에 쳐들어가 수도 상구(商丘)를 포위했다. 이전, 노나라도 초나라의 맹하에 들어가는 등, 착실하게 장왕의 패업은 완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화원(華元)을 비롯한 송나라군의 저항에 의해, 기원전 594년 5월이 되어도 상구를 공락하지 못하고 장왕은 결국 퇴각했다. 후에 송나라는 초나라에게 항복했다. 기원전 59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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