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칠웅(중국어 정체: 戰國七雄, 간체: 战国七雄)은 전국시대부터 진나라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은 일곱 나라를 지칭한다. 전국시대에는 그 외에도 여러 나라들이 있었으나, 이들 일곱 나라가 가장 강력했고 중국사에서 중요하게 취급된다.
전국 칠웅(戰國七雄) 7개 국가 멸망순서로 요약 정리
1. 한나라(韓,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30년)
진(晉)에서 분리된 삼진(三晉) 중 하나. 수도는 초기에는 양책, 후기에는 신정(新鄭)이었다. 다른 명칭으로는 소한(小韓)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영토는 북쪽으로는 지금 중국의 하남성(河南省), 서쪽으로는 지금의 호북성(湖北省)에 이르렀고, 영토의 길이가 구백 리에 달했다고 했다. 갑병 30만을 낼 수 있고, 무기가 뛰어났다.
한나라 왕실의 조상은 춘추 시대 진나라(晉)의 공족이며, 진 목후(晉穆侯)의 아들인 환숙(桓叔)의 아들뻘이 되는 한만(韓萬)이 한원(韓原)이라는 지역에 봉해졌던 것을 기원으로 하여 시작되었다. 희성(姫姓)을 가졌던 한무자(韓武子) 한만의 일가들이 한씨(韓氏)를 칭하였고, 성씨와 땅이름에서 따와서 지칭되었다. 다만 그 이전에도 같은 이름을 가진 한나라(韓)가 있었다. 이 한나라는 진나라(晉)에게 멸망했고, 이 나라도 한원 지역으로 기반을 한 나라였다.
기원전 620년 한만의 고손자 한궐(韓厥)이 사마로 등용되었고, 그 군락이 뛰어났다. 과거에 신세를 지었던 조씨(趙氏) 일족의 재부흥에 힘을 보태었고, 그 여망으로 기원전 573년 한궐이 정경(正卿)과 중군을 이끄는 장수가 되었고 기원전 541년 그의 아들 한기(韓起)도 정경이 되면서, 그는 정치를 관장하는 대신인 육경(六卿)이 되었다. 춘추 시대 말기에는 한호(韓虎)가 조씨, 위씨(魏氏) 일족등과 함께 육경의 중에 강력한 가문인 지씨(知氏) 일족을 기원전 453년에 멸망을 시켰다. 후에 위씨, 조씨와 함께 진나라의 영토를 분할하여 독립하였다. 그 후, 기원전 403년에 주나라부터 정식 제후로 인정을 받아서 비로서 전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375년 정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을 시켰고, 전국 칠웅 중에 최약체였고. 항상 서쪽에 있는 진나라(秦)의 침공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신불해(申不害)을 재상으로 발탁한 한 희후(韓喜侯)의 치세에는 국내도 안정되고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이어서 즉위한 한 선혜왕은 기원전 323년에 왕으로 자칭하였고, 재상 신불해가 죽은 후에는 다시 진나라의 침공에 시달렸다.
한나라의 패망을 우려했던 공자 한비(韓非)는 나라를 강하게 만들게 하는 방법을 가르켜주는 책을 저술하였고, 그 책이 바로 그 유명한 한비자(韓非子)이다. 그러나 한비의 주장은 모국인 한나라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진왕 영정(嬴政)이 한비자에 관심이 있었다. 한나라는 역으로 이용해 정국(鄭國)이라는 사람을 진나라에 보내었다. 진나라가 관개 사업을 하도록 하고, 진나라의 국력을 쇄퇴시키려고 하였지만 이에 발각되었다. 이 공사로 만들어진 수로는 후에 정국거(鄭國渠)로 불리며 중국 고대 3대 수로 시절 중에 하나가 되었다. 이 또한 공교롭게도 진나라를 풍요롭게 하였다. 기원전 239년 진나라(秦)의 장군 몽오의 공격으로 성 13곳을 빼앗겼고 기원전 230년 수도 신정이 함락되었고, 한왕 안(韓王安)이 스스로 항복하면서 한나라는 멸망했다. 6국 중에 가장 빨리 멸망하였고, 한나라의 영토 전체가 영천군(潁川郡)이라는 새로운 진나라의 행정구역이 되었다. 기원전 226년 한나라 옛 수도인 신정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진나라는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이 반란으로 한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한왕 안(韓王安)이 처형됐다.
2. 조나라(趙,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8년)
진(晉)나라에서 분리되어 나온 삼진(三晉) 중 한 나라. 북쪽엔 연나라와 붙어있고 남쪽에는 황하가 흐르고 있다. 도읍인 한단(邯鄲)은 상공업의 대중심지였다. 호복(胡腹, 통소매와 바지)을 채용하였고, 중국에 처음 기마전술을 도입한 나라다. 갑병 수십만과, 전차 천승, 말(馬) 만필을 낼 수 있었다.
조나라는 주 목왕(周穆王)의 윤허로 조부(造父)가 조성(趙城)으로 봉해졌고 그 이후에 조씨(趙氏)를 칭하면서, 조씨 가문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 후 조씨 일족들은 진나라(晉)의 신하가 되었는데, 진 문공(晉文公)의 측근인 조성자 조최(趙成子 趙衰)가 높은 관직에 올랐고, 조씨 가문은 크게 번성하였다. 춘추 시대 말기에는 진나라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육경(六卿)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재상 조선자 조순(趙宣子 趙盾) 사후에는, 조씨 가문은 여러 가문들에게 견제와 숙청을 당하고 조 선자의 손자 조 문자 조무(趙文子 趙武)가 등장할 때 까지 몰락한다. 기원전 456년 육경 중에 세력이 강했던 지씨 일족의 수장인 지양자 지요(智襄子 智瑶)가 한씨, 위씨 일족을 거느리고 조씨 가문을 멸족을 시킬려고 하였다. 조씨 가문의 수장인 조 양자 조무휼(趙襄子 趙無恤)은 한호(韓虎), 위구(魏駒)에게 말하기를 "지씨는 탐욕스러워, 우리 조씨가 멸족 된 뒤에는 당신들 차례다."라고 말하면서 설득에 성공한다. 세 가문의 역공에 당하여 지씨 가문은 멸망하고 진나라의 영토를 조씨, 한씨, 위씨의 세 가문이 나누었고 각각 독립하였다. 그 후에 기원전 403년에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는 정식으로 제후국이 되었다.
조 무령왕 시대에는 주나라보다 강력한 세력이 되었고, 왕을 칭하게 되었다. 조 무령왕은 기원전 307년 호복을 도입했는데 호복은 당시 북방의 유목 민족이 입던 바지다. 당시 중국에는 사대부들은 헐렁한 옷 자락이 긴 옷을 입고 있어 전시에는 전차를 타고 싸우는 형태였고, 말을 타고 싸우기에는 옷이 매우 불편했다. 조 무령왕은 북방 기마병사의 복장에 눈독을 들이고, 자국에도 호복을 도입하고 싶었다. 이에 실행하기 위해서 전차에 타는 병사들에게 호복을 입혔고, 말에 직접 걸친 훈련를 하였다. 조나라의 경대부들은 강력하게 반발하지만 조 무령왕은 강력하게 실행하였고, 조나라의 기마병은 큰 위력을 발휘하여 조나라의 세력은 확대하였다.
기원전 298년 조 무령왕은 양위했다. 왕위는 자식의 혜문왕에게 물려주고 스스로는 주부(主父)라고 칭하였고, 실질적인 권력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295년, 혜문왕과 공자 장(公子章)의 후계 다툼이 일어났다. 그 일로 인하여 무령왕이 유폐되었고 뒤에 굶어죽었다. 조나라의 전성기가 끝나고 진나라(秦)의 공세에 시달리는 약소 국가가 되었다. 인상여(藺相如)와 염파(廉頗), 마복군 조사(馬服君 趙奢)와 같은 명장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들에 의해서 조나라는 당분간 버티지만 인상여가 사망한 후에는 기원전 260년 장평 전투에서 진나라 장군 백기(白起)에게 대패하였고, 조나라 병력의 대부분을 잃었고 조나라는 급격하게 약해졌다. 장평 전투에서 승리한 진나라군이 수도 한단(邯鄲)에 진군하였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아이들도 죽어가는 등 조나라가 멸망 직전에 몰렸지만, 조나라의 백성들이 일치 단결하자, 전국 4공자 중에 한 사람인 재상 평원군이 위나라의 신릉군, 초나라의 춘신군에게 원군을 보내 줄것을 호소하였고, 원군이 오자 진나라군을 격퇴하였다.
장평 전투 이후에는 군사적으로는 쇠퇴한 조나라이지만 여전히 수준 높은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각지에서 고명한 학자가 모였다. 유명한 학자로는 평원군의 식객이자 명가(名家)의 대표적 인물인 공손룡과 음양가의 대표적 인물인 추연이 있었다. 그리고 조나라 출신의 학자로는 역사서 우씨춘추(虞氏春秋)를 저술한 우경(虞卿), 극자지언(劇子之言)이란 언행록을 남긴 극자(劇子), 종횡가, 병가의 두 분야에서 저작을 남긴 방난(龐煖)이 있으며, 명장 악의의 친족으로 도가의 황로사상을 계승한 악하공도 조나라 멸망 직전까지 조나라에 머물었다. 장평 전투에서 패배한 효성왕도 유학자 순자(荀子)와 초나라의 출신 병법가 임무군(臨武君)을 불렸고 군사에 대하여 물어보는 등 적극적으로 인재 등용에 힘을 셨다.
유목왕 때에는 흉노에서 국경선을 지킨 이목(李牧)이란 명장이 있어 진나라군을 격퇴하였다. 당시 진나라의 공격을 한시적으로 막은 장수로는 초나라의 항연(項燕)과 이목등 두명 뿐이었다. 그런데 이목도 유목왕이 총애한 신하인 곽개(郭開)의 참언을 받아들이고 이목을 죽였다. 기원전 228년 진나라의 장수 왕전이 조나라를 공격하였고 수도 한단이 함락되었고, 유목왕이 진나라군에 사로잡혔고, 조나라는 멸망하였다. 후에 왕족인 조가(趙嘉)가 대(代)라는 지역에 피하여 대왕(代王)을 칭하여 조나라를 재건하였다. 그러나 조 대왕의 조나라도 연나라와 함께 기원전 222년에 완전하게 멸망되었다.
3. 전국시대 최초의 부국강변국가 위(魏,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5년)
진(晉)나라에서 분리되어 나왔다. 한나라, 조나라와 더불어 삼진(三晉)이라고 일컬어진다. 토지가 사방 일천 리에 달했으며, 춘추전국시대의 국가 중 가장 인구가 많았던 나라였다. 갑병 30만과, 말 오천 필, 전차 육백 승을 낼 수 있었다.
변법(變法) 운동의 선구자 이회, 관개사업에서의 서문표(西門豹)의 활약이 유명하고, 문후(文侯)가 이회를 등용하여 새로운 경제정책을 실시하고, 토지제도와 농업기술의 개혁을 단행하여 열국(列國) 중에서 최초로 부국강병의 길을 열었다. 이회는 또한 『법경(法經)』이라는 새로운 법률서를 만든 법률학자이기도 했다.
원래 주나라의 봉건제 밑에서는 정치는 덕(德)의 이념에 의해서 뒷받침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국시대의 집권국가가 되자, 덕의 이념은 아무런 권위도 갖지 못하게 되고 힘에 의한 법술(法術)이 권위 있는 이념이 되었다.
위나라는 전국 초기에 이같은 새로운 이념의 연구와 실천의 중심지였다.
문후(文侯)의 인재 등용, 관개사업 추진에 의해 다른 6국에 앞질러 세력을 얻어, 위나라 수도 안읍(安邑)은 전국 초기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225년 결국 진나라가 공격했고 진나라 군대의 수공으로 수도 대량성이 침수당하면서 위나라는 진나라에게 멸망당하게 된다.
4. 초(중국어: 楚, 병음: Chu, 기원전 1042년 ~ 기원전 223년)
현재의 후베이성인 장강 중류 지역에서 일어난 나라, 군사력은 갑병 수십만, 전차 천승(乘)과 기병 1만기를 낼 수 있었다. 미성 웅씨가 국성으로 황하 문명을 대표하는 주나라에 비해 장강 문명을 대표하는 나라로 분류되며, 형(荆) 또는 형초(荆楚)로도 불린다. 중국 남방계 민족의 정체성을 가진 나라이다. 중국과학원의 발육생물학연구소 위안이다(袁義達)의 연구에 따르면 전국 시대의 초나라, 오나라와 월나라가 있었던 저장성, 안휘성, 강소성의 중국 남부 사람들은 중국 북부 사람들과 유전자 구조상 차이가 존재한다고 한다.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그 군주의 처음 작위는 자작이었으나, 기원전 704년에 무왕이 왕을 자칭했다.
사마천의 사기 초세가에 초나라에 대한 기록이 있다. 초나라는 삼황오제의 한 사람인 전욱 고양의 후손이 세운 나라다. 전욱은 창의의 아들이고, 그 후손 육종은 축융의 동생으로 제곡 고신때 화정(火正, 고대 중국의 불을 맡은 벼슬)을 지낸 오회의 아들이다. 주 문왕 때 계련의 후손 중에 육웅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초나라 웅씨들의 시조이다.
육웅의 증손자인 웅역에 이르러 주 성왕은 주나라 건국시에 주 문왕과 주 무왕을 도운 공신들의 후손들을 찾아내어 논공행상을 할 때 웅역의 증조부인 육웅이 세운 공로로 웅역에게 자작의 작위를 수여했고 형만(荊蠻) 땅에 봉했다. 하지만 그 봉지는 남작에 준해서 주었다. 웅역은 초나라의 도읍을 단양으로 정했다.
서주 이왕때에 이르러 주나라의 세력이 쇠약해지자 당시 자작인 웅거는 군사를 일으켜 용(庸)과 양오(楊奧)에서 악(鄂)에 이르기까지의 땅을 정벌하여 초나라의 영토로 삼았다. 그 이후 웅거는 잠시 왕으로 자칭하다가 포악한 서주 여왕이 즉위하자 정벌당할 것이 두려워 칭왕을 그만두었다.
기원전 841년에 서주 여왕이 국인폭동으로 쫓겨나자, 주나라는 잠시 공화기가 되어 제후들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상실하였다. 초나라는 그 혼란을 틈타 조금씩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기원전 822년에 웅순이 자작이 되자 군위를 둘러싼 내부 분쟁은 가라앉았고, 내부 분쟁에 쓰던 힘을 통합하여 외부로 돌리니 초나라는 마침내 빠르게 세력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약오, 소오와 분모가 자작이 되니 초나라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근방에 있던 당시에 가장 강한 국가인 수나라와 어깨를 겨뤘다. 기원전 741년에 웅통이 분모의 세자를 죽이고 자작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초 무왕이다. 기원전 704년 웅통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복 땅을 개간하여 초나라 땅으로 삼았다. 기원전 690년 초 무왕의 뒤를 이은 초 문왕은 도성을 단양에서 영으로 옮겼고, 기원전 638년 등(鄧)나라를 정벌하여 멸하고 초나라 땅으로 만들었다.
기원전 637년 송 양공이 회맹을 하려고 제후들을 우(盂)에 소집하자 초 성왕(楚 成王)은 회맹장에 군사를 매복하여 송 양공을 잡았다가 풀어 주었다. 기원전 631년 기나라(夔)가 조상인 축융과 육웅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멸망 시켰다. 그해 여름 성복(城濮)에서 당진과의 싸움에서 대패하였다. 기원전 626년 태자(太子) 상신(商臣)이 왕이 자신을 폐하려 하자 난을 일으켜 초 성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초 목왕) 기원전 614년 려(旅)가 목왕의 뒤를 이어 초왕이 되었는데 춘추오패 중의 한사람인 초 장왕(楚 莊王)이다. 초나라는 이후 장강 이남의 지역을 호령하는 나라로서 맹위를 떨쳐 나갔으나 초왕 부추(負芻) 때에 이르러 기원전 223년 진나라(秦)에 장군 왕전(王翦)의 공격으로 대장군 항연(項燕)과 왕 부추가 사로잡히고 남은 세력들도 모두 기원전 223년 진나라의 장군 왕전의 아들 왕분과 몽염에게 항복하면서 멸망하였다.
5. 연나라(燕國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22년)
주 무왕 희발(姬發)이 은나라을 멸망 시키고 그의 동생 소강공(召康公) 석(奭)을 연(燕)의 제후(소 강공 희석(召 康公 姬奭)에 봉했다. 하남성(河南省)지역에 이름이 같은 연나라가 있어서, 구별하기 위해서 하남성 지역의 연나라를 남연(南燕)이라 칭하고, 소공석의 연나라를 북연(北燕)이라고 호칭하였다. 당시에는 연(燕)이 아닌 언(匽, 郾)이라는 한자로 표기하였다. 소공석의 후손들은 산동성(山東省) 지역의 제후로 봉해졌지만, 주 성왕의 치세에 현재의 북경 부근으로 옮겼다. 이 때, 현지에 있던 섬서성(陝西省) 출신의 한후(韓侯)라고 칭하던 세력이 동쪽으로 옮겨졌다. 그 주민들은 대부분 한씨(韓氏)를 사용하였다. 한국의 사학자 이병도는 이 한후 세력을 한씨 조선(韓氏朝鮮)이라고 주장을 하였다. 연나라 동부에 기후(箕侯)라는 세력이 있었는데, 춘추시대에 연나라의 속국이 되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멸망했다. 춘추시대 이후, 연나라의 사대부층에 한씨와 기씨를 성으로 사용한 사람도 있었다.
춘추시대에 연나라에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기원전 664년에 북방의 산융에게 공격받았을 때, 당시 군주였던 장공(莊公)은 이웃나라인 제나라 환공(桓公)에게 원군을 청하였고, 산융군을 격퇴했던 적이 있었다. 산융과 전쟁한 후, 장공은 환공에게 감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제나라 환공의 군대를 움직이게 하게 하였다. 그 때에 군이 연나라와 제나라의 국경을 넘어 가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자국에서 군대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천자(天子)인 주나라왕(周王)이 가질수 있었고,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管仲)은 환공에게 일부 영토를 할양하여 연나라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하여, 제 환공은 제후들의 신뢰를 얻어 더욱 더 명성을 얻었다.
전국 시대로 들어서고, 기원전 334년경에 사기 소진열전(史記 蘇秦列傳)에 의하면 "동쪽으로 조선과 요동반도, 북쪽으로 임호와 누번, 서쪽으로 운중과 구원, 남쪽으로 호저와 역수(易水)가 있다."라고 하였다. 이 당시 연나라의 영토는 동쪽으로 조선에 이르고, 남쪽으로 역수(易水)까지 영토가 이천여 리에 달했으며 갑병 수십만과 전차 6백승(乘), 기병 6천기(騎)를 낼 수 있었다. 기원전 323년에 왕으로 자칭하었다.
기원전 315년, 연왕 쾌(燕王 噲)는 재상인 자지(子之)를 총애하여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선양을 하였던 일을 예로 삼아 재상인 자지에게 선양을 하였고, 이로 인해 태자 평(太子平)이 거병하여 연나라에 내전이 일어났다. 이 틈을 타고 다음 해에 제나라가 태자의 원군을 자칭해 군사를 일으켜 침공하였고, 기원전 313년에는 태자 평과 자지가 살해되고 연왕 쾌가 자살하였다. 기원전 312년, 한나라에 달아나 있던 공자 직(연왕 쾌의 서자)이 제나라의 속국이 되는 조건으로 연왕에 즉위하였는데 그가 연 소왕(昭王)이다. 소왕 때에 장수 진개(秦開)가 고조선(古朝鮮)을 침략하여 랴오닝성 만번한지역까지 영토을 확장하였고, 기원전 285년에는 장수 악의(樂毅)를 총사령관으로 삼고 제나라를 공격해 수도와 대부분 지역을 함락시켰다.
기원전 222년, 연왕 희(燕王喜)의 아들 태자 단(太子丹)은 위나라 장수 형가(荊軻)와 진개(秦開)의 손자 진무양(秦舞陽)을 진(秦)나라에 보내어 진 시황제(秦始皇帝)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연왕 희는 요서, 요동으로 도망쳤으나 진나라 군대에 포위되었다. 연왕 희는 아들 태자 단을 죽이고 그 목을 진 시황제에게 바치면서 선처을 구하지만 진 시황제는 연왕 희와 잔존 세력을 공격하여 연나라을 멸망시켰다.
6.제(齊,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21년) *현재의 산둥 지방.
주(周)의 문왕(文王)이 나라를 건국할 때 재상 강태공(姜太公)에게 봉토로 내린 땅이다. 당시에 주나라의 세력으로만 동중국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동이라는 불리는 이민족이 이 지역에 있었다. 영지를 하사한 것과 다르게, 태공망 강상에게 동중국 지역 세력들을 토벌할 것을 명한 것이 실상에 가까울 것이다. 강태공은 제나라의 제후가 되었고, 현지 풍속에 맞춰 정치를 집행하였고, 제나라를 안정시켰다.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의 반란 후에, 성왕은 "동쪽은 바다에 이르러, 서쪽은 하수에 이르러, 남쪽은 목릉에 이르러, 북쪽에 이르러서 5후 9백이 죄를 범했을 경우, 그들을 토벌해도 괜찮다."라고 명했다. 그 후도 영토를 확대하였고, 춘추 시대 초기에는 동쪽의 강국이 되었다. 제나라는 바다를 접하여 있어, 소금의 생산을 하였고, 철이 나오기도 하였기 때문에, 자원이 풍족하게 되었다. 15대 군주 환공(桓公)은 첫 번째 춘추 오패의 패자가 되었다.
제환공의 사후 아들들 간의 후계 싸움이 일어나 나라는 혼돈에 빠졌다. 환공이 태자로 지목한 효공 대신 환공의 총신 역아와 초가 지지한 무궤가 뒤를 이었고, 무궤는 효공을 앞세운 송 양공 주도의 제후연합군과 국내의 호응에 쫓겨나 죽었으나 소공 · 혜공 · 의공 세 형제가 효공의 즉위를 저지해 송 양공이 재차 제나라를 침입하고서야 효공은 즉위할 수 있었다. 효공의 치세에는 일단 안정되었으나 이미 패자의 권위는 잃었다. 혼돈은 아직도 끝나지 않아서, 효공 사후에 효공의 아들을 또 다른 환공의 총신이며 소공의 당인 공자 개방이 죽이고 소공이 즉위하고, 소공이 죽은 후엔 일단 소공의 아들 사가 즉위했으나 얼마 못 가 의공이 죽이고 의공이 즉위하는 등 혼돈은 계속 이어졌다. 이 혼돈은 환공이 죽은 지 35년 후에 혜공이 등극함으로써 겨우 종식되었다. 그 동안, 이미 소공의 시대에 패자는 진(晉)나라의 문공(文公)이 되었고 소공은 문공의 패업에 협조했다. 문공이 패자가 되고 제나라도 그대로 국력을 유지하였지만, 중원의 주도권이 북쪽의 진(晉)나라와 남쪽의 초나라의 패자 쟁탈전으로 옮겨졌고, 그 상황에 제나라와 |진(秦)나라가 관련되는 것이 춘추 시대 중기의 흐름이 되었다. 그 때부터 서서히 대부들의 힘이 강해지고, 군주 권력은 약해지고 있었다. 특히 제나라 공실의 지파인 국씨, 고씨, 최씨, 경씨와 제나라 밖에서 온 포씨와 진씨(陳氏) 등 6개의 가문의 힘이 강했다.
기원전 672년, 진나라(陳)에서 공자 전완(田完)이 진나라 유민들을 데리고 제나라로 망명하여 강력한 대부 가문이 되었으며, 그 후손들이 전, 손, 문, 설, 왕 등의 가문으로 창성하였다. 제 경공은 안영과 전양저 등의 명신에 힘입어 작은 패업을 이루었으나, 이 당시에 오히려 전씨는 제 경공의 실정을 틈타 민심을 사고 세력을 점차 강화했다. 이를 본 제나라 재상 안영은 진나라의 양설힐(羊舌肸)과 대화를 나누면서, 규성 전씨 왕조가 제나라에 들어 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기원전 489년, 경공이 죽자 전걸은 경공의 유지를 뒤엎고 제 도공을 임금으로 세웠으며, 전걸의 아들 전항은 도공을 죽이고 제 간공을 임금으로 세웠다. 제 간공은 총신 감지를 끼고 전항과 대립했으나 전항은 감지와 간공을 모두 죽이고 제 평공을 임금으로 세웠다. 이후 전씨는 평공, 선공, 강공 3대를 걸치며 전항 - 전반 - 전백 - 전도자 - 전화가 이어가며 사실상 임금 노릇을 했다.
기원전 386년에 전화(田和)가 강공(康公)을 몰아내고 전(田)씨가 제나라 제후가 되었다. 위왕(威王)이 제나라 첫왕으로 호칭했고, 기원전 4세기에는 제 민왕이 진(秦)나라와 중국을 양분하여 동제, 서제를 일컬을 정도의 세력을 자랑했다. 또 송나라를 멸하였다. 그러나 민왕의 지나친 팽창 정책과 외교적 충돌로 말미암아 연나라를 주축으로 하는 제후 연합군이 일어났고, 악의를 앞세운 연합군 앞에 제 민왕도 살해당하고, 거莒와 즉묵을 제외한 전 성읍이 함락되며 멸망의 위기에 놓였다. 민왕의 아들 제 양왕이 즉위해 항전을 이어 갔으며, 전단이 악의와 연나라 간을 이간시키고, 새로 온 대장 기겁을 무찌르며 나라를 회복하는 것에 성공했다.
양왕의 아들로 뒤를 이은 인물이 마지막 왕인 제왕 건(齊王 建)이다. 건과 섭정 후승은 진나라와 친교를 맺고, 다른 나라들이 차례차례 진나라에 망하는 것을 수수방관했다. 마침내 일개 성읍국가에 불과한 위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망하고서야 위협을 느껴 진나라에 대한 방비를 했으나, 기원전 221년 진 시황제가 침공하자 제나라에는 이미 이를 막아낼 능력이 없었다. 결국 제왕 건이 스스로 항복하면서 멸망하였다.
7. 진(秦, 기원전 900년경 ~ 기원전 221년(중국 통일) ~ 기원전 206년 멸망)
은 중국의 왕조이다. 동주(춘추/전국)시대 제후국이었다.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여 제국 진나라를 이루었지만, 기원전 206년에 망했다.
왕실의 성은 영(嬴), 통일 시의 수도는 함양이었다.
기원전 900년즈음에 주의 효왕(孝王)을 시중들고 있던 비자(非子)가 말의 생산을 실시해, 공적을 올려 영(嬴)이라는 성을 받아, 대부가 되어, 진 땅에 영지를 받았다고 전한다. 진이 발흥한 지역은 현재의 간쑤 성 리 현 부근이며, 현재 이 땅에서 진의 선조의 능묘라고 추정되는 것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770년에 주나라가 견융에 쫓겨 도성을 동쪽으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양공은 주의 평왕을 호위 한 공으로 주의 구지인 기(岐)에 봉해지게 되었고, 이후 진은 제후의 반열에 오른다.
진은 중원의 다른 국가들에게는 야만스러운 나라라고 업신여겨지고 있었다. 진나라는 주로 서융과 항쟁하면서 영토를 확장했고, 법률의 정비 등을 실시하여 나라의 기틀을 만들어 갔다. 기원전 677년에는 수도를 옹성(雍城, 현재의 산시 성 바오지 시 펑샹 현)에 두었다. 9대 목공(穆公)은 백리해 등 타국 출신자를 적극적으로 등용, 서융을 크게 토벌해 서융의 패자가 되었고, 주변의 소국을 합병하고 영토를 넓혀 이웃 진(晋)에 필적할 정도가 되었다. 때마침 진(晋)이 여희의 난을 겪으면서 혜공을 옹립하지만, 혜공은 배신을 일삼고 목공은 혜공의 군대를 한원에서 격파했다. 혜공 사후에는 혜공의 형 중이를 진의 임금으로 삼았는데 이가 진 문공(文公)이다. 문공 사후, 진(秦)은 다시 진(晋)을 격파하고 영토를 강탈했다. 이러한 실적에 근거, 목공은 춘추 오패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러나 목공이 죽었을 때, 177명의 가신들은 순장의 풍습을 따라 함께 죽었고, 명군과 인재를 한 번에 잃은 진나라은 기세를 잃어 영토는 축소되었다. 나라를 유지할만한 힘은 아직 유지하고 있었지만, 춘추시대 중기 이후 주역은 북쪽의 진(晋)과 남쪽의 초(楚)였고, 진은 이에 비하여 한 발 밀려나 있던 상황이었다.
전국시대에 들어 진(晋)이 한(韓)·위(魏)·조(趙) 삼진(三晋)이라 나뉘고 삼진 중 위나라가 전국 초기, 명군 문후에 의해 강하게 성장하였고, 진은 위에게 압박을 받고 영토를 빼앗긴다. 이 상황에 분개한 25대 군주 효공(孝公)은 위나라의 인재 상앙(商鞅)을 등용해 행정 제도의 개혁과 십오제(什伍制)의 채용 등을 실시해 진을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로 태어나게 했다. 이러한 상앙의 변법 운동에 의해 진은 철저한 법치주의 국가로 변모하였고, 국내의 생산력, 군사력을 높여 서서히 다른 육국을 압도하며 갔다. 효공은 기원전 350년, 도성을 함양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천하 경영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 후 효공의 아들이 강해진 국력을 기반으로 기원전 324년에 왕을 칭하니, 이가 혜문왕(惠文王)이다. 기원전 316년에 혜문왕은 촉을 점령해, 이 땅의 개발을 실시하여 한층 더 생산력을 올려 장강의 상류를 차지하게 되었고, 장강의 흐름을 따라 진격할 수 있게 되어 초를 압박할 수 있었고, 초와의 싸움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섰다. 혜문왕은 모략가인 장의(張儀)를 등용하고, 초를 질질 끌어 돌려 전쟁으로 격파해, 초의 회왕을 사로잡는데 성공한다. 혜문왕은 위와 한의 왕들을 각각 마부와 배승으로 삼을 정도로 굴복시켰다. 하지만, 혜문왕의 아들 무왕의 시기에 그가 장의를 내쳐버리자 장의는 위에 망명, 이로 인한 한과의 격전 끝에 많은 군사를 잃었고, 혜문왕 자신은 갑자기 사고사하여, 후계자 싸움이 일어나 전력이 후퇴해 버린다. 이 시기 동쪽에서는 제나라가 신장하고 있어, 은나라의 후예인 송을 병합하는 등 주변 제국을 압박하고 있었다. 기원전 288년 당시에는 제를 동제, 진을 서제라고 칭했다. 제나라가 곧바로 제호를 취소했으므로, 진도 취소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 시기는 서쪽의 진나라, 동쪽의 제나라의 2강국 시대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제나라는 연나라의 악의가 지휘하는 5개국 연합군에 의해 수도 임치(臨淄)가 함락. 망국 직전까지 몰리는 위기를 겪게 되었고,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 진나라는 강국의 위치를 굳건히 할 수 있었다.
혜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이복동생인 소양왕(昭襄王)의 시대에 재상 위염(魏冄)과 백기 장군의 활약으로 진은 몇 번이나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소양왕을 즉위시킨 재상 위염의 권력이 너무 커진 것을 우려한 소양왕은 재상 위염을 숙청하고, 대신 범저(范雎)를 등용한다. 범저가 진언한 것은 유명한 원교근공책으로 먼 제나라나 연나라와 동맹해 가까이의 한·위·조를 공격하면 가까이의 토지가 손에 들어 오게 되었고, 이는 곧바로 진의 영토로 집어 넣는 것이 용이해진다는 것이다. 소양왕은 범저를 재상으로 삼아 기원전 260년에는 백기가 조나라로 진격, 장평 전투를 통하여 조군을 격파, 조의 포로 40만 명을 생매장하여 조나라의 예기를 꺾어버리고 기원전 255년에 주나라를 멸해 그 영지를 접수하여 진의 위세는 한층 더 높아졌다.
진나라는 기원전 221년 제31대 왕인 영정(진시황)이 모든 나라를 멸망하고 통일하여 최초의 황제(皇帝)의 위에 오르면서 중국은 최초의 단일국가 체제로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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