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03~221)는 기원전 403년부터 진(秦)이 중국 통일을 달성한 기원전 221년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며, 전국책(戰國策)에서 유래되었다.
전국시대는 기원전 403년 진(晉)나라의 대부 조(趙), 위(魏), 한(韓) 3가문이 주(周)나라 왕실로부터 정식 제후로 공인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조(趙), 위(魏), 한(韓) 3국이 후(侯)라고 칭해졌다는 것은 단순히 하극상을 의미한 것만이 아니라 주왕이 이를 인정하고 스스로 종법제(宗法制)를 번복해 주왕실의 권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후 강력한 제후들은 스스로 왕(王)을 칭하게 되고 전국시대 이전까지 중원에서 나름대로의 사회적 질서와 정치적 균형을 유지시켜오던 봉건제도가 무너지게 된다. 얼마 후 제(齊)나라도 기존의 강씨(姜氏)를 대신하여 전씨(田氏)가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부터 각 제후들이 주나라로부터 정신적 독립을 지향해 제각기 왕을 칭하였다.
춘추 시대 초에 140여 개국이었던 도시국가의 거의 모두가 이 때에 와서 7개 강대국 중 어느 한 영토에 편입되어 버렸다. 처음 강력했던 나라는 위나라였다. 위문후(文侯)·혜왕(惠王)은 널리 인재를 구하여 대규모 관개사업을 벌이고, 한편으로는 지배한 지역을 군현화(郡縣化)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다음 제(齊)가 패권을 쥐었지만 얼마 안 있어 변경의 진(秦)·연(燕)이 강대해져 세력을 팽창함으로 인해 비로소 중원은 진·초·연·제·한·위·조의 7웅이 할거하는 형세로 바뀌어졌다. 그 중 진은 효공(孝公) 때 상앙의 변법에 의하여 크게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성과를 올려 다른 나라를 누를 수 있는 힘을 보여주게 된다. 소위 합종연횡(合從連衡)이 제창된 것도, 또 4군(君)의 활약이 있었던 것도 이 시기였다. 이윽고 6국이 진(秦)에 굴복당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가 출현하게 되었다. 전국 시대는 봉건제에 따르는 읍제국가가 해체되고 중앙집권적인 군현제에 의한 고대 통일국가가 형성되는 과도기에 해당한다.
전국 시대가 되자, 사 계급 출신의 관료가 실제의 정치를 장악하게 되어, 그 최고 지위에 상(相)이 놓인다. 그 임무는 군주를 보좌하여 정치의 전반을 총리하는 일이었는데, 이것은 종래의 대부 등과는 달라서 세습이 허용되지 않았다.
군제(軍制)에 있어서도 이 때까지는 대부가 세습적으로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임에 반하여 장군이라는 직위가 신설되어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군주에 의해 장군이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서주(西周)로부터 춘추 시대에 걸쳐서는 정치 군사 양면에 있어서 대부가 세습적으로 권리를 가졌지만, 전국 시대에는 정치와 군사가 분리되고 군주에 의해서 임명이 된다.
전국시대에는 군주권이 강화되고 능력에 따른 관료군이 형성되고 다른 나라 출신자까지도 적극적으로 관료로 채용되는데, 내정개혁을 단행한 상앙, 연횡설(連衡說)을 주장한 장의(張儀), 시황제의 승상이 된 여불위(呂不韋) 등이다. 춘추 말기에 나온 공자(孔子)는 노(魯)의 고관이 되어 개혁에 실패한 후, 여러 나라의 군주에게 그 정치학설을 설(說)하고 다니면서 그 학설이 실현되도록 운동했다. 이것은 당시에 이미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나고 하나하나의 나라를 초월해 중원 전체의 공감대와 유대감을 조성하는 공통된 문화·사상이 전반적으로 형성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지, 오로지 자기의 영지(領地)와 그 이익관계 속에서만이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제한되고 단절된 당시 대부 계층의 보수적 시대관 내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여겨진다.
철기(鐵器)의 보급에 따라 눈부신 발전을 보여주기 시작한 농업 생산력이 상공업의 발달을 재촉하면서 사회 경제의 여러 양상에 커다란 변혁을 초래한 시기였다. 국경을 초월한 대상인의 활발한 교류로 국경을 넘어 여러 나라에 판로를 가진 대상인들은 사치품을 판매하여 큰돈을 벌었다.
서민의 필수품인 철기나 소금 등을 제조·판매하는 대상업 수공업자들의 재산은 때로는 왕후(王侯)와도 필적한다고 일컬어졌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일일이 통관세를 필요로 하는 국경이라는 것은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으며 이로인해 점차적으로 국경이 없는 중원의 통일을 이면에서 추구하는 촉진제 역할을 했다.
대상인들이 전국을 유세하면서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은 분립한 강국들이 서로 대립·항쟁하는 와중에서도 문화, 경제의 면에 있어서는 중원이 하나의 세계로 성립되어져 있었다는 점을 뜻한다. 춘추 시대 후반 이래, 청동기의 명문(銘文) 같은 장식성이 강한 문자에는 지방색이 엿보이지만, 평소에 죽간(竹簡) 등에 씌어진 문자에는 상당한 통일성이 엿보이는 것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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