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제(秦始皇帝) 시대

올드코난 2015. 3. 10.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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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시황제(중국어: 秦始皇帝, 병음: Qín Shǐ Huáng Dì, 기원전 259년 1월 ~ 기원전 210년 음력 7월 22일) 진나라의 제31대 왕, 중국 최초의 황제. 성은 영(嬴), 이름은 정(政) 영정이이다. 조(趙)라고도 하여 조정(趙政), 혹은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설대로 여정(呂政)이라고도 한다. 공식적으로는 진 장양왕 영자초의 아들.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1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41년까지 여불위(呂不韋)가 섭정을 하였고 기원전 241년부터 기원전 210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불로불사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대규모의 문화탄압사건인 분서갱유사건을 일으켜 수 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도량형을 통일하였고 전국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 중국 황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전근대의 중국에서는 특히 유학 관료들에 의하여 폭군이라는 비판을 계속 받았으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 이후부터 시황제의 진취성과 개척성에 초점을 맞추어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 최초의 황제이며 폭군이었던 진시황제(秦始皇帝) 시대와 최후

1. 출생 논란.

영정은 기원전 259년에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온 진나라 공자 영자초와 그 부인 조희의 아들이다. 그러나 원래 조희는 조나라 수도 한단의 기생으로, 조나라의 거상 여불위가 데리고 있었다. 여불위는 조희를 영자초에게 바쳤고, 영자초는 조희를 아내로 삼았다. 《사기》 여불위열전에서는 이 과정에서 원래 조희는 여불위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으나, 여불위가 이를 숨기고 정치적 목적에서 진시황제를 숨겨주었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이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2. 즉위 과정

영정은 조나라에서 태어나 성장했는데, 기원전 250년 56년에 걸쳐 진을 다스리던 소양왕이 사망하자 태자인 안국군이 뒤를 이었는데 이가 효문왕(孝文王)이다. 효문왕은 여불위의 계락에 의해 조나라 인질로 가 있던 영자초를 후계자로 삼게 되고 얼마 안가 즉위한 지 1년 뒤에 사망하고, 태자 영자초가 즉위해 장양왕(莊襄王 기원전 250-247)이 되고 영정은 곧 태자에 책봉된다. 장양왕은 자신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여불위(呂不韋)의 은혜를 잊지 않고 그를 승상으로 삼았다. 장양왕 2년 진나라가 군대를 이끌고 천하의 종실인 동주(東周)를 멸망시켰다. 이후 한나라를 공략해 성고(成皋),영양(滎陽)을 빼앗아 삼천군(三川郡)으로 삼았다. 다음해 진나라 군사들은 조와 한의 영토를 빼앗아 태원군(太原郡)을 설치했다.

기원전 247년 장양왕이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사망하자 조희 소생의 아들 정(政)이 진왕에 즉위했다. 당시 정의 나이는 겨우 13세에 불과했다. 조정(趙政)은 진나라의 성(姓)을 회복해 영정(嬴政)으로 이름을 바꿨다.

진왕(秦王) 정은 자신이 예전에 여불위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죄수에 가까운 지위에서 전국 칠웅의 최강국인 진나라의 군주가 될 수 있었음을 알았다. 때문에 여불위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진왕은 생모인 조희를 태후(太后)가 삼고 여불위를 "상부(尙父)"라 부르며 존칭했다.

원래 주(周)나라의 문왕이 붕어하기 전에 아들인 무왕(武王)에게 강태공(姜太公)을 친아버지처럼 대하라고 유언한 적이 있다. 강태공의 이름이 상(尙)이었기 때문에 무왕은 강태공을 "상부"라고 불렀다. 이후 역대 황제들이 대신을 부친과 같은 예절로 대할 때면 상부라는 칭호를 사용하곤 했다. 당시 진왕의 나이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국정을 주관한 것은 여불위였다.


3. 성교(成嶠)의 반란

영정이 즉위한 지 8년째 되던 해 이인과 조희의 친아들인 장안군(長安君) 성교(成嶠)가 반란을 일으켰다. 영정은 사실 여불위의 아들에 불과하기 때문에 왕위를 이을 자격이 없으므로 진나라의 왕위는 당연히 장양왕의 적자인 자신이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교는 여러 사람들에게 모두 들고 일어나 영정에 반대할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그의 반란은 진왕 정이 보낸 장군 왕전(王翦)에 의해 진압되었다. 당시 조희는 자신의 비녀를 뽑고 머리를 산발한 채 진왕을 찾아가 성교를 구해달라고 애원했지만 진왕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영정은 모친의 간청에 대해 "만약 이번에 동생을 용서한다면 골육들이 모두 반란을 꾀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아직 영정이 친정(親政)하지 않을 때였지만 그는 성교를 따라 반란에 동참한 병사들을 전부 죽이라고 명령했다. 당시 이렇게 죽은 사람들의 수가 수만에 달했다. 또 반란이 발생한 둔류(屯留) 지역의 모든 백성들이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는데 이렇게 유배당한 사람의 수가 십만이었다.



4. 노애(嫪毐)의 반란

진나라 왕이 된 시황제 영정은 친정을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기에, 승상이 된 여불위가 섭정이 되어 국사를 돌보았다. 여불위는 마음대로 국사를 휘둘렀으며, 심지어는 시황제의 모친 조태후와도 각별한 사이였다. 여불위는 노애라는 자신의 수하를 환관처럼 꾸며 조씨의 처소로 보냈고, 조씨는 노애와의 사이에서 2명의 아들을 낳았다. 조씨는 노애와 함께 수도 함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거처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노애가 잔치에서 술김에 자신이 태후와 간통한 사실을 흘렸다. 술에서 깨어난 노애는 진왕의 성정으로 보아 자신을 용서치 않으리라 여겨 한밤중에 태후가 거처하는 대정궁(大鄭宮)을 찾아가 구해달라고 했다. 노애는 태후와 짜고 병사들을 동원해 기년궁에 쳐들어가 진왕을 죽이려 했다.

진왕은 병변이 발생한 것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았고 오히려 성루에 올라가 어디서 오는 병사들인지 물었다. 병사들이 장신후 노애가 기년궁에 도적이 있다고 하여 잡으려 왔다고 대답했다. 진왕이 "장신후가 바로 역적이다. 너희들이 지금 돌아가서 노애를 생포하는 자에게는 백만 냥을 상으로 줄 것이며, 노애의 목을 바치는 자에게는 50만 냥을 줄 것이다. 노애 일당을 잡는 자는 작위를 한 단계 올려주겠다."라고 말했다. 

일이 틀어진 것을 발견한 노애는 샛길로 도망치다 공교롭게도 환기의 대군을 만나 생포되었다. 분노한 진왕이 노애를 수레로 찢어 죽이고 삼족(三族)을 멸했다. 또 태후의 궁에서 노애와 태후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를 찾아내 자루에 넣고 죽여 버렸다. 노애의 빈객 중 반역에 가담한 무리들은 전부 죽였고 반역에 가담하지 않은 약 4천여 가구는 모두 촉(蜀) 땅으로 유배시켰다. 태후는 작은 궁전으로 옮겨졌고 300명의 병사들을 시켜 마치 죄수처럼 감시하게 했다.


5. 여불위의 자결과 영정의 친정

노애의 반란을 진압하고 함양에 돌아온 진왕은 이 모든 원인이 여불위 때문이라고 여겨 여불위의 재상 인수와 권력을 몰수하고 고향에 돌아가게 했다. 여불위가 봉국(封國)에 돌아간 지 1년이 지났음에도 그의 집이 늘 제후의 빈객과 사자들로 붐비자 진왕은 혹시라도 그가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되어 편지를 보냈다. "그대는 전에 무슨 공로를 세워 하남에서 군(君)으로 책봉되었고 10만 호를 식읍으로 갖고 있는가? 진과 얼마나 친하기에 중부(仲父)라 불리는가? 가속들을 데리고 촉(蜀: 지금의 사천성 성도시) 땅으로 이주하도록 하라."

이 편지를 본 여불위는 결국 영정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극약을 먹고 자살했고 이때부터 영정의 친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6. 전국 통일과정

진왕 정 10년 진나라 대신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 중 진나라에 와서 유세하는 자들을 모두 쫓아내라고 권하자 진왕은 이들을 모두 쫓아내라는 축객령(逐客令)을 내렸다. 당시 여불위의 문객으로 있었던 이사(李斯)는 본래 초나라으로 축객령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신이 듣기에 태산(泰山)은 흙을 물리치지 않아 그렇게 크게 될 수 있었고 황하(黃河)와 바다는 가는 시냇물이라고 하여 가리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깊게 될 수 있었으며 왕(王)이 된 사람은 많은 사람들을 물리치지 않기 때문에 그 덕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제(五帝)와 삼왕(三王)에게 적이 없는 이유입니다. 지금 이들을 포기하심은 적국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빈객을 물리쳐 다른 제후들의 업적을 쌓게 하는 것이니 이른바 도적에게 무기를 빌려주고 양식을 빌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 글을 본 영정은 축객령을 취소하고 이사를 재상으로 삼고 본격적인 통일 작업에 들어간다. 제일 먼저, 진나라는 가장 세가 약했던 소한부터 멸망시켰다. 기원전 228년에는 조나라까지 멸망시켰다. 그 때, 연나라의 태자 희단이 자객 형가를 시켜 잔치 자리에서 영정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어, 기원전 225년에는 위나라, 기원전 223년에는 진나라 다음으로 세가 가장 세었던 초나라, 기원전 222년에는 연나라,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드디어 마지막 남은 제나라까지 멸망시켜 시황제의 나이 39세에 전 중국 땅을 마침내 통일하였다.


7. 최초의 황제 시황제로 즉위

시황제는 국왕(國王)라는 칭호가 자신에겐 맞지 않는다며, 새로운 칭호를 원했는데 이사와 왕관 등의 요청에 따라 새로운 칭호를 정하게 된다. 처음에 정은 도교에서 나오는 신비한 칭호인 태황(太皇)과 천황(天皇)과 지황(地皇) 중에서 어느 칭호를 정해야 할 지 고민이었다. 이사와 왕관 등은 태황과 천황과 지황 중에서 가장 높은 직위인 태황의 칭호를 바쳤다. 결국 고심 끝에 시황제는 삼황오제에서 '황'과 '제'를 따 합쳐서 황제(皇帝)라 칭하기로 하였고, 자신은 황제의 자리가 처음이니 시황제(始皇帝)로 부르라 명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시황제로 시작하여, 자신의 뒤를 잇는 황제들이 2세, 3세 등 만세까지 진 제국이 지속되기를 바랐다.

진시황은 "과거에 제왕(帝王)이 사망한 후 신하들과 자손들이 생전의 사적에 따라 시호를 정하는 것은 자식이 아비를 논하고 신하가 군주를 논하는 것과 같아 아주 좋지 않도다. 지금부터 과거의 시호법을 폐지하며 짐이 최초로 황제가 되었으니 시황제(始皇帝)라 하고 후대에 이세(二世), 삼세(三世)라고 하여 만세(萬世)까지 전하게 하라."라고 말했다.


8. 군현제의 실시

천하를 통일한 직후 승상 왕관 등 여러 신하들이 왕을 세워 제후국을 분봉할 것을 건의했지만 승상 이사는 오히려 분봉을 폐지하고 군현제를 시행할 것을 건의했다.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이 책봉한 자제와 동성(同姓)이 아주 많았지만 나중에 소원하게 되어 서로 공격하기를 마치 원수와 같이 했습니다. 주나라 천자도 이를 금지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온 천하가 폐하의 신령스러움에 의지해 하나로 합쳐졌으니 모두 군(郡)과 현(縣)으로 만드시고 여러 아드님들과 공신들에게는 공적인 부세(賦稅)를 취하게 하여 많은 상을 주시면 충분합니다. 이렇게 하면 쉽게 통제할 수 있어 천하에 다른 뜻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안녕을 지키는 것이며 제후를 두는 것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진시황은 이사의 의견을 받아들고 이를 군현제(郡縣制)라 불렀다. 진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중앙집권적인 군현제 국가가 된 것이다.

시황제는 승상 이사의 의견을 따라 군현제로 나라를 다스렸고,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군마다 수(행정 장관), 위(사령 장관), 감(감찰관)을 두었다. 또한, 천하의 부호 12만 호를 함양으로 이주시켜 천하 제일의 산업도시가 되어 발전하면서 그들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9. 영토확장

6국을 멸망시킨 후에도 진시황은 계속해서 영토를 확장했다. 당시 진나라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해안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강중(羌中) 일대에 이르렀다. 진시황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영토 확장 전쟁을 벌여 남북으로 영역을 크게 넓혔다.

남쪽 방면에서는 기원전 218년 대장 도휴(屠睢)와 조타(趙佗)에게 명해 50만 대군을 이끌고 남월(南越)을 정복하는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북방 출신의 진나라 병사들이 고온 다습한 광서(廣西), 광동(廣東) 및 월남 북부의 밀림 속에서 작전을 펼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지형도 익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식량 공급도 원활하지 못해 피해가 컸다. 그러나 진시황은 사록(史祿)에게 명해 광서 흥안현에 수로(水路)를 개척하게 하여 식량 수송문제를 해결한 후 병력을 증파했다. 간고한 전쟁 끝에 남쪽을 정벌할 수 있었고 정복지역에 계림(桂林)군과 상군(象郡) 등 4개 군을 설치했다.

또한 북쪽으로 흉노족을 막기 위해 백만에 달하는 병사들과 백성들을 동원해 만리장성을 수축(修築)했다. 또 함양에서 북쪽으로 산을 뚫고 계곡을 메워 700리에 달하는 직선 도로를 만들었다. 진시황은 또 장군 몽염(蒙恬)에게 명해 흉노족에 대한 작전을 전개하게 해 흉노족을 700리가량 퇴각시키고 내몽골 하투(河套) 일대를 점령했다.


10. 제도개혁과 도량형의 통일

진시황은 오행(五行)이 순환하고 반복하는 순서를 고찰해 주나라가 화(火)를 기반으로 한 반면 진 왕조는 오행 중 수(水)에 해당한다고 여겨 수를 상징하는 검은 색을 숭상했다. 때문에 진왕조의 의복은 모두 검은 색을 숭상했는데 사서에서는 이를 복색(服色)을 바꿨다고 한다. 이외에도 매년 10월 초를 일 년의 시초로 삼았는데 이를 정삭(正朔)을 고쳤다고 말한다. 수를 상징하는 수가 6이기 때문에 진시황은 수레의 폭을 6척으로 정하고 6척을 한 걸음으로 했으며 수레 한 대를 말 6마리가 끌게 했다. 이렇게 하여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수레의 규격과 형식을 하나로 통일했다. 이외에도 진시황은 문자를 통일했으며 화폐, 도량형 등을 통일하여 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려 하였고, 도로 역시 정비하여 각지의 교통체계를 강화하였다.


11. 분서갱유와 대토목공사

기원전 213년, 함양궁에서 큰 연회를 베풀었다. 그때 시황제의 나이는 46세로 절정기였다. 연회도중 박사 순우월이 봉건제와 군현제를 놓고 복야 주청신과 언쟁을 벌였다. 이 때, 순우월이 봉건제로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승상 이사는 30일 내에 진나라의 역사와 의술, 농경 등에 관한 책 이외의 모든 책들을 태워버리라 주청 올렸고, 시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실행시켰다. 이것이 바로 분서(焚書)이다.

이듬해인 기원전 212년, 시황제는 방사 후생과 노생에게 불로장생의 약을 가지고 오라 명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은 시황제를 비판하며, 도망쳐 버리자 화가 난 시황제에게 조정 안에 수상한 학자가 일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학자들은 모두 자기가 아니라며 잡아뗐으나 시황제는 이들을 모두 잡아들였으니, 그 수가 460여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구덩이에 넣고 생매장시켰으니, 이것이 바로 갱유(坑儒)이다. 그리고 이를 모두 합쳐서 분서갱유(焚書坑儒)라 불렀다. (분서갱유는 원래 단지 책을 압수하거나 학자들을 단속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한제국 성립후 유학자들이 한제국의 성립의 명분성을 위해서 확대했다는 설이 있다.) 이에 분개한 황태자 부소가 시황제에게 간언했으나, 부소는 오히려 시황제의 분노를 사 대장군 몽염이 있는 국경 근교로 유배되었다.

시황제는 북방에 흉노의 침입을 염려하여 대장군 몽염에게 서쪽으로 임도로부터 동쪽으로 요동까지 그 유명한 만리장성을 쌓도록 명했다. 이 만리장성에 동원된 인부가 150만여 명이나 되었고, 그 중에서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 하였다. 또한, 시황제는 함양 근교에 아방궁을 쌓도록 하였고, 나아가서는 70만 명의 인부를 동원, 함양 근교의 여산 전체에 자신의 능묘를 건설토록 했다. 이런 대토목공사를 하는 동안, 국가의 재정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법을 매우 엄히 하여 백성들이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게 하였으며, 한 사람이 죄에 연루되면 그 삼족을 몰살시켰고, 나아가 한 집이 법을 어기면 그 마을의 모든 가구들도 그에 똑같은 형벌을 받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관청으로 가는 길에는 항상 죄인들의 행렬이 즐비했다 전해진다.


12. 최후

시황제는 재위 기간 중 다섯 차례씩이나 전국 곳곳을 순행했는데 기원전 210년에 마지막 순행을 하였다. 여기에는 승상 이사와 중거부령인 환관 조고, 그리고 자신의 26번째 아들이자 막내아들인 호해가 자신을 뒤따랐다. 사기에 따르면 시황제는 돌아오는 도중 평원진에서 유성이 떨어졌는데 그 운석에 누군가가 '시황제사이지분(始皇帝死而地分)' 즉, 시황제가 죽고 천하가 갈라진다고 써놓았다. 이에 충격을 받은 시황제는 병으로 쓰러졌다고 한다. 또는 화가 난 시황제가 그 지역의 주민을 몰살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시황제는 사구 지방에 이르자, 병이 매우 위독해졌으며 유언장을 조고에게 쓰라 하고, 그 내용은 옥새를 적장자인 황태자 부소에게 전달케 하고, 부소에게 함양에서 자신의 장례를 주관하라 명하였다.

기원전 210년 음력 7월 22일, 진시황제 영정은 50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의 시신은 자신이 만든 지하궁전인 여산에 묻혔다. 이 능묘는 1974년 우물공사를 하면서 부장품인 병용(군사모양의 인형)과 더불어 발견되어 지금도 발굴 중이다.


13. 사후

이사와 조고, 호해는 시황제의 죽음을 숨겼으며 시황제의 시신이 있는 수레 옆에 절인 생선을 같이 운반하여 시신 썩는 냄새가 들키지 않도록 했다. 조고는 시황제의 유서를 조작, 황태자 부소와 몽염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부소는 자결하였으나 몽염은 이 명에 대해 의심을 품어 자결하지 않자 조고는 몽염을 일단 감옥에 가두었다. 얼마 뒤, 시황제의 26남 호해는 황제에 오르니 그가 진 이세황제이다. 원래 이세황제는 몽염을 살려주려고 했으나 조고의 말을 듣고는 몽염과 몽의를 반역혐의로 몰아 삼족을 멸족시켰다. 이후 이세황제는 조고에게 죽고 조고는 부소의 아들 자영에게 죽고 자영은 이후 항우에게 죽음을 당하고 진 제국은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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