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임진왜란 광해군의 분조와 의병의 활동, 명나라 군대의 참전

올드코난 2015. 3. 30.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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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서는 그와 함께 또 하나의 조정인 분조를 꾸렸는데 평양에서 왕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이 이를 이끌고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의병 봉기를 촉구하고 의병 부대를 국가의 정식 군대로 인정한다. 이는 조선이 병농일치의 군사제도를 시행하였으므로 당연한 절차다. 의병들은 곳곳에서 일본군의 보급로와 통신망을 차단하여 일본군을 곤란에 빠뜨렸다. 의병의 봉기로 민심은 차츰 제자리를 찾게 되었으며 조선 관군도 재기할 시간을 벌었다. 명(明)에서 온 원군의 활약과 조선 수군과 의병의 활동은 조선에 불리하였던 전세를 소강(小康)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임진왜란 광해군의 분조와 의병의 활동, 명나라 군대의 참전


1.광해군의 활약

의병장에게 관직을 주고 무과에 급제하고 현감 이상 관직이 있는 관리로서 대우해줬지만, 의병장을 대상으로 하는 관직 제수와 우대는 기존 무과 급제를 이용해 정식으로 장수가 된 자들과 알력을 일으키기도 했다.

광해군은 공명첩으로써 군량미를 모으고 근왕군을 모집하기도 했다.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고 활발히 활동하는 것을 전해 들은 각지 사대부와 백성은 광해군을 따르고 근왕군에 참가하려고 찾아왔다. 광해군은 근왕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확보하였으며 민심을 안정시켰다. 이에 명나라 장군들도 광해군을 극찬하였다.


2.의병들의 활동

전국 각처에서는 일본군의 침공에 대항하는 의병이 일어났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에서 일어나 청주에 주둔한 일본군과 전투하고 금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고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에서 거병하여 의령과 창녕에서 일본군과 일전을 벌이고 진주에서 김시민과 함께 일본군을 방어하였다. 고경명은 전라도 장흥에서 거병하여 은진까지 북상하였다가 금산성에서 일본군과 격전하다가 전사했으며, 김천일은 호남에서 거병하여 수원을 근거지로 일본군과 전투하고 강화도로 진을 옮겼다가 다음 해 진주에서 전사하였다. 정문부는 함경도에서 활약하여 경성과 길주를 회복하고 일본군을 몰아내어 함경도를 수복하였다. 묘향산의 중 휴정은 격문을 팔도 승려에게 보내 그 사람의 제자 유정의 내원을 얻어 승병 1700명을 이끌고 평양 탈환전에 참여해 공을 세워 도총섭에 임명되었으며, 그 사람의 제자 처영도 승병을 모집하여 전라도에서 권율의 막하로 들어가 활동하였다.


3. 명나라 군대의 참전

의주로 도망친 선조는 명나라에 계속하여 구원을 간청하였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여론이 분분하였으나 병부상서 석성의 주장으로 일본의 의도가 명 정벌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자국의 영토에까지 전쟁이 번지는 형편을 막으려면 조선에서 적을 방어해야 상책이라는 판단하여 대규모 원병을 파견한다.

명군의 1차 병력 요양부총병 조승훈은 병사 5천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했지만 패하고 명나라에서는 심유경을 평양에 파견하여 화의를 제창하게 하는 한편 1593년 음력 1월 이여송, 송응창이 이끄는 4만여 대군은 조선군과 합세하여 평양을 수복하고(4차 평양전투) 일본군은 한양으로 퇴각하였다. 명군은 처음에 파병한 3천여 명을 시작으로 종전할 무렵에는 10만여 대군을 조선에 주둔시켰다.



4.명나라 참전의 명암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명군이 전쟁의 판도를 바꾸었지만, 명나라가 개입하여 전쟁이 길어진 측면도 있다. 개전 1년 후 조선군은 오합지졸 병력 17만 5천을 운용하고 있었고 일본군은 도해 15만 중에서 승려와 의사를 위시해 전투 부대와 작전을 지원하는 非전투 요원 대부분을 포함해 7만 명 이상이 전사한 상태고 전선도 경상도 남부로 고착되었으나 전세가 불리할 때마다 일본은 강화를 요청하였고 피해나 위험 부담 없이 전쟁을 마무리하고 싶었던 명군은 조선 장수들의 공세 요구를 묵살하고 강화에 응하곤 하였다.


5. 별 활약없던 명나라 군대

평양성 탈환 후 자만심에 빠진 이여송의 명군은 벽제관 전투에서 패하여 개성으로 한때 후퇴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한양에 집결하여 마침 함경도에서 철수하는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와 연합하여 행주산성을 공격하지만, 권율이 이끄는 조선 관민에 의해 참패를 당한다. 결국 명나라 군대는 평양성 탈환 외에는 딱히 내세울 전공도 없으며, 오히려 참전을 했다는 구실로 선조와 신하들을 모욕했고, 백성들의 식량을 군량미라는 명목으로 약탈해 간다. 명군은 공헌 보다는 해악을 더 끼쳤다고 보는 것도 이때의 명나라 군대의 행태가 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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