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임진왜란 도망가기 바빴던 선조의 몽진과 백성들의 분노

올드코난 2015. 3. 3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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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발생한지 얼마되지 않아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는 제1군은 부산·밀양·대구·상주·문경 등을 거쳐 충주에 이르고 제2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인솔하여 울산·영천 등을 거쳐 충주에서 제1군과 합세해 한양으로 진군한다.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은 김해를 지나 추풍령을 넘어 북진하고 신립의 탄금대에서 대패하자. 조선 선조과 조정은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주한다.


임진왜란 도망가기 바빴던 선조의 몽진과 백성들의 분노


1.왜의 한양 입성과 도망치는 조정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조선의 왕과 백관은 여러 비상대책을 강구하였다. 신립의 패보는 한양의 인심을 극도로 동요시키고 선조는 마침내 정신(廷臣)과 더불어 한양을 떠나 개성·평양 방면으로 도망치고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함경도와 강원도에 보내어 근왕병을 모집하라고 시키고 명(明)에 사신을 지속으로 보내어 구원병을 요정한다. 


조정에서는 도원수 김명원에게 도성을 수비하라고 시켰으나 6월 11일(음력 5월 2일) 일본군 제1군과 제2군은 개전한 지 20일 만에 충주·여주·양근 등을 거쳐 한양을 점령한다. 이미 선조와 조정 대신들이 피난을 한 상태였고 여기서 왜군은 잠시 당황한다. 왜의 입장에서 왕이 도망을 가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성이 함락되면 성주는 할복하고 성에 사는 주민은 항복하여 해당 지역이 평정되는 것이 전쟁에서 기본 방식이었는데 조선은 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치고 각지에서는 백성이 저항했다.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도주하자 분노한 백성이 궁궐을 태워 버리고 노비는 자신의 문적(文籍)을 알고 있는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웠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으로 차후 정리해 본다.)


2.왜의 계속되는 북진

6월 26일(음력 5월 17일) 도원수 김명원을 임진강 전투에서 격파하고서 군을 나눠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평안도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함경도로, 각각 한반도 북부까지 진격한다. 7월 21일(음력 6월 13일) 평양이 함락되고 다급해진 선조는 의주로 피신했다.



3.의주까지 도주한 조정

한양에서 백성을 두고 도망친 선조와 백관 일행은 임진강을 건너자 일본군의 추격을 늦추려고 나루터를 방해하고 배 여러 척을 침몰시켰다. 선조와 백관 일행은 일본군이 한강 이남까지 진격해 오자 다시 도망쳤으며, 개성을 거쳐 평양에 이르러서는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이후 일본군이 개성까지 함락하고 황해도로 북진해 오자, 선조와 백관 일행은 또다시 도망치기로 마음을 굳게 정하였다. 선조는 이런 굴욕 속에서 몽진에는 성공한다.


4. 선조의 몽진에 대한 평가

이전 역사를 보면 고려의 현종, 고종, 공민왕도 외적이 침입했을 때 몽진을 했었다. 왕이 사로 잡히면 오히려 외교적으로 더 큰 문제가 초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왕의 피난은 이전에도 있었기에 조선 조정은 당연하다 여겼을지 모르지만, 일본군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조선의 백성이 왜군에 대항하는 의병의 활동이 본격화 되자 충격을 받게 되는데, 일본에서는 백성이란 단순히 거주를 이전하는 자유도 없는 영지에 부속된 농노나 전리품으로서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런 차이를 모른 채 정복한 조선에서 보급과 급료 등 비용을 충당할 예정이었으므로 일본군의 기본 계획에 큰 차질을 빚는다.

결국 선조의 몽진은 비록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행위이기는 하지만, 왜군의 전선을 길게 늘어 놓아 이후 왜군이 남쪽으로 밀리게 되는 이유가 되기는 하다.

그럼에도 전란을 제대로 수습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생존을 위한 행위였기에 당연히 비난 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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