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임진왜란 오만했던 명나라의 참패 벽제관 전투(碧蹄館 戰鬪)

올드코난 2015. 3. 29. 18:43
반응형

벽제관 전투(碧蹄館 戰鬪) 1593년 2월 27일(음력 1월 27일) 임진왜란 중 벽제관(현재의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일대)에서 일어난 명과 일본의 전투로 명나라의 참패로 끝났다. 벽제관에서 남쪽 3㎞ 지점에 있는 여석령(礪石嶺 : 일명 숫돌고개)에서 일어났으므로 여석령전투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오만했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 군대의 참패 벽제관 전투(碧蹄館 戰鬪)


1.전투전 상황

4차에 걸친 평양선전투 끝에 1593년 2월 9일(음력 1월 9일) 조명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탈환된다. 충격을 받은 일본군은 장수 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가 전선에서 무단이탈하는 등 일시적 혼란 상태에 있었다. 부교(奉行)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북부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일본 장수들을 한성(漢城)으로 모아 전력을 가다듬고 벽제관에서 반격을 시도한다.


2.양측 전력

(1)명

지휘: 이여송, 이비어, 마천총, 이유승, 조선, 추수경 (명부장), 고언백

병력: 4만 3000명

(2)왜

지휘: 우키타 히데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다치바나 무네시게,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나가오카 다다오키, 요코야마 가케요시

병력: 7만명


3.전투 상황

평안도 방면으로 진격했던 일본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 1월 이여송(李如松)이 거느린 명나라 원병과 조선 관군에 의해 평양성에서 대패하였다. 그리고 주장 고니시(小西行長) 등은 황해도로 나아간 구로다(黑田長政)의 도움을 받아 서울로 도망해 돌아왔다. 

이때 개성수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는 끝내 사수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수차에 걸친 우키다(宇喜多秀家)의 철수권유 때문에 퇴각하기는 했으나 서울 성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였다. 대신 다치바나(立花統虎)와 같이 성밖에서 명나라군과 대결할 것을 결심한다. 


당시 서울에 집결한 일본군의 총병력은 5만에 이르렀다. 함경도로 진격했던 가토(加藤淸正) 등의 약 2만의 군사만이 아직 철수하지 못하였다. 서울에 집결한 일본군은 패장 고니시와 오토모(大友吉統 : 鳳山守將)를 제외한 4만여의 장졸로 고바야가와를 선봉장으로 삼아 반격을 시도하였다. 

한편 명나라군은 평양 승전의 여세를 밀고 나와 개성에 집결, 작전회의를 끝내고 1593년(선조 26) 1월 25일 서울을 향해 출발하였다. 일본군의 주력을 격멸하고 서울을 수복하려던 것이었다. 이때 일본군은 명나라 병사를 요격하려고 북상중에 있었고 선봉은 여석령에 진을 치고 있었다.

 

명나라의 선봉장인 부총병 사대수(査大受) 등이 최초로 이 부대와 회전하였다. 그러나 전세가 불리해 벽제역까지 퇴각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여송은 혜음령(惠陰嶺)을 넘어 벽제관으로 급행, 망객현(望客峴)으로 진출하였다. 이에 양군 사이에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고바야가와가 거느린 일본군은 3대(隊)로 나누어 명나라군을 포위 공격하였다. 포병이 도착하지 않은 명나라군은 기병만으로 고전을 면하지 못했으며, 사방에서 조총의 집중사격을 받아 참패하였다. 이여송은 지휘사(指揮使) 이유승(李有昇)의 희생으로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단, 늦게 도착한 부총병 양원(楊元)이 거느린 화군(火軍)의 맹활약으로 일본군은 혜음령을 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명나라군은 일본군의 추격으로부터 탈출, 파주로 후퇴하였다가 개성으로 물러났다.

 

이 싸움에서 조선의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은 이여송이 적을 경시하고 무모하게 진격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명나라 원군의 뒤를 따라 떨어져 행동했으므로 조선군의 손실을 면할 수 있었다. 

유성룡(柳成龍) 등은 이여송에게 재공격을 주장했으나 겁을 먹고 듣지 않았다. 

이 후 함경도에 있는 가토의 군이 양덕(陽德)·맹산(孟山)을 넘어 평양을 기습한다는 근거없는 소문이 들렸다. 이에 명나라군은 부총병 왕필적(王必迪)을 개성에 머물게 하고, 조선의 제장에게도 임진강 이북에 포진할 것을 명한 다음 다시 평양으로 회군하였다. 결국 이 싸움에서의 패배로 인해 그 뒤 명나라군의 행동에는 적극성이 줄어들고 일본군을 섬멸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4.역사에 기록된 패전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를 중심으로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가 이끄는 일본군이 격돌, 일본 측의 승리로 끝났다.

명나라측 기록은 압도적인 다수인 일본군 10만 명을 패퇴시키고 무사히 후방으로 철수한 승리라고 하고 일본측 기록은 명나라군 10만 명을 격파한 승리라고 썼는데 명군의 참패였음이 드러났다.

패전한 명국은 명나라측에서는 승리를 주장하고 조선 정부에도 승리라고 보고하며 파주를 지나 개성으로 도주 하였고 조선의 관리들은 명나라측 주장을 믿어 조선왕조실록에도 승리라고 기록 하는 바람에 한동안 평양 전투와 벽제관 전투를 전쟁의 흐름을 바꾼 대표적인 명나라의 승리로 잘못 알고 있었다.

명나라가 승리를 했다고 주장하지만, 전공의 증거인 왜군의 수급이 없고 개성으로 도주하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류성룡이 언제 일본군을 다시 칠 것이냐고 묻자 "날이 개고 마르면 다시 진군하겠소"라고 답했다고 한다.


류성룡의 징비록에 의하면 본대인 보병을 후방에 두고 무리하게 기병과 지휘부만 이끌고 적진 깊숙이 이끌고 들어갔다가 대패했다고 기록한다.

기록에 따르면 명나라측은 이여송이 직접 지휘했던 정예 북방기병 3000명 중 1500명이 죽거나 다쳤고 이비어, 마천총, 이유승 등 휘하 장수 15명(혹은 용사 80여 명)이 전사해 조선에 파견된 명군 장수의 25%에 달하는 손실이 있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이여송의 심복인 이유승이 죽었다.


당시 전투에 참가했다가 이여송이 적을 얕보아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않고 진격하는 것을 보고 떨어져서 후방에서 행군한 조선군의 지휘관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은 명나라군이 패했다는 보고를 듣고 고양 방면으로 퇴각하였는데 퇴각하던 도중에 팔다리가 잘리거나 얼굴이나 눈을 다친 명나라 병사들이 대오 없이 도주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5.전투의 영향

임진왜란의 역사상 대표적인 패전으로 이 전투 이후 명나라군은 일본군과 대결을 회피하게 되고, 전쟁을 장기화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이들 명나라 군사들 때문에 당시 조선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왜군과 명국 심지어는 조선 탐관오리 때문에 전쟁이 끝나는 동안 조선 전역은 참담한 지경에 이른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