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의 행주대첩과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더불어 3대 대첩인 제1차 진주성 공방전(第1次 晋州城 攻防戰; 혹은 진주대첩(晋州大捷))에 대해서 정리해 본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제1차 진주성 전투 (진주대첩)
1.전투전
1592년 음력 6월 이후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들의 맹활약으로 기세가 꺾인 왜군은 병력을 집중하여 어떻게든지 하삼도의 관문인 경상도를 장악하려고 노력했지만 전란 이래 진주성만은 공략하지 못하였다. 진주성은 앞은 남강이 흐르고 후방 삼면은 험준한 형세로 석벽을 높이 쌓아 올린 매우 견고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남도를 장악할 본거지이자 전라도 침입의 교두보 역할을 해낼 요충지가 바로 진주성이라 간주하고서 공략을 명령했다.
2.전투 상황
1592년 11월 7일(음력 10월 4일) 왜군은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진주성을 포한다. 성내에는 진주 목사 김시민와 관군 3천8백여 명과 백성이 합세해 결전을 준비했고 성외에서는 홍의장군 곽재우가 이끄는 경상도 의병들이 왜군을 배후에서 견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왜군은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다가 주위의 민가를 모조리 불 지르고 총탄과 화살을 마구 쏘아대면서 마침내 공격을 개시했다. 왜군에 맞서 성내에 있던 조선 관군은 현자총통을 비롯한 총포와 화살로써, 백성은 돌과 뜨거운 물로써 대항한 데다가 임계영과 최경회가 이끄는 전라도 의병 2천여 명이 성외에서 왜군의 후방을 기습공격했고 홍의장군 곽재우도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왜군을 혼란에 빠뜨리고 피리를 불면서 왜군을 심리상 불안케 했다. 11월 12일(음력 10월 9일) 승리가 점차 목전에 다가오는 중 진주 목사 김시민이, 왜군이 쏜 총탄에 맞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진주성을 공격한 지 7일째인 11월 13일(음력 10월 10일) 왜군은 퇴각하고 진주성을 방어해는데 성공한다. 부상중이었던 진주목사 김시민은 11월 21일(음력 10월 18일) 39세로 사망한다.
3.전투 결과
조선군 3800명의 10배인 왜군 3만명과 싸워 조선군 1000명 사상, 왜군은 1만명이상이 사상한 대승리였다. 진주대첩은 임진왜란 전쟁에서 수성에 최초로 성공한 전투로 목사 김시민의 전술과 합심한 백성과 효율 있는 무기를 사용해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방어해 낸 전투다. 진주성 공방전 당시 왜군 전사자는 지휘관급이 3백 명, 병사가 1만 여 명에 달했다. 제1차 진주성 공방전은 왜군이 호남으로 진출하려던 계획을 좌절하게 한 전략상 중요한 승리였다.
4.사적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김시민 장군 전공비는 1619년(광해군 11년) 음력 7월에 진주성에 세워졌으며, 성여신이 비문을 짓고 한몽인이 글씨를 썼다. 진주전상각적비(晉州全成却敵碑)라고도 하고 시도유형문화재 제2호인 촉석정충단비와 나란히 서 있다. 1987년 당시 전사한 영현들을 위로코자 비 후편에 계사순의단을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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