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임진왜란 이순신 수군의 4차 출정 제해권을 장악한 부산포 해전(부산 해전)

올드코난 2015. 3. 26.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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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왜군 수군들을 격멸하기 위해 치밀하게 움직이는 4차 출정은 부산 등지에 주둔에 있던 왜의 수군들을 차례로 몰살시키 위한 출정으로 여러차례 소규모 전투가 있었고 최종적으로 부산해전으로 마무리되었다. 부산포 해전(부산 해전)(釜山浦 海戰)은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부산포에 정박한 일본군 함대를 기습하여 대파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녹도만호 정운이 전사하였고, 일본군은 100여 척의 함선을 잃었다. 이 전투 후 일본군은 더 이상 적극적인 해상 작전에 나서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순신 수군의 4차 출정 남해 제해권을 완전 장악한 부산포 해전(부산 해전)(釜山浦 海戰)


1. 전투 전 상황

왜 수군은 한산도에서 참패를 당한 7월 중순 이후 약 1개월간 남해안 일대에서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채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던 중, 8월 중순에 이르러 일본군은 한성에 주둔하고 있던 가토, 기무라, 오카모토 등의 부대를 경상도 지방으로 이동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일본군은 대부분의 병력을 김해에 집결시키는 한편, 군수 물자를 부산으로 운반하였다. 당시 부산포에서는 하시바군 주력부대와 본국에서 증원된 수군 8,000여명이 함선 430여 척을 보유하고 해안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다.

조선은 일본군의 이런 움직임을 본국으로 철수하려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경상우도순찰사 김수가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위로 침범한 적도들이 낮에는 숨고 밤에 행군하여 양산(梁山), 김해강 등지로 잇달아 내려오는데, 짐짝을 가득 실은 것으로 보아 도망치는 낌새가 현저하다." 라고 하여 해상도주통로를 차단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순신은 전라우도수군절도사(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도수군절도사(경상우수사) 원균 (8월 25일 합류)의 함대와 합류하여 판옥선 74척, 협선 92척 등 총 166척으로 통합 함대를 편성하여 출진하였다. 이순신은 부산포로 향하던 중 서평포(西平浦), 다대포(多大浦), 절영도(絶影島) 등에서 일본군 전선 24척을 격파했다.

참고: 부산해전 직전 전투

장림포 해전(長林浦海戰) 조선 수군의 4차 출정(8월 24일 ~ 9월 2일) 기간 중의 첫 번째 전투. 부산포에 주둔한 일본군을 격멸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 출정이었고 이 전투는 양산강쪽에서 치른 소규모 접전이었다. 왜선 6척이 격파되었고 30명이 도주했다.

화준구미 해전(花樽龜尾海戰) 이순신의 4차 출정 중 부산포로 접근하던 과정에서 일어난 전투로 일본 전투선 5척을 침몰시켰다. 외


2.부산해전당시 양측 전력

(1)조선

지휘관: 이순신, 원균, 이억기, 정운, 권준, 송희립, 무의공 이순신, 김완, 이영남, 어영담, 이언량

병력: 전선 170여 척(판옥선 74척, 협선 92척 등)

(2) 왜

지휘관: 와키사카 야스하루, 구키 요시타카,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 구루시마 미치후사, 시마즈 요시히로

병력: 전선 470여 척, 병력 7만 명


3.부산해전 과정

부산포 앞바다의 절영도 부근으로 진출한 조선 수군은 부산포 동쪽 산기슭 해안에 일본 수군 선단 사백여 척이 집결해 있는 가운데, 다수의 육군이 해안선에 진지를 구축하여 조선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음을 탐지하였다. 조선군은 장사진을 펼치면서 종대 대형으로 부산진 포구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조선 수군에 압도된 일본 수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 육군 병력이 방어하고 있는 해안진지에 뛰어들어 필사적인 저항을 시도하였다. 이에 조선 수군은 해안진지에서 저항하는 일본군에게 활을 쏘아 견제하는 가운데, 포구에 방치된 일본군 전함을 향해 포 사격을 했다.

양 함대의 전선수를 비교하면 약 3대 1의 비율로 조선 수군이 열세였고 지리 조건도 일본군들은 언덕을 의지하여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하여 공격하지만 조선 수군은 해상에서 완전히 노출되어 공격군에 매우 불리한 여건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이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 겁을 먹고 사기가 떨어졌다는 점이 전세를 바꾼 것이다. 왜군은 상당수 병력이 해안과 산 언덕에 숨어서 바다로 나오지 않고 조총과 활 공격을 했다. 부산해전이 왜의 패배는 결국 두려움때문인 것이다.

부산포 해안에서 적선 100여 척을 격침시키는 등 큰 전과를 올렸으나, 이순신은 육지로 일본군을 추격하지는 않았다. 근접 백병전에서 조선군의 기량이 일본군에 비해 불리했고 몇일간의 전투로 수순이 많이 지쳤고, 병력 수도 육전을 하기에는 너무 열세였다. 또 육상전에 핵심 타격력인 기병을 조선 수군은 갖지 못한데 반면, 일본군은 경험이 풍부한 기병을 보유한 것도 이유였다.


4.부산해전 결과

조선은 정운 등 6명 전사, 25명 부상, 소수 판옥선 파손 외에는 거의 피해가 없었다. 반면 왜군은 전선 128척 격침, 5000여 명 사상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아쉬운 것은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이 녹도만호 정운을 잃은 것은 큰 손실이었다. 

부산해전의 결과 왜는 재해권을 완전히 상실한다. 

부산 해전으로 일본군의 수군 활동은 잠잠해졌고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평양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그대로 평양에 주저 앉아 있다가 조명연합군에 밀린 것도 이순신에 의해 해상 보급로를 차단당한 때문이었다. 또 호남 역시 일본군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할 수가 있었다.


5. 이순신이었기에 승리했던 해전

간혹 이순신 장군의 승리를 폄하하는 무리들이 앞도적인 전력으로 이겼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순신 장군은 늘 병력의 열세였고 판옥선과 화포 그리고 전략으로 거둔 승리였다. 왜군들이 이순신을 두려워 한 것은 그의 지략이었던 것이다. 만일, 부산해전 지휘관이 이순신 장군이 아니었다면, 왜군은 적극적으로 해전에 임했을 것이다. 

이순신이 지휘를 한다는 것에 해상 전투를 두려워했고, 패전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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