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임진왜란 4차에 걸친 경주전투 의의

올드코난 2015. 3. 28.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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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1592년(선조 25) 4월∼8월 사이에 박진(朴晉)·박의장(朴毅長)·이장손(李長孫) 등이 경주에서 네 차례에 걸쳐 싸운 전투 전체를 뜻한다.


1. 1차 전투는 4월 부산포에 상륙한 가토(加藤淸正)의 2만여 왜군이 경주를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 무렵 때마침 경주부윤의 교체가 있었는데, 전임 부윤 윤인함(尹仁涵)은 후임으로 오는 변응성(邊應星)이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도주하였다. 

이에 판관 박의장(朴毅長), 장기현감(長鬐縣監) 이수일(李守一)이 군민 수 천 명을 모아 성을 지키려 했으나, 박의장도 버티지 못하고 도주해버렸다. 

이튿날 왜군은 영천을 점령하고 충주를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경주는 왜적에게 무혈점령당하고 말았다.

1차 전투는 사실상 완패였고 전투라고 할수도 없는 관군들의 도주로 끝나 버렸다.


2. 2차 전투는 몇달후 8월에 감행되었다. 

7월 의병장 권응수(權應銖)가 영천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자, 경상좌병사 박진은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병력을 권응수의 휘하에 합세시켰다. 그리고 거의 1만의 병력으로 다음 달 경주 탈환을 목적으로 권응수·박의장을 선봉으로 삼아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이 때 언양 방면에 있던 적의 기습을 받아 박진의 군사는 패주하고 말았다.


3. 3차 전투는 2차 전투에서 패한 박진이 재차 경주 탈환을 결의하고 결사대 1000여 명을 모집, 성 밑에 잠복시킨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 전투에서는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 등이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라는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공격 준비를 갖추었다. 이에 판관 박의장을 선봉으로 그 해 9월 다시 성을 공격했다. 

왜적은 비격진천뢰의 공격을 받아 수 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약 1만석 가량의 군량을 버린 채, 이튿날 울산 서생포(西生浦)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이로써 마침내 경주성은 수복되었다. 그 뒤로 왜군은 비격진천뢰를 두려워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였다.


4. 4차 전투는 다음해 1593년 8월에 있었다. 

이 때는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남도 연안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을 철수시켰던 때이므로, 경주성 방면에는 명나라의 부총병(副總兵) 왕필적(王必迪)의 군사가 수비하고 있었다.

 아군측은 경상좌병사 고언백(高彦伯), 영천조방장(永川助防將) 홍계남(洪季男)이 후원하고, 명군도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 부총병 오유충(吳惟忠) 등이 와서 도왔다.

한편, 적장 가토와 모리(毛利吉成) 등의 군사는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주 경주성 방면을 공격하다가 마침내 8월 6일 불시에 수천의 병력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이로써 쌍방 간에 많은 사상자를 내는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아군은 명군과 합세해 끝내 적군을 격퇴시켰다.


5.경주전투 의의

이 전투의 주력군은 의병이었다. 1차와 2차는 관군의 패였고, 3차전투는 의병이 주력군이었고 경주를 탈환했고, 다음해 4차 전투에서는 명군과 조선군이 합세해 왜를 몰아냄으로서 경주 지역을 방어하는 데 성공하며, 이후 정유재란까지 왜로부터 경기도를 사수하게 되는 중요한 승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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