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임진왜란, 의병과 승병이 거둔 승리 청주 전투(淸州戰鬪)

올드코난 2015. 3. 26.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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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전투(淸州戰鬪)는 임진왜란 당시 최초로 의병과 승병이 연합하여 전투를 치러 승리한 전투로 이 전투에서 청주성을 탈환했고 이후 제2차 금산 전투로 이어졌다.

임진왜란, 의병과 승병이 거둔 승리 청주 전투(淸州戰鬪)


1.전투 전 상황

당시 청주는 일본군 제3진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함락되어 충청도 방어사 이옥은 도망쳤고 이후 일본군 제5진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이 성에서 머물다가 휘하 장수 하치스카 이에마사를 남겨두고 떠났다. 한편 충청도의 의병장 조헌은 1592년 6월 30일(음력 5월 21일) 10차례에 걸쳐 유생들을 회동하여 공주와 청주 사이를 왕래하여 의병을 모집해 옥천에서 봉기했다. 조헌은 첫 싸움으로 차령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당했으나 이를 무찔렀고 이후 일본군이 청주를 장악하자 충청도 서남쪽 온양, 정산, 홍주, 회덕 등 10개 읍에서 1000명의 의병을 모집하였고 승병장 영규가 이끄는 500명의 승병들과도 합류하여 청주성을 공격하기로 했다.


2.양측 전력

(1)조선

지휘관: 조헌 의병장, 영규 승병장, 이옥 충청도 방어사, 허욱 공주 목사

병력: 의병 1000명 + 승병 500명, 총병력 1500명

(2)왜

지휘관: 하치스카 이에마사

병력: 7200명


3.전투과정

한편 도망쳤던 충청도 방어사 이옥과 공주 목사 허욱의 관군이 연기군 동쪽에 진을 치고 있다가 7월 말에 청주로 진출했고 영규 대사는 청주성에서 15리 떨어진 안심사에서 결집하여 서문 밖에 진출해 조헌의 지휘를 받았다. 그리하여 9월 6일(음력 8월 1일) 총 1500명의 의병과 승병 연합군이 청주성 서문으로 총공격을 가해 조총으로 공격하던 일본군을 물리치고 청주성을 탈환했다.


4.전투 결과

청주성 탈환 이후 조헌과 영규 대사는 뿌리 깊은 인연을 가져 이후 제2차 금산 전투에도 함께 참여해 전사했다.


5.참고 의병장 영규(靈圭, ? ~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활약한 승병장으로 본관은 밀양, 호는 기허, 속성은 박으로 충남 공주 출신. 계룡산 갑사에 출가하여 서산대사의 고제로 공주 청련암에서 수도하였고 선장으로 무예를 익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초로 승병을 일으켜 500명을 이끌고 의병장 조헌과 함께 청주 전투에서 청주성을 탈환했다. 그리고 다시 제2차 금산 전투를 벌였고 격전 끝에 싸우다 전사하였다. 금산의 칠백의총에 묻히고 종용사에 제향되었으며 법도, 대인에 의해 진락산에 영각이 세워졌으며 의선이란 편액이 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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