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임진왜란 일본의 전라도 진격을 막은 조선의 승리 이치 전투(梨峙戰鬪)

올드코난 2015. 3. 25.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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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 전투(梨峙戰鬪)는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 전라도 진산군과 고산현 경계의 이치(배고개)에서 임시 도절제사 권율(權慄)과 동복현감 황진(黃進)이 이끄는 1천여명의 조선군이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2천여명의 대군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전투로 일본의 전라도 진격작전을 궤멸시켰다. 웅치 전투 다음날 벌어졌는데, 두 전투를 하나로 연결해 봐야 한다.(이전 웅치전투 참조)

임진왜란 일본의 전라도 진격을 막은 조선관군의 승리 이치 전투(梨峙戰鬪)


1.전투 전 상황

당시 일본은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 도요토미가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명령하여 전라도의 중심인 전주성을 점령하라고 지시한다. 서울에 있던 고바야카와는 창원에 주둔하던 별군 2000 여명을 의령을 거쳐 산청-함양-남원-전주 또는 광주로 가는 길로 가게 했지만 의령에서 홍의장군 곽재우에게 정암진 전투에서 패전하여 별군은 물러나게 된다. 이에 고바야카와는 서울에서 전라도로 내려와 직접 전라도 점령을 지휘하기로 한다.


2.전투 준비

서울에서 내려온 고바야카와는 영동을 통해 무주를 거쳐 1592년 6월 23일, 금산성을 함락시키고, 제6군 군사령부를 설치했다. 이 때 전주성 점령작전에서 양동 작전을 쓰는데, 제1대는 1만 여명의 병력으로 승려 부장 안코쿠지 에케이가 지휘를 하며, 제2대는 고바야카와 자신이 직접 지휘하고, 병력은 약 2000 여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남은 1만 여명은 금산성 본대에 배치했다.

제 1대는 금산-무주-진안-전주 루트를, 제 2대는 금산-진산-전주 루트를 사용했다. 이 때 금산에서 전주로 가려면 웅치, 이치라는 두 고갯길을 넘어야 했는데 그 길이 매우 험했다. 조선군은 바로 이 두 곳을 지키기로 한다. 제 1대은 웅치를 넘어야 했는데 그곳에서는 김제 군수 정담, 의병장 황박, 나주 판관 이복남이 지키고 있었고, 제 2대는 이치를 넘어야 했는데, 이 곳은 임시 도절제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지키고 있었다. 당시 조선군의 작전은 우선 이 두 곳에서 1차 방어를 한뒤, 방어를 실패하게 되면 후퇴하여 전주성에서 모여 최후의 2차 방어를 하기로 되있었다. 또 일본군의 허를 찌르는 작전을 구사하는데 바로 북상하던 의병장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대를 금산성으로 진격하게 한 것이다. 만약 금산성이 넘어가게 된다면 일본군은 후퇴하는 진로를 잃어 앞뒤로 조선군의 공세를 받는 진퇴양난의 처지가 될 것이라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3.웅치 전투

전투는 1592년 7월 7일, 제 1대가 웅치골짜기를 에워싸며 시작되었다. 최외곽(제1전선)에는 의병장 황박, 산 중턱(제2전선)에는 나주 판관 이복남을, 그리고 마지막 저지선인 고갯마루는 정담이 지키고 있었다. 첫 날은 잘 막았으나 다음날, 7월 8일에 적의 파상공세에 제1,2전선이 무너졌다. 마지막 방어선을 지키고 있던 정담은 군사들의 후퇴 권유를 뿌리치면서까지 싸웠으나 이 날 전사하게 된다. (웅치전투 패배)이 때 살아남은 병력은 전주성으로 후퇴했다. 같은 날 8일에 이치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혈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4. 이치 전투

권율은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전투에 임했는데, 비겁한 병사가 눈에 보이면, 그 병사의 벙거지에 칼로 표시를 해두었다가 전투가 소강상태에 빠지게 되면 그 병사를 즉결처분하여 군기를 바로 세웠다. 황진은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화살을 날렸다. 이 때 황진은 적탄에 이마를 맞고 후방으로 후송된다.

그 사이에 웅치를 돌파한 제 1대는 전주성 앞까지 왔었다. 그런데 돌연히 제 1대는 방향을 바꾸더니 후퇴를 하기 시작하였다. 거의 동시에 이치의 일본군들도 후퇴를 하기 시작했다. 금산성 본대에서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군 7000 여명이 지금 금산성으로 온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조선군의 작전이 적중한 것이다.

7월 9일, 금산에 거의 접근한 고경명의 의병군은 전라도 방어사 곽영의 관군과 합류하고 금산성을 에워싼다. 마침내, 7월 10일,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군은 1만의 일본군이 지키는 금산성을 공격했다. 또 이 날, 위기에 처한 금산성을 구하기 위해 제 6군 소속 병력 1500 여명이 전라도로 가다가 경상도 거창의 우석현에 매복해 있던 의병장 김면에 의해 막혀 전라도 진입을 실패한다.

우선 고경명이 기병 100 여기를 이끌고 서문을 공격했는데 성안에 있던 일본군이 갑자기 성문을 열고 돌격해 허술해 보이던 관군을 집중공격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곽영이 도망치고 관군이 무너지자, 의병군을 공격해 궤멸시킨다. 이 전투로 고경명과 둘째 아들 고인후가 전사하고 장남 고종후가 가까스로 살아서 아버지와 동생의 시신을 수습하고 후퇴한다.(훗날 고종후는 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끝까지 전투에 임하다 전사한다.)


5. 전투 결과

조선군은 전라도 방어에 성공을 하고 반면 일본의 전라도 점령에 실패를 하게 되는데, 이후 북쪽에서 평양성이 탈환되면서 일본군은 점차 패색이 짙게 된다. 그리고 이날 같이 벌어진 바다에서의 한산대첩은 임진왜란 향방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6. 권율이 자랑했던 이치 전투

참고로, 권율은 행주대첩보다 이치 전투를 더 자랑했는데, 사위 이항복 <백사집> 잡기에 수록된 권율의 말을 정리해 본다. 

세상에서는 내가 행주에서 한 일을 공으로 삼는데, 이는 참으로 공이라 이를 만하다. 그러나 나는 항오(行伍) 사이로부터 일어나서 공을 쌓은 것이 여기에 이르는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을 적잖이 치렀다. 그 중에 전라도(全羅道) 웅치(熊峙)에서의 전공(戰功)이 가장 컸고 행주의 전공은 그 다음이다. 그런데 나는 끝내 행주의 전공으로 드러났으니, 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대체로 웅치의 싸움은 변란이 처음 일어날 때에 있었으므로, 적(賊)의 기세는 한창 정예하였고, 우리 군사는 단약(單弱)한데다 또 건장한 군졸도 없어서 군정(軍情)이 흉흉하여 믿고 의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도 능히 죽을 힘을 다하여 혈전(血戰)을 벌여서 천 명도 채 안 되는 단약한 군졸로 열 배나 많은 사나운 적군을 막아 내어 끝까지 호남(湖南)을 보존시켜 국가의 근본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어려웠던 이유이다. 그러나 이 때에는 서로(西路)가 꽉 막히어 소식이 통하지 않았고, 본도(本道)가 패하여 흩어져서 사람들이 대부분 도망쳐 숨어 버렸으므로, 내가 비록 공은 있었으나 포장(褒獎)해 줄 사람이 없어 조정에서 그 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다. 그러니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없는 깜깜한 밤에 자기들끼리 서로 격살(擊殺)한 것과 같았으므로, 공이 드러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행주의 싸움은 내가 공을 세운 뒤에 있었으므로, 권위(權位)가 이미 중해져서 사심(士心)이 귀부(歸附)하였고, 호남의 정병(精兵)과 맹장(猛將)이 모두 휘하에 소속되어 군사가 수천 명을 넘었고 지리(地利) 또한 험고하였으며, 적의 숫자는 비록 웅치에서보다는 많았으나 그 기세가 이미 쇠해졌으니, 이것이 공을 세우기가 쉬웠던 이유이다. 게다가 마침 천병(天兵)이 나와서 주둔하고 우리 나라 제로(諸路)의 근왕병(勤王兵)들이 바둑알처럼 기전(畿甸)에 포치(布置)되었을 때, 강화(江華)로 피란 가 있던 도성(都城)의 사민(士民)들이 우리의 승전(勝戰)을 학수고대하던 터에 나의 승전이 마침 다른 여러 진영(陣營)보다 먼저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공이 쉽게 드러날 수 있었던 까닭이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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