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임진왜란 같은날 전라도에서 승리한 안골포 해전, 우척현 전투

올드코난 2015. 3. 26.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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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8월 16일(음력 7월 10일)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치러진 전투가 안골포 해전과 우척현 전투다. 이 전투 모두 승리로 장식을 하면서 7월 10일은 조선군 승리의 날이 되는데.

임진왜란 같은날 전라도 땅과 바다에서 승리를 거둔 안골포 해전, 우척현 전투, 전라도를 지켜낸 의병과 조선 수군.


[안골포해전]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은 1592년(선조 25년) 8월 16일(음력 7월 10일) 조선 수군이 경남 진해에 있는 안골포에서 왜군을 격멸한 해전이다.


1.전투 과정

이틀 전인 7월 8일에 한산도에서 왜군을 섬멸한 조선 수군은 안골포에도 왜군이 있다는 정보를 받고 곧장 이동한다. 왜의 수군은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 도도 다카도라가 지휘하는 42척의 함대였다.

7월 10일 새벽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을 공격했다. 이순신 장군은 학익진(鶴翼陣)을 펴 먼저 공격하고, 경상우수사 원균은 그 뒤를 따랐으며,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포구 바깥에 예비대로 대기하였다.

조선 수군은 여러 번 왜선을 포구 밖으로 유인하려 했지만 응하지 않았고 조선 수군은 작전계획을 변경해 번갈아 포구에 침입하여 왜선을 공격하였다. 이에 왜군이 맞서 싸우자 이억기의 함대도 참가하여 전투가 벌어졌다. 하루 동안 계속된 싸움에서 왜군 250명이 사살되고 나머지 왜병들은 뭍으로 도망쳤다. 모든 화력을 왜군 기함인 층각선에 집중. 지리적으로는 불리한 여건이었으나 작전 지휘의 승리였다.

한산도에서 대패한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이들과 함께 한산도에서 조선 수군과 싸워야 했으나, 와키자카는 이들을 무시하고 단독으로 출병했다가 자신도 패하고, 이들도 패하게 만든 것이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조선수군과 제대로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하였다.


2.전투결과

조선측 피해는 전선은 모두 무사했고, 전사 19명 부상 114명이었던 반면 왜군은 42척 모두 침몰했고, 전사자는 대략 3960면인 대승이었다. 한산도와 안골포에서 연이어 패한 왜군은 부산으로 움츠려들어 호남 진출을 포기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보급에 문제가 생긴 고니시 유키나가도 평양에 주저앉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우척현 전투]

우척현 전투(牛脊峴戰鬪)는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 제6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정암진 전투, 웅치 전투, 이치 전투에 이어 4번째로 거창을 통해 전라도를 침략하려다가 김면(金沔)과 정인홍(鄭仁弘) 등의 의병들과 싸워 크게 패한 전투이다.


1.배경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로 침입하려는 일본군 장수들 중 제6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만이 조선 군민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전라도 진격 작전이 실패하고 있었고 정암진 전투의 첫 패전 이후 총공세를 감행했으나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 본대가 이치 전투에서 권율(權慄)에게 패해했고 부하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도 웅치 전투에서 조선군을 격파하기는 했지만 막대한 피해만 입고 철수했다. 결국 고바야카와는 8월 15일(음력 7월 9일) 경상도 김천에 주둔하던 1500명의 별군을 이끌고 경상도 거창을 거쳐 전라도 장수로 진격하기로 결정한다.


2.전투과정

8월 16일(음력 7월 10일) 일본군은 거창 북쪽 우척현에 당도했고 우척현에 조선군이 없자 우척현 고개를 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척현 고개에는 음력 5월 10일 정인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김면의 의병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면은 곽준(郭遵), 문위, 윤경남, 박정번, 유중룡, 조종도(趙宗道) 등의 휘하 장수들을 두고 거창에서 군량을 모아 4~5일간 집안의 종 700명을 포함한 총 2000명의 의병들을 모집하고 김성일(金誠一)이 보내준 만호 황응남, 판관 이형 등의 관군과도 합류해 전투 준비를 했다. 일본군 선봉대가 고갯마루를 넘자 일제히 3면에서 활을 쏴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일본군이 크게 당황하고 결국 그 동안 의병들이 계속 활을 쏴 일본군 대열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후퇴하던 일본군을 의병들이 추격하자 일본군은 시체도 남겨두고 철수하고 말았다. 


3.전투 결과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마지막 전라도 진격은 완전히 실패했고 더 이상 전라도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사실상 이 전투로 조선은 전라도 지역 방어에 성공을 거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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