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임진왜란 강화 회담

올드코난 2015. 3. 30.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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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제2차 당항포 해전, 장문포 해전 그리고 강화 회담과 소강상태.


1.제2차 당항포 해전

이순신장군의 12번째 해전으로 1594년 4월 23일(음력 3월 4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아군 연합함대 124척을 출전시키고 부하 어영담을 시켜 당항포의 왜군들을 치게 했다. 새벽에 함선 20척을 거제도 견내량으로 보내 수비하도록 하고 동시에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에서 20척, 전라우수영에서 11척을 선발해 공격 함대를 선발했다. 어영담이 지휘한 함대는 창원시 진동면 진동리 진해선창에 정박하던 왜선 10척을 협공하여 창원시 진동면 고현리 읍전포에서 6척을, 고성군 회화면 어신리 어선포에서 2척을, 나머지 2척은 고성군 동해면 양촌리 법동마을 아자음포에서 격침시켰다 이순신과 전라우수영 이억기는 나머지 함대 73척을 이끌고 학익진을 펼쳐 시위를 하고 공격하여 왜군은 결국 무너져 어영담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당항만 안으로 들어가 남은 왜선 21척을 불태워지고 패잔병들은 모두 도망쳤다. 왜선 31척을 모두 격침했고 일본군은 승선을 하지도 못하고 육지에 주둔하고있었다.


2. 장문포 해전

장문포 해전(長門浦海戰)은 이순신의 23전 23승 해전중 19번째 해전이다. 제2차 당항포 해전 이후 일본군은 장문포 일대를 중심으로 장기전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11월 4일 도원수 권율의 명령에 의해 조선군은 이순신 장군의 수군을 비롯 곽재우, 김덕령 등의 의병과 함께 견내량에서 합세해 11월 11일 거북선(귀선)을 비롯 판옥선50여척의 함선으로 장문포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한다. 하지만 이순신을 두려워한 일본군은 성을 방어만 할 뿐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이에 조선군은 군사 수백을 동원하여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적을 혼란에 빠뜨렸다.

11월 17일 다시 장문포를 공격했으나, 일본군은 명나라와의 화친을 논의 중이니 싸울 수 없다는 팻말을 꽂은 채 도주하고 말았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11월 18일 수륙군을 해체하고 다음 날 한산도 통제영으로 돌아왔다.

장문포 해전의 원래 목적은 거제도 북단을 봉쇄하여 고립된 일본군을 섬멸하는 것이었으나, 적의 도주로 그들의 해상 출현을 막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3.강화 회담

전쟁중인 상황에서 명나라는 심유경을 한양의 일본군 본진에 다시 보내어 화의를 계속 추진하였고 일본군도 보급 문제로 말미암은 전황 불리, 명군의 진주, 악역(惡疫)이 유행한 탓에 화의에 응해 1593년(선조 26년) 음력 4월에 전군을 남하시켜 서생포에서 웅천(雄川 : 지금의 창원)에 이르는 사이에 성을 쌓고 화의 진행을 기다린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 기간에 남쪽에서는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함락하지 못한 진주성을 공격하여 조선군과 9일간 치열하게 전투한 끝에 의병장 김천일·경상우병사 최경회·충청병사 황진 등을 전사시키고 성을 함락하였으나 일본군도 피해(被害)가 커서 전라도로 진격하지 못하였다. (제2차 진주성 전투) 2차 진주성 전투 이후 이순신은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若無湖南 是無國家(만약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전라도를 지켜냈기에 강화 회담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1593년 음력 8월 명나라는 일본군과 휴전협상을 제의했다. 양국은 3년에 걸쳐 지루하게 휴전하는 협상하는 과정에서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협상하는 과정에서 포로가 된 조선의 두 왕자는 돌려 보내 준다. 


협상은 명과 왜 위주로 진행이 되었는데 조선 왕과 신료들은 삼국 중에서 가장 많이 피해를 보았기에 화의를 반대하자 교섭에서 제외되었다.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 조정은 군사제도를 개편하고 의병 부대를 관군으로 편입시키는 등 방비를 강화해 나아갔다.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철군하여 왜성을 축조하고 전투를 중단한 채 주둔하고 있었다. 

명(明)과 일본군 양측은 서로 자국이 유리한 처지에서 화의를 교섭하려고 하였다. 

교섭중 일본 주력군은 일본으로 돌아가고 약 6만명의 대군은 그대로 조선에 주둔한다. 명나라도 1만 6천 명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은 돌아가고, 1594년 8월경에는 명의 군사 대부분이 귀국하고 일본은 약 3만8천명의 병력을 남기고 철수한다. 그리고 3년에 걸친 지루한 화의 교섭은 결국 결렬고 정유재란이 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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