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임진왜란 의병장 임진사충신 제봉 고경명

올드코난 2015. 4. 5.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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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의병장들중에 고경명, 김천일, 조헌, 곽재우 등을 임진사충신으로 불린다. 곽재우에 이어 고경명에 대해 설명해 본다.


1.출생과 가계

고경명(髙敬命, 1533년 ~ 1592년)은 1533년 광주 압보천에서 대사간 고맹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 본관은 장흥(長興),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2.명종시대 관료 생활

1552년(명종 7년) 진사시와 생원시에 동시 입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558년(명종 13년) 식년시 문과에 갑과 1위로 장원급제하고, 성균관전적에 임명되고, 이어 공조좌랑이 되었다. 형조좌랑·사간원정언 등을 거쳐 호당(湖堂)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61년 사간원헌납이 된 뒤 사헌부지평, 홍문관의 부수찬·부교리를 거쳐 1563년 교리가 되었다. 1563년(명종 18년) 인순왕후의 외숙인 이조판서 이량의 전횡을 논할 때 교리(校理)로서 이에 참여하여 이량을 공격하였지만 장인 김백균이 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에 무슨 일인지 좌죄되어 울산 군수가 되고만다. 그해 11월 사헌부는 고경명을 이렇게 탄핵한다.

“울산 군수 고경명(어려서부터 재주가 있다는 이름이 있더니 일찍 외과(巍科)에 올랐으나 부박하고 허황되고 교만하고 협기(俠氣)가 있었다. 그 아비 고맹영, 장인 김백균과 함께 이양을 섬겨 청현직(淸顯職)을 얻었다.)은 앞서 간인들을 제거하던 날에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대의(大議)에 참여하였으니 의당 조심하여 누설하지 않았어야 할 터인데 마음씀이 반복 무상(反覆無狀)하여 장인 김백균에게 은밀히 편지를 보내어(언문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으니 더욱 간사하다.) 이양에게 전하도록 하였으니 지극히 간휼(奸譎)합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관작을 보존하고 있으므로 물정이 분개하고 있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명종은 사헌부의 탄핵을 승인하고 고경명은 곧 파직된다.


3.선조시대 복권

1571년(선조 4년) 선조가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서용하려 하였으나 사림파 언관들의 맹렬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1581년(선조 14년) 동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복직, 그해에 영암 군수로 재등용되고 이어 종계 변무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훈구파의 자제라는 비방에도 불구하고 율곡 이이가 그의 능력을 인정해주어 발탁함으로써 관직에 머무를 수 있었다. 1582년 서산군수로 전임 되었는데, 명사원접사(明使遠接使)에 임명된 이이의 천거로 그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며, 이어서 종부시첨정에 임명되었다. 1583년 한성부서윤·한산군수를 거쳐 예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84년 사복시첨정이 된 뒤 성균관사예를 거쳐 순창군수로 재직 중 1588년 파직되었다. 1590년 승문원판교로 다시 등용되었다.


4.임진왜란과 최후

1591년 동래 부사로 있다가 서인이 제거될 때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이듬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가 의주로 피난갔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전라도 광주와 장흥 등에서 모집한 6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임금을 지키러 의주로 가던 중 금산에 집결하고 있던 왜군과 싸우다가 아들 인후와 같이 전사하였다.(1차 금산전투)


5.사후

1603년(선조 36)에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고 1618년(광해군 10)에 영의정으로 가증되었다. 1628년(인조 6) 인조는 충렬(忠烈)이라 시호를 내리고 광주에 사당을 세우게 하여 ‘포충(褒忠)’이라 사액하였다. 나주의 정렬사(旌烈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 태인의 남고서원(南皐書院), 임실의 학정서원(鶴亭書院)에도 제향되었으며, 서산에서는 고경명을 비롯한 서산의 다섯 인물을 기리기 위한 오현각이 1913년 부성산성 내에 건립되었다. 묘소는 화순의 흑토평(黑土坪)에 조성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1) 3월에 장성부(長城府) 오동촌(梧桐村) 오좌원(현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로 이장하였다.



6.저서

시, 글씨, 그림에 뛰어났는데 저서로는 『제봉집(霽峰集)』이 있고 동일 책의 속집(續集)과 유집(遺集)도 전하며 자신의 고향 부근인 광주 무등산을 유람한 기행록인 「서석록(瑞石錄)」과 의병 모집을 위해 각처에 보낸 격문을 모은 「정기록(正氣錄)」등이 있다.


7. 서산 5현

고경명(高敬命)은 1582년(선조 15) 서산군수로 부임해 목민관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서산에 왔던 수령 중 최고의 선정(善政) 수령으로, 서산 5현으로 추대되었다. 학문 발전과 후학 양성에 전력하고 『호산록(湖山錄)』 발행을 권유하는 등 서산의 사족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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