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임진왜란 위대한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 (郭再祐) 생애 평가

올드코난 2015. 3. 31.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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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1552년 8월 28일 ~ 1617년 4월 10일)는 임진왜란 당시 크게 활양한 의병장으로 초야에 묻혀살다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군이 일본군에게 전멸 당하자 고향인 경남 의령에서 스스로 의병을 조직, 붉은 비단으로 된 갑옷을 입고 활동하여 천강홍의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용맹성에 놀란 왜병들은 곽재우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했다. 임신사충신 곽재우의 생애를 정리해 본다.

임진왜란 의병장이며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는  훌륭한 인물이며 위인이었다. (곽재우의 생애와 평가)


1.출생과 가계

곽재우는 1552년 8월 28일 경상도 의령(宜寧) 유곡면 세간리에서 태어났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을 지내고 사후 증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된 곽지번(郭之藩)의 손자이고, 수(守)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곽월(郭越)과 진주강씨의 셋째 아들이다. 친형제로 곽재희(郭再禧), 곽재록(郭再錄)과 누이 1명, 계모 허씨에게서는 이복동생 곽재지(郭再祉), 곽재기(郭再祺)와 이복 누이 1명이 있다.

선조는 송나라 출신 곽경(郭鏡, 1117 - 1179)으로 송나라 팔학사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동래한 귀화인다. 곽경은 1138년 고려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평장사를 역임하고 포산군(苞山君)에 봉군되었다. 5대조 곽안방(郭安邦)은 조선 세조 대에 해남현감(海南縣監), 익산군수(益山郡守)를 지내고 1467년(세조 12년)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원종공신에 녹훈되었으고 세조대의 청백리였다. 고조부 곽승화(郭承華)는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었으나 진사였고, 할아버지 곽지번이 성균관사성에 올라 다시 가세를 일으켰다.



2.성장과정

곽재우는 일찍이 생모 진주 강씨를 여의고 아버지 곽월은 허씨와 재혼했다. 어려서 영남의 유학자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했고 후에 조식의 외손녀 사위가 되었다. 함께 동문수학한 김우옹 역시 스승 조식의 외손녀사위가 됨으로써 동서간이 되었다. 그 뒤 상경하여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했는데, 그의 재주를 눈여겨보던 조식은 자신의 문도들과, 외조카 이준민(李俊民)이 한성부에 다녀오면 반드시 그의 소식을 묻곤 했다.

그 뒤 진사시에 응시했지만 진사시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1585년(선조 18년) 과거를 보아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으나, 지은 글이 선조의 비위를 거스른 까닭에 급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합격이 취소되어 낙방되고 만다.

그 뒤 정계에 진출할 뜻을 포기하고 40세가 넘도록 학문 연구와 농사를 지으며 고향에서 은거한다. 조식의 문하생들이 대부분 김효원이 한때 조식의 문하에 있었던 인연으로 동인(東人)에 가담하면서 그도 동인의 당인이 되었다가 동인이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분당될 때는 북인의 당원이 되었다. 그러나 동인과 북인 내부의 내분을 못 마땅히 여기던 곽재우는 이산해 등 다른 북인 당원들을 피하거나 일부러 멀리한다. 곽재우는 고향 현풍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근검절약했는데,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재물을 늘려 재산이 몇 만 금이나 되었다. 그러자 시골 사람들이 그가 비루하고 인색하다고 의심하였으나, 곽재우는 태연스레 지내면서 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계모 김해허씨가 창녕군 화왕산성에서 병으로 사망하자 잠시 울진으로 가 있기도 했다.


3. 임진왜란 발발 및 의병 조직

1592년(선조 25년) 음력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연이은 관군의 패배와 선조의 의주(義州)로 피난 소식이 날아오자, 몇일후 음력 4월 22일 사재를 털어 고향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붉은 옷으로 철릭을 해 입고, 이불에 "천강 홍의 장군"(天降 紅衣 將軍)이라 적어 깃발을 만들었다. (홍의장군의 별칭은 사실상 그가 만든 것이다) 곽재우는 의병 2천 명을 이끌고 의령·창녕(昌寧) 등지의 산악에 매복하고 있다가 일본군을 물리치고 일본군의 호남 진격을 저지하였고, 일본 보급선을 기습하여 보급을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김시민의 진주성 싸움에 원군을 보내 승리로 이끄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홍의장군(천강 홍의 장군)의 이름이 알려주게 된다.

1592년 5월 함안군을 함락, 점령하고 정암진(鼎巖津, 솥바위나루) 도하 작전을 전개하는 왜군과 교전, 대승을 거두었다. 곽재우는 기습과 매복으로 왜군을 무찌르면서 당시 계속 패배하던 관군에게 절망했던 백성들에게 희망이 된다.


4. 정암진 전투

곽재우하면 가장 유명한 전투가 정암진 전투로 왜군이 부산에서 진주를 거쳐 호남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왜군은 정암진 나루에 도착했는데 곽재우는 이때 정암진 언덕에 병사들을 매복시킨 뒤 날랜 병사 몇명을 선발해 남강을 건너는 왜군을 늪지대로 유인한 다음 화살공격으로 전멸시킨 사실상 의병이 거둔 첫 승리 전투다.

왜군 정찰대는 정암진 일대가 늪지이기 때문에 부대의 통행이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그들이 통과할 수 있는 지점 근처에 나무 표시 등 표식을 만들었다. 곽재우는 왜군 정찰대의 행동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가 밤에 표지목을 늪지로 옮겨 꽂고, 표식들을 늪지로 향하게 바꾸어 놓았다. 다음날 왜군이 잘못 표시된 표지목과 표식들을 따라가다 늪지에 빠지자 곽재우는 언덕에 숨어있던 병사들에게 공격령을 내려, 기습 공격을 가해 왜군을 몰살시켰다. 여기에서 2만 명의 일본군이 정암진 늪에 빠져 사망하게 한 대 승리였다.


5. 휴전 (강화 협상) 당시

곽재우의 승전보에 관군들 중에는 그를 시기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왜적을 피해 달아났던 감찰사 김수와의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에 누명을 쓰고 체포, 구금되었다가 초유사(招諭使)로 부임한 김성일(金誠一)이 사정을 알고는 김성일의 특별 건의로 석방된 후, 조선 정부에서는 이러한 그의 의병 활동의 공을 높이 사 같은 해 음력 7월에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에 임명되었다가 비변사의 추천으로 5품직에 제수되어 바로 형조정랑이 되었다.

1592년 음력 10월에는 당상관으로 승진, 절충장군(折衝將軍) 겸 조방장(助防將)으로 승진하였고, 10월말에는 무관 품계에서 문관 품계인 통정대부(정3품)로 변경, 임명하였다.

1593년(선조 26년) 음력 4월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임명되고, 음력 12월에는 다시 성주목사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1593년말 조정의 명을 전달받고 삼가(三嘉), 의령(宜寧), 단성(丹城), 고령(高靈) 및 낙동강 일대를 방어하고 무너지거나 파괴된 성곽을 보수, 수리하였다. 성주목사로 재직 중 삼가의 악견산성 등 성지 수축에 열중하다가 그해 12월말 진주목사에 임명, 전근되었다. 곧 경상우도조방장을 겸임되었고, 1595년 초 진주목사로 부임하였으나 일시 휴전으로 임진왜란이 종식되자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로 돌아와 다시 은둔 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루머가 확산되면서 모함을 받고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체포당하기도 했으나 죄가 없음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그러나 곽재우와 절친한 사이인 의병장 김덕령은 끝내 이몽학의 난과 관련된 누명을 벗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곽재우는 스스로 사퇴하였는데, 이 일로 곽재우는 사실상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전쟁중에는 꾸준히 서신을 작성, 조정에 장계로 보내 전황을 보고하기도 했다.


6. 정유재란 참전

1597년(선조 30년)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회담이 파행으로 결렬되고 일본과의 전쟁이 재발할 위험성이 커지자 조선 정부의 부름으로 다시 벼슬길로 나아가 경상좌도 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에 임명되었다. 경상좌도방어사 곽재우는 현풍의 석문산성을 신축하였으나, 산성이 완공되기도 전에 왜군이 근처까지 침입하여 8월에 창녕의 화왕산성으로 옮겨 성을 수비하였다.

그해 음력 8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마을에서 일본군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어 사촌형 곽재겸 등과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쌓고 성곽을 수비하였고, 창녕에서부터 현풍, 달성 일대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1597년 전쟁 중 계모 김해허씨가 사망하였으므로 성을 나와 장의를 마친 뒤, 벼슬을 버리고 울진으로 가서 3년상을 입었다. 상중에 전란은 종결되었고, 전란이 끝난 뒤에는 그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특별 승진하였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경상좌병사로 부임 직후 왜군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그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군사들을 고향에 되돌려 보내고 생업과 농사일에 종사하게 해줄 것을 왕에게 제안하였다. 그러나, 왕이 거절하자 그는 벼슬을 내놓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어부 생활을 하였다.


7. 기발했던 곽재우의 전략

(1) 왜군 군선의 예상 경로를 예측해 해로에 통나무를 띄워 적의 물자 보급을 막았다.

(2) 왜군이 늪지대를 건너기 위해 안전한 곳마다 깃발을 꽂아 군사들이 그 곳으로 지나게 하려는 계획을 알아채고 깃발을 늪지대에 꽂아 늪에 빠지게 한 뒤 활로 쏘아 죽였다

(3) 다른 병사들에게도 붉은 옷을 입혀 교란 전술을 썼다.

(4) 보물이 들어있을 것 같은 황금 상자에 벌을 담은 후 길가에다 버려 놓았는데, 이를 보물 상자로 착각한 왜군이 열었다가 벌에 쏘여 죽기도 했다.

(5) 이정표를 바꿔 적을 혼란에 빠트리는 등의 기묘한 전술을 사용했다.

이같은 전술을 보면 곽재우는 임기웅변에 강하고 무엇보다 추진력이 강한 인물이었다.


8.전쟁 이후

1599년(선조 30년) 다시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지만 계모의 상중이라 사퇴하였다. 동년 9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지만 같은 이유로 1개월간 지체하다 10월에 부임한다. 다음해 1600년(선조 33년) 2월 일본과 화친을 할 것을 건의했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추국당한다.

동년 봄, 병을 이유로 사직상소를 올리고 귀향하지만 사헌부 등으로부터 함부로 사퇴하였다는 이유와 전해 부임을 지체한 점 등을 구실로 탄핵을 받아 전라남도 영암으로 유배된다. 1602년 유배된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해 고향이 돌아와 현풍 비슬산에 들어가 곡식을 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 영산현 남쪽 창녕 창암진 솥바위나루 낙동강변에 정자를 짓고 망우정이라는 현판을 걸고 시문 등으로 소일하였다. 그러나 선조로부터 다시 거듭 출사 요청을 받고 거절할 수 없어 1604년(선조 37년) 초 찰리사가 되었다. 찰리사로 재직 중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 수축과 개보수를 건의하였다. 이어 그해 5월 선산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찰리사직에서 사직하였다. 곧 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04년 8월 행(行) 인동 현감(仁同縣監)으로 나갔다가 10월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에 제수되고, 11월 승자(陞者)하여 가선대부 용양위상호군에 제수되었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한성부우윤을 지냈다. 1605년 2월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된 뒤 동년 3월 한성부우윤이 되고, 5월 전라도병마절도사로 나갔다.

1607년(선조 40년) 3월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해말 사헌부로부터 음식을 끊고 도술과 수련에 전념한다는 점을 이유로 여러번 탄핵을 당하였으나 선조는 듣지 않았다.


9.광해군 시기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경상좌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부임했다가 다시 행용양위부호군으로 돌아왔고, 1609년(광해군 1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해 광해군은 그를 경상우도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여 불렀으나 선조와 광해군, 북인 정권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던 그는 모두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610년(광해군 2년) 광해군은 여러번 망우정으로 사람을 보내 관직에 출사할 것을 간청하여 결국 그해 한성으로 상경, 오위도총부의 부총관, 행호분위부호군, 호분위대호군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등을 지냈다. 이어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자 바로 함경도관찰사에 임명하여 부임하였다.

함경도관찰사 임기가 만료된 1612년(광해군 4년)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자 병을 칭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조정에서 인목대비 폐모론과 영창대군(永昌大君)에 대한 사형 건의가 나타나자 그는 인륜이 무너졌다고 분개하였다. 1613년(광해군 5년) 4월 다시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받지 않았다. 대북 계열에 의해 영창대군에 대한 탄핵이 있자, 1613년 6월 사직 상소와 함께 영창대군에게 죄가 없다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했다. 이후, 여러 차례 경상도 병마절도사, 수군통제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거나 사퇴하였다. 1616년(광해군 8년) 창암강사에서 은거 중 장례원판결사를 제수받았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10.최후

그 후로도 동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한성부좌윤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패랭이 장사를 하거나 솔잎을 먹으며 살았다고 전한다. 또한 동문수학하였던 정인홍 등과도 생각이 달랐으므로 그들은 이를 꺼렸다. 수군통제사 이순신과 죄없는 김덕령이 죽은 일 등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은둔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근심을 잊고 살겠다’는 뜻의 망우(忘憂)를 취해 자신의 호를 ‘망우당(忘憂堂)’이라고 하고 주로 그곳에서 지내다 1617년(광해군 9년) 4월 10일 망우정에서 갑자기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향년 66세였다. 그가 사망하자 갑자기 회오리가 그의 집을 덮쳤다는 설, 신선이 되었다는 설 등이 나돌았다.



11.사후

1617년(광해군 9년) 4월 28일 광해군의 명으로 장례비와 장례물품이 조정에서 지급되었고 바로 예관을 파견하여 장사를 지냈으며, 예조좌랑 유약(柳瀹)을 파견하여 장례식을 주관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지역 유림들의 공의로 그를 추마히기 위하여 의령 가태동에 충현사라는 사당을 세웠으며, 광해군 때 그의 사당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숙종은 그의 공적을 높이 사, 1709년(숙종 35년) 증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하고, 다시 충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으며, 곽재우를 주인공으로 한 곽재우전이라는 군담 소설이 있으나 작자나 연대는 알 수가 없다. 곽재우의 유품들은 보물 제671호로 지정되었다. 곽재우는 글씨도 잘 썼는데 필체가 웅건하고 굵었으며, 시문에도 능했다.


12.올드코난의 곽재우 평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위대한 의병장이었다. 그의 의병은 순수했으며, 그 어떤 댓가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는 전 재산을 털어 그의 인생 후반은 가난했음이 역사에도 남아 있다. 조정에서 벼슬을 주어도 거절한 훌륭한 인품을 가진 인물이었다.

더구나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도 선조의 비위를 거슬려 낙방후 관직 진출을 단념한 상황에서도 어떤 불만과 사심 없이 의병을 조직한 점은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큰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라 생각해 본다.

단지, 의병으로 큰 업적을 남겼음에도 인생 후반 쓸쓸히 살아간 그를 보면 아직도 매국노들이 큰 소리치는 대한민국의 현 상황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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