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 기요마사(일본어: 加藤清正 かとうきよまさ, 1562년 7월 25일~1611년 8월 2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가신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외가 쪽으로 6촌의 친척 조카. 다른 6명의 무사들과 더불어 '시즈가타케(賤ケ岳)의 일곱 자루 창[七本槍]'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나카무라(中村) 출생으로 아명(兒名)은 가토 도라노스케(加藤虎之助)이다. 임진왜란 때 선봉장을 맡은 장수였고 일본으로 패퇴하고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가신이 되어 구마모토(熊本)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글출처: 위키백과)
임진왜란 당시 잔혹했던 왜의 장수, 경상도 민요 쾌지나 칭칭나네 유래, 호랑이 사냥꾼으로 잘못 알려진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인물 평가
1.전쟁전
가토 기요마사는 永禄(えいろく, 戦国 시대, 正親町天皇 조의 연호, 弘治 4년 2월 28일 연호를 바꿔, 永禄 13년 4월 23일 元亀로 다시 연호를 바꿨다) 5년인 1562년 6월 24일(음력) 도공이었던 아버지 加藤清忠와 대장장이 사무라이의 딸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6촌 여동생 이토(伊都) 사이에서 오와리 국 아이치 군 나카무라 (尾張国愛知郡中村: 현재 나고야시 나카무라 구 (名古屋市中村区))에서 태어났다. 가토 기요마사의 모친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6촌 여동생이었다. 3살 때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어린 시절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가신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밑으로 들어가 많은 전투에 참가해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웠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시즈가타케의 7자루 창' 중 한 명으로서 적장을 죽인 공을 인정받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3,000석 영지를 하사받는다.
1585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관백(関白)이 되자 주요 신하로 기용되고서 규슈 정벌에서 공을 세웠다. 1587년에는 규슈의 히고(肥後) 남부 지역을 관할하는 25만 석 다이묘로 임명되었다. 가토 기요마사가 애용했던 무기는 가타가마야리(片鎌槍,가지극)이고 일생 자신의 상징으로서 길다란 모양의 특이한 투구를 애용했다.
2.임진왜란(일본에서는 文禄・慶長の役)
1592년 임진왜란 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제2군 장수로서 휘하에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사가라 요리후사(相良頼房)를 이끌고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조선을 침략하였다. 조선의 동북측 함경도로 진격로를 선택하여 북진하였고 전쟁 초반 조선의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생포한 가토 기요마사는 점령지인 함경도에서 호랑이 사냥을 자주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가토 기요마사를 호랑이 가토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후 고니시 유키나가와 반목하고 명군과 조선 의병과 조선 관군의 강력한 반격에 밀려 전황이 날이 갈수록 왜군에게 불리해져 남으로 후퇴하여 서생포 인근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1593년에는 서생포왜성을 완성하고 중요 거점으로 삼았다. 사신으로 온 사명대사와 회담을 할때 "당신의 목이 조선 제일의 보배다" 라는 말을 듣고 크게 웃기도 하였으며 이후 사명과 강화회담을 주로 진행하였다.
1596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귀환을 명령받고 왜로 돌아간다.
3.정유재란
1596년 지진이 났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도운 공이 인정되어 1597년 정유재란 때 제1군 사령관으로 왜선 150여 척을 이끌고 조선을 재침략한다. 전라도 지역을 주로 공격한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성 전투에서 농성하였으나 명과 조선 연합군에게 포위당하여 식량과 식수 부족으로 병사 대다수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전하였다. 1598년이 되자 서생포왜성이 명의 제독 마귀에 의해 함락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조선에서 패전한 모든 병력을 왜로 철수하였다.
4.최후
도요토미 히데요시 죽음 후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이시다 미쓰나리의 가택을 습격하였으나 살해에는 실패하였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인 동군에 가담하여 승리하고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와 혼인하고 도쿠가와 아에야쓰의 가신으로서 여생을 보냈다. 161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화친을 알선하고 돌아오던 중 병이 나 1611년 6월 24일 구마모토에서 죽었다. 향년 50세.
도요토미 가에 충성하면서도 도쿠가 아에야쓰와의 권력 앞에 자기 가문을 보존하려 애쓴 이중성 태도로 말미암아 일설에 의거하면 도쿠가와 이에야쓰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을 중재하려고 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평소 도요토미 가문을 멸문하게 하려고 계획한 이에야스의 미움을 사 독살되었다고도 한다.
5.가토 기요마사 일화
(1)호랑이 사냥꾼
가토가 호랑이 사냥을 즐겼다는 것은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구로다 나가 마사(黒田長政)와 그 신하의 일화이지만 후에 가토가 직접 잡았다고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호랑이 사냥은 가토가 명령을 내렸다고 보이는데, 이는 히데요시의 불임치료에 호랑이 고기가 좋다는 이유 때문이다. 기요마사가 갖다준 호랑이 고기 덕분인지 히데요시는 늦은 나이에 히데요리를 얻는다.
(2) 쾌지나 칭칭나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통일신보’에서 경상도 민요 쾌지나 칭칭나네가 가토 기요마사의 성명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는데, 임진왜란 당시 철수하는 왜군을 보고 사람들이 쾌재라 청정이 나가네'라고 한 환호에서 변형되었다고 하며, 임동권이 지은 『한국민요집1』>에서도 진주 지방에서 가토 기요마사를 철수하게끔 하는 내용을 담은 쾌지나 칭칭나네 수록본이 있다.
하지만, 강강수월래'의 어원과 마찬가지로 전연 믿을 수 없는 말이고, 농악에서 쓰이는 꽹과리 소리의 의성음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는 지적도 있다.
(3) 구마모토 성
임진왜란 후 구마모토 번 초대 영주가 된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 삼대 명성으로서 유명한 구마모토 성을 1607년 축성했다. 울산왜성 전투에서의 일을 교훈 삼아 성내에 우물을 120개가 넘게 만들고 다다미도 식용이 가능한 고구마 줄기를 재료로 사용하여 제작했고 마당에는 감자와 고구마를 잔뜩 심었다. 이 구마모토 성을 중심으로 마을을 정비하고 치산, 치수, 산업을 장려하여 현재 구마모토 시의 기초가 되었다.
5.올드코난 생각
한국에서는 치를 떨게 만든 인물이지만, 일본에서는 당연히 우호적이다. 가토가 일본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무장으로서 보다는 축성과 치수 사업 덕분인데, 이는 울산성 전투에서 받은 식량과 식수 부족으로 겪었던 참혹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지, 가토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치수 사업에 매진한 것은 아니다.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가 끝났다고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열기까지 완전히 내분이 종식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 시대 상황에서 가토가 전쟁을 대비해 치수에 큰 공을 들였던 것이다. 단지, 결과적으로 가토의 이런 치수 사업이 이후 지역 주민에게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불순한 이유였지만, 결과는 좋았던 것.
그리고, 사람됨으로 봤을 때, 그의 라이벌이었던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 보다 더 잔인하고 교활한 성품으로 보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친척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붙었다. 고니시 가문이 멸문했지만, 가토 가문은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가토의 실재 모습은 호랑이이 아니라 하이에나 같은 인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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