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조선의 마지막 명재상 정조의 조력자 채제공 (蔡濟恭)

올드코난 2015. 3. 16.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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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蔡濟恭, 1720년 ~ 1799년) 영조 후반과 정조대의 남인의 영수로 정조의 최측근 인사 중의 한사람이며, 정약용, 이가환 등의 정치적 후견자였다. 강박과 오광운의 문인이며 사도세자를 가르친 스승이자 세자궁의 측근신하의 한 사람이었다. 사도세자의 사후에는 세손(정조)의 측근이었다. 정조 즉위 후 남인의 영수로 중용되어 요직을 역임하였다. 제도의 개선과 개정에 관심을 가졌고, 1781년 서명응(徐命膺)과 함께 ≪국조보감≫을 편찬하였으며, 가톨릭교에 대하여 온건 정책을 폈다. 1790년에는 영의정직의 공석으로 단독으로 국정을 보좌하기도 했다.


조선의 5대 명재상 다섯번째, 마지막 명재상 정조의 조력자 채제공(蔡濟恭)


1.출생 및 가계

1720년 지중추부사 채응일의 아들로 충청남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효종 때 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낸 호주 채유후(蔡裕後)의 종5대손이고, 채팽윤은 그의 종조부였다.

본관은 평강,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번옹(樊翁),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아버지를 따라 한성부로 이주, 종로방 돈의동에 살았으며 학문은 오광운·강박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정범조(丁範祖), 이헌경(李獻慶), 안정복(安鼎福), 신광수(申光洙), 정재원(丁載遠), 신후담(愼後聃) 등과 만나 이들과 오래도록 교유하였다. 1735년(영조 11년) 15세에 향시에 급제하였다.

강박과 오광운 등에게 수학하였으나 이황(李滉), 조식(曺植), 정구(鄭逑), 허목(許穆), 이서우(李瑞雨), 이익(李瀷)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적통으로 여겨 경기감사로 재직 중에 이익을 찾아가서 사사하기도 했다. 실제 이황-정구-허목-이서우-이익으로 남인 정파와 학파의 정통으로 규정했고, 허적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윤휴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판적이고 부정적으로 보았다.


2.사도세자의 후견인

채제공은 사도세자의 스승이기도 했다. 1755년(영조 31년)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나자 문사랑(問事郎)으로 활약하였고, 그 공로로 승정원 동부승지가 제수되었다. 이때 노론이 그를 공격하였으나 사도세자가 그를 비호해 주었다. 1758년(영조 34년)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되었는데 이 해에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어 세자폐위의 비망기가 내려지자, 목숨을 걸고 이를 극력 막아 철회시켰다. 이 사건으로 후일 영조는 채제공을 지적하여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정조에게 말하였다 전한다.

1762년(영조 38년) 모친상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그해 윤 5월 사도세자가 폐위되고 바로 사사되었다. 채제공은 모친 3년상을 마치고 다시 조정으로 복귀한다.


3. 세손(정조)의 스승 및 보호자

1770년 영조 46년 병조판서, 예조판서 영조 47년에는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있으면서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다음해 1772년 세손우빈객(世孫右賓客)이 되어 세손(정조)의 교육과 보호를 담당한다. 이에 겸하여 공시당상(貢市堂上), 지경연사, 홍문관제학이 되고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한편으로 노론가 출신 궁료인 홍국영, 노론의 원칙주의자이자 세손을 정통으로 보던 세손의 사부 김종수 등과는 견해가 달라서 적대시하면서도 세손 정조의 보호를 위해 긴밀히 협력하였다. 세손(뒤의 정조)과의 관계는 이때 깊어졌다.

1774년(영조 50년) 평안도관찰사, 1775년 평안도관찰사에 재임하면서 서얼 허통을 비판·반대하며 서류통청(庶類通淸)은 국법의 문제가 아니므로 풍속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의 상소를 올렸다가 출퇴근길에 서얼 출신자에게 비난과 구타당하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병조판서와 영조의 깊은 신임으로 내의원제조를 지내며 영조의 병간호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정조가 왕세손으로 대리청정한 뒤에는 호조판서와 좌참찬으로 활약했다. 이때 세손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는 홍인한과 정후겸 그리고 세손의 즉위에 소극적이던 홍봉한 등을 세손의 즉위를 방해하는 역적들이라며 공박, 규탄하였다.



4.정조의 즉위후

1776년(정조 즉위년) 3월에 영조가 죽자 국장도감 제조에 임명되어 행장·시장·어제·어필의 편찬작업에 참여하였고, 국장사무를 주관하다가 곧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이어 형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로 당시의 영의정 김상로(金尙魯), 홍계희 등 사도세자를 모해했던 세력의 옥사와 사망한 자들의 추주(追誅)를 처결하였고, 그 공로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가자되었다. 정조의 즉위 직후 사도세자의 복권을 주장했으나 김종수의 반대로 제지되었다. 김종수는 개인적인 슬픔은 개인적인 슬픔으로 하고 군주는 만인의 어버이가 되어야 한다며 그의 사도세자 명예회복 주장을 반박했다. 정조 즉위 초 한때 그의 문하에 출입했던 영남 유생 이도현이 사도세자의 복권을 주장했다가 사형당하기도 했다. 이 뒤로 사도세자 복권 계획은 뒤로 미루게 된다. 정조 즉위 직후 홍국영과 함께 도성의 호위를 담당하였다. 이해 가을 홍계희의 8촌 동생 홍계능 등이 호위군관(扈衛軍官)과 공모하여 갑사와 자객들을 매수하여 대궐로 들여보내 정조를 살해하려는 사건이 일어나자, 궁성을 지키는 수궁대장에 임명되었다. 정조특명으로 사노비(寺奴婢)의 폐를 교정하는 절목을 마련함으로써 정1품에 이르렀다. 정조 원년과 정조 2년에도 한성부 판윤을 지냈다.

이후 규장각제학, 예문관제학, 한성판윤, 강화유수를 역임하였고, 1778년(정조 2년)에는 청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 겸 진주정사(謝恩使兼陳奏正使)로 베이징에 다녀왔는데, 이때 소북 출신의 박제가(朴齊家), 남인계 서얼 이덕무(李德懋), 유득공 등 서류로서 학식이 있던 이들을 동반했다.

1779년(정조 3년) 정조의 노론측 측근이었다가 외척, 권세가로 변한 홍국영(洪國榮)과의 마찰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가, 이듬해 홍국영이 실각하자 다시 예조판서에 등용되었으나, 1781년 소론계 서명선(徐命善) 정권이 집권하면서 서명선과 노론 김종수 등으로부터 홍국영과의 친분, 사도세자에 대한 신원의 과격한 주장, 정조 원년에 역적으로 처단된 인물들과의 연관하여 그들과 동일한 흉언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집중공격을 받았다. 홍국영과의 관계는 정조를 지키기 위해 당색을 초월한 관계였으며 친하지 않음을 해명하였지만, 서명선과 소론, 김종수 등의 공격은 계속됐고 결국 벼슬을 버리고 서울근교 명덕산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1786년(정조 10년) 평안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삭직되었다가 이듬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788년(정조 12년) 우의정이 되었고 이때 황극을 세울 것, 당론을 없앨 것, 의리를 밝힐 것,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백성의 어려움을 근심할 것, 권력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의 6조를 진언하였다.

1790년(정조 14년) 좌의정이 되었는데 영의정과 우의정이 없는 독상체제가 3년간 지속되며 독상(獨相)으로서 행정수반이 되었고, 정사를 좌우했다. 이 시기에 이조전랑의 자대제(自代制) 및 당하관 통청권의 폐지, 신해통공책 등을 실시했다. 1790년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남인 계열인 동시에 신서파의 영수로서 공서파와 대립하여 천주교 신봉의 묵인을 주장했으며, 이듬해 육의전 외에 시전의 금난전권을 박탈하는 '신해통공' 을 실시했으나 진산사건(珍山事件)이 터지자 서학 신봉자(신서파)를 옹호한다는 이유로 공서파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1792년 좌의정으로 복직했다.

1793년(정조 17년)에는 영의정이 되었다. 전일의 영남만인소에서와 같이 사도세자를 위한 단호한 토역을 주장하여, 이후 노론계의 집요한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로 여러 차례 파직과 유배 등의 처벌을 받았으나 정조의 신임으로 바로 복직하였다.


5. 은퇴 및 최후

화성유수가 되어 정약용과 함께 수원화성의 축조를 담당하다가 1798년(정조22년)에 이르러 사직하였다. 정조는 그의 사직서를 여러번 반려하며 의자와 궤장을 하사하며 말렸으나 덕망높은 인사에게 넘긴다는 뜻을 강조하였다. 정조는 판중추부사로 임명하고 국가원로의 자격으로 정사를 보필할 것을 부탁했다. 1799년(정조 23년) 1월 18일 판중추부사로 재직 중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3월 26일에 남인계 사림장(士林葬)으로 장례가 거행되었고, 묘는 경기도 용인에 안장되었다.

순조 때 유태좌(柳台佐)가 청양(靑陽)에 사당 영각(影閣)을 세웠고, 1965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에 홍가신(洪可臣), 허목과 체제공을 모시는 도강영당(道江影堂)이 세워졌다. 채제공은 평생 성리학을 정학으로 보고 천주교에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다. 그러나 노론은 그를 남인 신서파들의 곧 천주교를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의 수괴로 지목, 1801년(순조 1년)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나서 반국가단체로 몰린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면서 삭탈관직이 되었다가 1823년 영남만인소로 관작이 회복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6. 업적

육의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한 신해통공을 주동했다. 이는 조선 상업 발전 사상 큰 계기를 이뤘다. 상업활동이 국가재정에 필요함을 인식하였으나 전통적인 농업 우선 정책을 지켰다. 그는 자신이 사는 시기를 경장이 필요한 시기로 인식했으나 제도의 개혁보다는 운영의 개선을 강조했다. 따라서 중간수탈과 부가세를 없애고 간리들의 폐를 제거함으로써 국가재정의 충실을 기하고자 했다. 재정문제에 도움을 준다는 의미에서 만부후시의 복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7.사상과 학문

이황과 정구, 허목, 이서우, 이익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남인계의 정통으로 보았다. 또한, 학문의 적통(嫡統)은 동방의 주자인 이황(李滉)에게 시작하여 정구(鄭逑)와 허목을 거쳐 이익(李瀷)으로 이어진다고 하면서 정통 성리학의 견해를 유지하였다. 따라서 탁남과 허적 등은 지나치게 시류에 영합했으며 혼탁했고 선명성이 떨어진다며 비판하였다. 한편 성호 이익 등이 적극적으로 언급하기를 꺼리던 윤휴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는 허목을 정통으로 간주하였다.

성리학을 정학이라고 보았고 양명학, 불교, 도교, 민간신앙을 모두 이단이자 사이비로 규정하여 비판했으며, 서학(천주교)에 대해서도 그것이 임금과 부모도 몰라보는 비문화적, 비윤리적, 비합리적, 비인간적인 사상이라며 규탄하였다. 그러나 이들 사상도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측면에서 선용할 수 있다면 포용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서학이 무부무군(無父無君)한 논리이고 그 내세관이 불교와 비슷하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사후세계를 핑계로 백성들을 현혹하는 사상이라고 하였다. 채제공은 서학은 이적(異跡)이 비합리적인 미신의 일종이라 주장했다. 그는 안정복, 신후담의 이론을 계승하여 남인 공서파의 맥을 잇는 인물이기도 했다.

다만 천주교를 불교의 일종으로 보는 견해를 세웠다. 천주교(西學)에 대해서도 패륜과 신이적 요소를 지닌 불교의 별파로서, 이적(夷狄)인 청나라 문화의 말단적인 영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서학을 믿는 자에 대하여 역적으로 다스리라는 요구를 당론이라 배척하고, 정조의 뜻을 받들어 척사(斥邪)를 내세우면서도 교화우선원칙을 적용하려 하였다. 서학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맹목적인 강경책 보다는 교화와 형위(刑威)·주륙(誅戮) 중에서 교화를 우선시했다. 교화를 통해서 올바른 길, 정학(성리학)으로 되돌아올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게 그의 지론이었다. 따라서 그가 재상에 있는 동안에는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확대되지 않았다.


8. 개혁과 정치관

채제공은 자신이 살던 시대를 혼탁하고 부패한 시대이며 경장기라고 주장했다. 당색을 초월해 율곡 이이의 경장론을 긍정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부 남인들은 승려 이이(잠시 스님이 된 적이 있어 생전에도 이이를 승려라 비판했었다.)의 사설에 동조한다며 그에게 불만을 품기도 했다.

채제공은 자신이 사는 시기를 경장이 필요한 시기로 인식했으나 일단 제도의 개혁보다는 운영의 개선과 백성들의 교화를 강조했다. 우선 백성들의 삶의 질을 개선해야 된다고 보았다. 중간수탈과 부가세를 없애고 탐관오리와 간리(奸吏)들을 수시로 단속하여 탐관오리 수령과 간리 아전들의 폐해를 제거함으로써 국가재정의 충실을 기하고자 했다. 그는 중간수탈제거, 부가세 폐단의 제거들을 추진하고 간리(奸吏)의 작폐를 없앰으로써 국가재정 부족을 타개하는 것을 급선무로 보았다. 또한 재정문제에 도움을 준다는 의미에서 화폐 이용을 적극 장려할 것과, 돈에 대한 지나친 비난은 삼가하고 돈이 백성의 삶에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할 것과, 만부후시(灣府後市)의 복설(復設)을 주장하기도 했다.

상업활동이 국가재정에 필요함을 인식하였으나 전통적인 농업우선정책을 지켰다.

적서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이 때문에 서얼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는 사족(士族)우위의 신분질서와 적서(嫡庶)의 구별을 엄격한 의리로서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일부 서얼들 중 실력있는 자들은 자신의 수행길에 종사케 하기도 하였다.

당파에 대해서는 당쟁을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이권다툼이라는 성호 이익의 비판을 계승, 당쟁이 나라를 좀먹는 것이며, 오로지 개인과 자기 파벌만의 일신영달과 부귀를 누리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귀들의 사익추구에 기인하는 것이라 보고 붕당의 결과로 나타나는 세경(世卿)의 폐를 지적했다.


9.평가

정조 시절 채제공은 가장 든든한 조력자로 여겨진다. 정조시대 노론을 견제하며 정치적으로 개혁에 큰 이바지를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성리학적인 자세로 정치에 임한 것은 그의 한계였다. 분명 채제공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적인 노력을 많이 했음에도, 성리학이라는 틀에 갇혀 서자들에 대한 차별과 조선의 계급사회를 유지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좀 더 열린 사고를 가졌다면, 더 큰 업적을 남겼을 수도 있었지만, 그 시대의 안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점이 아쉽다.

개인적으로 조선 5대 명재상에서 조금은 약함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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