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평생 민생을 위해 살다간 정승 김육 (관사유감 저자)

올드코난 2015. 3. 16. 20:27
반응형

조선의 명재상 네 번째, 평생 민생을 위해 살다간 정승, 관사유감 저자 김육


1.생애 요약

김육(金堉, 1580년 ~ 1658년 9월)

판관 김비의 손자이자 강릉참봉 김흥우의 아들로 한성부 서부 마포면(麻浦面) 마포리(麻浦里) 외가에서 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초호는 회정당(晦靜堂), 시호는 문정(文貞),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고손자. 현종비 명성왕후의 친정 할아버지이며 김석주, 김석연의 할아버지, 청풍부원군 김우명, 증 청릉부원군 김좌명의 아버지이다. 정조의 장인 청은부원군 김시묵은 김육의 5대손이다. 조호익, 성혼, 윤두수, 윤근수,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김상헌의 문인이 되었다. 경기도 출신.

인조 반정 직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갔다가 그 뒤 과거에 급제하여 음성현감,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했다. 그 뒤 충청감사 재직 중 충청도 지역에서 시범으로 대동법을 실시하게 했으며, 호서대동법이 실시될 때 호조 판서로서 실무를 지휘한 이시방과 함께 대동법 시행의 주역으로 꼽힌다. 병조참판, 형조판서,의정부우참찬,사헌부대사헌,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년) 성절사로서 명나라의 연경에 다녀왔는데, 그는 조선에서 명나라에 보내는 마지막 공식 사신이었다. 1638년(인조 16) 충청도 관찰사에 재직 중 대동법을 제창 건의하였고, 수차(水車)를 만들어 보급하였으며, 전후복구 사업을 시도하였고, 《구황촬요》(救荒撮要)와 《벽온방》 등을 증보·재간행하였다. 1643년과 1645년 청나라에 사절로 다녀온 뒤 화폐의 주조·유통을 건의하여 평안도부터 추진하였고, 수레의 제조, 보급을 확산시켰으며, 시헌력(時憲曆)의 제정·시행을 건의하고, 《유원총보(類苑叢寶)》 《종덕신편(種德新編)》 등을 저술하였다.

1657년 7월에 효종에게 바치면서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한국 최초의 태양력인 시헌력을 도입하여 양력 사용을 보급시키기도 했다. 1651년부터 1654년, 1655년부터 1658년까지 두 번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하였다.

효종·현종 연간에 대동법의 시행을 주장, 추진하였으며 화폐의 보급에 힘썼다.

당색으로는 서인이었지만 학통으로는 이황의 학통을 일부 계승하였다. 1594년(선조 27) 일찍이 조호익(曺好益)에게 배우고, 우계 성혼(成渾)의 문인이 되어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또한 윤근수와 윤두수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다. 동인이었던 첫 스승 조호익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고, 다른 스승들인 윤근수와 윤두수는 비록 당색으로는 서인이었지만 그들 역시 퇴계 이황의 문인들이었다. 그는 학문적으로 성혼 등의 성리학적 전통을 후대의 실학으로 넘기는 과도기적 위치로, 서인 성리학과 중상주의 실학과 북학파를 잇는 중간고리 역할을 수행하였다.


2.주요 업적

1) 대동법 건의

대동법은 이원익이나 조익 등의 건의로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에 경기도에서 시험 실시되었으며 인조 원년인 1623년에는 강원도에 확대 실시되었다. 대동법은 이처럼 점차 확대 실시되어 성과를 거두고 있었으나 그 실시 과정에서 양반 지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딛쳤다.

인조 때인 1636년 그는 대동법을 다시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묵살당했다. 김육은 충청도 관찰사로 있던 인조 16년인 1638년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자고 주장했다. 양란으로 곤궁에 빠진 국가 재정과 농민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정책으로 대동법 시행을 건의한 것이다. 그러나 김육의 이 주장은 조정에 파란을 몰고 왔다.

김육은 대동법을 실시해야 할 가장 큰 이유로 농촌 경제의 붕괴, 곧 농민 생활의 파탄을 들었다. 그는 유망 농민이 전국에 걸쳐 있다고 말했다. 이들을 자기 고향에서 쫓아낸 근본 원인이 과중한 세금 과세라는 것이 김육의 생각이었다. 김육은 과중한 세금 과세를 지양하고 과세 과정의 부정을 없앨 수 있는 근본 대책으로 대동법 시행을 주장한 것이다.

인조 때 특진관(特進官)이었던 최명길은 "요즈음 들으니 서울과 지방 사람들이 대동법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 법을 시행하려면 반드시 변통이 필요할 것입니다."라면서 대동법을 반대했다. 즉 모든 사람들이 대동법을 반대하므로 이 법을 반대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김육이 "한성과 지방 사람들 중에 대동법을 불편하게 여기는 자는 방납 모리배 뿐입니다."라고 반박했다. 실재 대동법을 불편하게 여기는 자는 양반 지주와 방납업자들 뿐이었다.

대동법을 충청도에 확대 실시하자는 김육의 소차는 정국에 파란을 일으켰다. 조정 여론이 찬반 양론으로 나뉘었던 것이다. 조정 내에서 김육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소수였다. 좌의정 조익(趙翼)과 연양군 이시백 형제 정도가 찬성했고, 이조판서 김집, 호조판서 이기조, 호군 정세규, 사헌부집의 송시열] 등 대부분의 관료들은 이에 격렬히 반대하였다.

서인은 공신들의 파벌인 낙당과 김장생, 김집, 안방준 직계인 산당 외에 김육의 대동법을 지지하는 한당이라는 새로운 파벌이 나타나게 되었다. 낙당이 몰락할 때 한당의 일부 역시 함께 몰락했지만 그의 손녀가 세자빈(현종비)이 되면서 한당은 현종 때 가면 정파로서의 생명력은 지리멸렬해지지만 외척 세력으로 재편성되기에 이른다. 대동법 시행에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걸다시피 했던 김육은 이 때문에 반대파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김육을 공격하는 데 선두에 선 인물은 이조판서 김집이었다. 김집은 그의 아버지 김장생의 학통을 이어받은, 율곡 이이의 직계 학맥으로서 송시열, 송준길, 유계 등 많은 문인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김집이 이조판서에 제수되자 송시열, 송준길 등 자신의 제자들을 출사시켰는데 이들은 김육을 공격하는 돌격대 역할을 하였다. 송시열은 김육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의정 김육이 (사실상) 정국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이조판서 김집의 시대인 것처럼 말하는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효종 8년의 허적의 지적처럼 대동법 시행을 찬성하는 관료들은 김육과 이시백 형제 정도였다. 따라서 나머지 관료들은 대부분 이 법의 시행을 반대했다. 김집, 송시열, 김상헌, 송준길, 김경여(金慶餘) 등 대동법 반대파들의 공격이 얼마나 심했으면 지평 김시진(金始進)이 경연 자리에서 효종에게 이를 지적했다.

“송준길, 송시열 등이 우의정 김육을 공격하는 것이 너무 과격합니다. 우상 또한 사대부인데 어쩌다 일이 이지경까지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라며 김육을 적극 변호하였다. 이 논쟁은 서인을 분당시키는 데까지 이르렀다. 대동법 시행에 찬성한 김육을 중심으로 소수당인 한당과 이를 반대하는 김집, 송시열을 중심으로 다수당인 산당으로 분당되었던 것이다. 대동법 시행에 반대한 산당은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이 모두 연산, 회덕 등 산림 속 사람들이므로 산당이라 하였던 것이고, 대동법 시행에 찬성한 한당은 김육, 신면(申冕) 등이 한강 이북에 살았으므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김육은 1649년 11월 다시 왕에게 대동법을 확대 실시할 것을 거듭 주청한다. 여기에는 농촌 생활의 안정 뿐만 아니라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지금 만약 대동법을 시행하게 되면 전라, 충청 양도의 전결(田結) 27만 결에 따른 목면 5천4백 동과 쌀 8만5천 석이 수입되게 되므로 경제 관리가 이를 잘 처리하면 쌀과 포의 잉여가 많아질 것입니다.”라고 하여 대동법 시행이 국가 재정의 확충에도 도움이 됨을 역설했다. 이어 우의정을 사퇴하고 영중추부사로 전직하였다. 그 뒤 다시 영중추원부사로 진향사가 되어 다시 청나라에 파견되어 다녀왔다.

2) 공납의 폐단 개혁 노력

1639년 충청감사로 있을 때 공납의 폐단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공납으로 바칠 꿀 한말(斗蜜)의 값은 목면(木綿) 3필인데 인정(人情[12])은 4필이며, 양 한마리의 값은 표준이 목면 30필인데 인정은 34필이라고들 합니다.”

그가 말한 인정, 사람들의 뜻이란 방납업자들의 수수료로서, 방납업자와 관료가 짜고 나누어 먹는 농민들의 피땀이자 고혈이었다. 김육은 중간에 방납업자들이 떼어가는 것, 관료들이 착복하는 것의 예를 들어 진상품 방납을 없애고 일원화된 세금 조달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상주하였다. 거듭된 전란으로 민생은 피폐해졌는데 방납업자들이 토호나 관료들과 짜고 무거운 세금을 요구하고, 착복한다며 이를 시정할 것을 상주하였다. 이어 그는 면세 내지는 감세를 주장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피폐해진 민생을 구제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세금 조달이 어려움을 상주하였다.

이후 그는 공납의 폐단을 없애는데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걸기도 했다

3) 시헌력 (태양력) 사용

1646년 청나라에 사은사가 파견될 때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북경에 다녀왔으며, 이때 베이징에 당도한 서양인 과학자들과 만나 교류하면서 시헌력 사용법을 배워왔다. 시헌력은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한 양력 달력이었는데, 그는 이를 확인하고자 직접 해의 변화를 관측한 자료를 입수하기도 했다. 귀국 후 시헌력의 사용을 적극 건의하면서 직접 달의 변화와 해와 날의 길이를 통해 기후를 예측하고 시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을 주장했으며, 기후의 변화를 미리 예측하여 농업에도 보탬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중국의 명대에 와서 마테오 리치와 아담 샬과 같은 선교사들에 의해서 서양의 천문학이 중국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때 유입된 서양 천문학은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천문학이 아니라 주로 티코 브라헤의 관측치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당시에 사용한 천문수치는 티코 브라헤의 관측치를 케플러가 편찬한 루돌프 표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 서양 선교사들과 주로 서광계의 노력으로 중국에서는 ‘숭정역서(崇禎曆書)’가 만들어지게 된다. 하지만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이 역서를 공포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고 대신 명을 멸망시킨 청조가 이 역법을 ‘서양신법역서(西洋新法曆書)’라는 이름으로 공포했다. 우리나라 조선 효종 때 김육의 건의로 시행한 역법인 시헌력(時憲曆)은 바로 이것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문물을 모두 의심하던 인조는 소현세자를 의심했듯 그 역시 의심하였으나, 그는 시헌력의 사용을 적극 건의하였고, 산림 측에서도 별다른 반발이 없어 조선조정은 1653년부터 시헌력을 시행하게 된다.


3. 죽음

1658년(효종 9) 서필원(徐必遠)을 전라감사로 추천, 그를 통해 전라도 연해읍에 대동법을 시행하게 한다. 그는 죽기 직전 왕에게 올린 글에서조차 호남의 대동법 시행을 강조하였다. 그의 생전에 충청도에서 대동법이 시행되었고, 호남의 해안 연안의 군읍으로도 확대되었다. 이후 그의 유지를 이은 전라감사 서필원(徐必遠)의 노력으로 대동법은 그의 사후 전라도 각지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영의정직을 사직하고 다시 영돈령부사로 물러났다. 1655년 말 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효종은 특별히 어의와 유명 의사를 보내 그를 진료하게 하였으나 잠곡은 그해 9월 한성부 회현방 자택에서 별세한다. 그는 임종에 임하여서도 효종에게 선정을 펼치고 민생을 구제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신의 병이 날로 더욱 깊어지기만 하니 실날 같은 목숨이 얼마나 버티다가 끊어질런지요? 아마도 다시는 전하의 얼굴을 뵙지 못할까 생각되므로 궁궐을 바라보며 비오듯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왕의 학문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은 마음을 간직하고 정신을 하나로 모아 밖으로 치달리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전하께서 종전부터 학문을 강마하시면서 과연 이 도리를 잃지 않으셨습니까? 악정자 춘(樂正子春)은 한낱 필부였습니다만, 한 발자국을 뗄 때에도 부모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오늘날 다치신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악정자 춘에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송 효종(宋孝宗)에게 철장(鐵杖)과 목마(木馬)가 뜻을 가다듬어 원수를 갚는 데 무슨 도움이 되었습니까. 주희(朱熹)와 같은 때에 살면서도 주희로 하여금 수십 일도 조정에 있게 하지 못하였으니 정말 애석한 일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오늘날 심학(心學)에 힘을 써야 하실 것은 다만 위 무공(衛武公)의 억계시(抑戒詩)를 완미하고 탐색하시는 것입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백성을 보호하면서 왕 노릇을 하면 막을 수가 없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백성이 편안하여 삶을 즐겁게 누리면 어찌 군사가 없는 것을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흩어져 사방으로 가려 하는데 승호(陞戶)하는 일이 또 이때에 생겨 대신들이 다투어 간했지만 되지 않았으니 이 무슨 일입니까. 전하께서 후회하셔야 할 것입니다. 비록 열 번 명령을 바꾼다 하더라도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 나라의 근본을 기르는 일은 오늘의 급선무인데, 찬선을 맡길 사람은 송시열과 송준길보다 나은 자가 없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시종 공경스러운 예로 맞아 지성으로 대우하여 멀리하려는 마음이 없게 하소서.

호남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서필원(徐必遠)을 추천하여 맡겼는데, 이는 신이 만일 갑자기 죽게 되면 하루 아침에 돕는 자가 없어 일이 중도에서 폐지되고 말까 염려되어서입니다. 그가 사은하고 떠날 때 전하께서는 힘쓰도록 격려하여 보내시어 신이 뜻한 대로 마치도록 하소서. 신이 아뢰고 싶은 것은 이뿐만이 아닙니다만, 병이 위급하고 정신이 어지러워 대략 만분의 일만 들어 말씀드렸습니다. 황송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김육은 후손들에게도 활자 주조업을 계승할 것을 유지로 남겼고 이는 아들 김좌명과 손자 김석주에게로 계승된다. 그의 부음 소식을 접한 효종은 탄식하며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하여 김육과 같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가 사망하자 효종은 슬퍼하여 5일간 조회를 파하고 그를 애도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78세였다.


4. 사후

사후 경기도 양주군 금촌리에 장사지냈다. 후에 문정(文貞)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 뒤 김육의 아들 김우명의 딸 김씨가 세자빈으로 간택되면서 그의 집은 외척가문으로 발돋움하여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의 아들 김좌명은 산당의 견제를 받았지만 병조판서를 지낸 뒤 사후 증 영의정에 증직 추서되었고, 아들 김우명은 딸이 왕비가 되면서 보국숭록대부 영돈령부사를 지내고 청풍부원군에 봉작되었다. 손자 김석주는 서인 산당에 대항하여 제2차 예송 논쟁 당시 김집의 문인들과 송시열, 송준길을 몰락시켰다가 뒤에 남인의 부패가 극에 달하자 역으로 송시열의 문인인 김익훈과 손잡고 남인가문을 타도하게 된다. 숙종은 그의 유상 영정에 "노인의 모습임에도 마치 신선의 풍채를 볼 수 있으며, 마음을 다해 체국(體國)했다"는 어제 친필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사후에도 아들 김좌명과 손자 김석주 등은 가업인 인쇄술을 계승하였고, 김우명의 일부 후손은 강원도 춘성에 정착하여 소설가 김유정의 선조가 된다. 그 뒤 그의 대동법 등을 높이 평가한 영조 때에 이르러 그의 문집들이 다시 재간행되었다. 영조는 일찍이 1636년 명나라의 화가 호병이 그린 그의 초상화 겸 풍경화인 송하한유도에 헌시를 남기기도 했다.

“잠곡 문정공 소상 어제찬(潛谷文貞公小像英祖御製贊)

윤건(綸巾)에 학창의(鶴氅衣) 입고 솔바람에 서있는 사람

누구를 그린 것인가? 잠곡 김공(金公)이라네.

오래전 신하로 나라 위해 충정을 다했고

옛사람의 의를 본받아 마음을 다하고 공경히 직분을 다하였네

대동법(大同法)을 도모하여 계획하니 신통하다 하겠다.

아! 후손들은 백대(百代)가 지나가도 이를 우러러보고 공경하라.”

경기도 양평군 양근(楊根) 미원서원(迷源書院[27])과 충청북도 청풍 봉강서원(鳳岡書院),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강동(江東) 청계서원(淸溪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그 뒤 1704년(숙종 30)에는 가평의 유림들과 가평 지역 유지들의 공의로 건립된 잠곡서원(潛谷書院)에 제향되었다.

2000년 2월, '3월의 문화인물'로 지정되었다.



5.김육의 시 관사유감(觀史有感 옛 역사를 보면)

古史不欲觀 觀之每迸淚 (고사부욕관 관지매병루)

君子必困厄 小人多得志 (군자필곤액 소인다득지)

垂成敗忽萌 欲安危已至 (수성패홀맹 욕안위이지)

從來三代下 不見一日治 (종래삼대하 부견일일치)

生民亦何罪 冥漠蒼天意 (생민역하죄 명막창천의)

旣往尙如此 而況當時事 (기왕상여차 이황당시사)

옛 역사서를 읽기가 싫어진다, 볼 때마다 눈물이 흐르네

군자들은 반드시 화를 당하고, 간신들은 도리어 득세니.

성공할 즈음이면 패망이 싹트고, 안정 될 듯하면 위태로워지네.

삼대시대 이후로 오늘날까지, 하루도 제대로 다스려진 적 없다네

백성들이 무슨 잘못이 있으랴, 저 푸른 하늘의 뜻 알 수가 없네.

지난 일도 오히려 이러하거늘, 하물며 오늘날의 일이겠는가


6. 역사속 평가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의 인물평을 말하기를 "사람됨이 강인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품행이 단정 정확하고, 나라를 위한 정성을 천성으로 타고나 일을 당하면 할말을 다하여 기휘(忌諱)를 피하지 않았다. 병자년에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우리 나라가 외국 군사의 침입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통곡하니 중국 사람들이 의롭게 여겼다."고 하였다.

경제 정책에 대한 탁월한 식견으로 충청도 관찰사 재직시 공물법(貢物法)을 폐지하고, 백성의 조세 부담을 덜어주는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및 크게 주장하였다. 그의 경제학은 실학의 선구자인 유형원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대동법은 왜란후 삶이 어려워진 백성을 위한 대안으로 내세워진 것이지만 진상 과 별공의 폐단은 막지 못하였다.

그러나 왕조실록의 비판에 의하면 "평소에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는데 정승이 되자 새로 시행한 것이 많았다. 양호(兩湖)의 대동법은 그가 건의한 것이다. 다만 자신감이 너무 지나쳐서 처음 대동법을 의논할 때 김집(金集)과 의견이 맞지 않자 김육이 불평을 품고 여러 번 상소하여 김집을 공격하니 사람들이 단점으로 여겼다."고 하였다.

*김육에 대한 상세 자료는 위키백과를 읽어 보세요 => 김육


7.올드코난의 평가

김육 선생 이전의 명재상이 황희, 류성룡, 이원익 3분이었고, 이후 마지막 재상인 채제공이었는데,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시기에 정승이 된 사람은 김육이다. 

황희는 세종대 태평시기에 정승이 되었고, 류성룡은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란에서 큰 역할을 해낸 것은 분명하지만, 김육은 임진왜란, 정유재란과 병자호란, 정묘호란이라는 조선 최대의 전란을 모두 다 겪었고, 인조반정이라는 조선의 2번째이며 마지막 반정을 체험한 조선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사건을 접한 사람이었다.

백성들의 고통과 양반 사대부들의 비겁함을 모두 다 접한 인물이며 선조, 광해군 인조, 효종까지 4명의 임금과 정사를 돌봤다. 바닥의 백성들부터 임금까지 김육 정승처럼 다양한 사람과 사건을 접해본 재상은 역사에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본 김육 선생은 백성을 위해서라는 당연한 명제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조선 왕조 실록에 그를 비판하기를 정승이 되자 새로 시행한 것이 많았고 자신감이 지나쳤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본다면, 당시 해야할 일들이 참으로 많았고, 이런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강한 면모를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기득권들의 엄청난 반발 속에서도 김육 선생은 백성을 위해서 그 의지를 꺾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다.  김육 정성의 생전에 그가 꿈꿨던 개혁은 완성되지 못했지만, 그의 개혁 시도는 이후 영정조시대로 이어지게 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