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조선 명재상, 키작은 재상, 오리정승 문충 이원익(李元翼) 생애와 평가

올드코난 2015. 3. 12.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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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익(李元翼, 리원익, 1547년 ~ 1634년) 음서로 관직이 승의랑(承議郞)에 이르러 다시 1569년(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 사헌과 호조·예조·이조 판서, 의정부좌의정 등을 지내고 관직이 의정부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임진왜란 때 의주로 몽양가는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사후 근검절약, 청렴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당색으로는 동인과 남인이었고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고, 인조 반정 이후에도 영의정에 되어 서인, 남인 연립정권을 구성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이황의 학맥을 계승하였다.


조선의 명재상 세 번째 왕족출신 영의정, 키작은 재상, 오리정승으로 알려진 문충 이원익(李元翼) 생애와 평가


1. 출생 및 가계

이원익은 조선의 왕족으로 1547년 12월 5일(음력 10월 24일) 함천도정(咸川都正) 이억재(李億載)와 사헌부감찰(監察) 정치(鄭錙)의 딸인 부인 정씨(鄭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공려(功勵), 호는 오리(梧里),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전주(全州)이씨이며, 태종 이방원의 서자이자 세종대왕의 서제인 익녕군(益寧君) 이치(李袳)의 4세손이다. 증조부는 수천군(秀泉君) 이정은(李貞恩)이고, 할아버지는 청기군(靑杞君) 이표(李彪)이다. 숙부는 이억순(李億舜)과 이억수(李億壽)인데, 숙부 이억수는 광해군 때 고령의 나이에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여, 폐모론이 나오자 폐모에 반대하는 지사들을 이끌고 항소(抗訴)하여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아버지 이억재는 부인 우씨(禹氏)와 혼인하였으나 자식이 없었고, 뒤에 감찰(監察) 정치(鄭錙)의 딸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낳았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이 이원익이다. 외가쪽으로는 세조의 측근이자 계유정난, 세조 반정을 도왔고, 세조, 예종, 성종때에 각각 영의정을 지냈던 정창손과 김질의 후손이기도 했다. 서외손 윤영은 충무공 이순신의 서녀와 결혼하여 그의 사돈간이었다. 미수 허목은 그의 손녀사위로, 정실 손녀딸의 남편이었다.

왕족으로서의 예우는 아버지의 대에서 끝났으나, 그는 학문을 부지런히 연마하였다. 그는 키가 작았는데, 이 때문에 '키 작은 재상'으로 불렸다. 처음에는 당색으로는 동인 이었으나, 정여립의 옥사를 계기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되자, 그는 유성룡과 우성전을 따라 남인이 되었다.


2. 관료 생활

15세에 동학(東學 : 4학 중의 하나)에 들어가 수학한 후 1564년(명종 19년) 사마시에 합격했고 1569년(선조 2년) 별시 문과에 급제해 다음해 1570년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후 승문원에 있었으나, 원래 인품이 곧았으며 굳이 불필요하게 사람 사귀고 어울리기를 싫어하여 공적인 일이 아니면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를 아는 이가 없었으나, 서애 유성룡과 한강 정구, 율곡 이이만은 그의 인품을 알아보고, 슬기로움을 알고 존경하였다.

1573년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성절질정관(聖節質正官)의 서장관이 되어 하사(賀使) 권덕여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온 후 호조, 예조, 형조, 좌랑을 거쳐 황해도 도사가 되어 크게 인망을 얻었고 황해도 감사로 있던 이이(李珥)에게 인정되어 여러 차례 중앙관으로 천거되었다. 1575년 가을 정언이 되어 중앙관으로 올라온 뒤, 지평·헌납·장령·수찬·교리·경연강독관·응교·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83년 우부승지 때 도승지 박근원(朴謹元)과 영의정 박순(朴淳)의 사이가 좋지 않자 왕자사부 하락(河洛)이 승정원을 탄핵하였다. 다른 승지들은 도승지와 영의정의 불화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화를 면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료를 희생시키고 자신만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상주해 파면되어 5년간 야인으로 있었다.

1587년 이조참판 권극례(權克禮)의 추천으로 안주목사에 기용되어, 양곡 1만여 석을 청해 기민을 구호하고 종곡(種穀)을 나누어주어 생업을 안정시켰다. 병졸들의 훈련 근무도 연 4차 입번(入番)하던 제도를 6번제로 고쳐 시행하였다. 이는 군병을 넷으로 나누어 1년에 3개월씩 근무하게 하던 것을 1년에 2개월씩으로 고쳐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킨 것이다. 이 6번 입번제도는 그 뒤 순찰사 윤두수(尹斗壽)의 건의로 전국적인 병제로 정해졌다.

그리고 뽕을 심어 누에 칠 줄을 몰랐던 안주 지방에 그가 권장해 심어 백성들로부터 이공상(李公桑 : 이원익에 의해 계발된 蠶桑이라는 뜻)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한다. 그 뒤 임진왜란 전까지 형조참판·대사헌·호조와 예조판서·이조판서 겸 도총관·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3.임진왜란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조판서로서 평안도도순찰사의 직무를 띠고 먼저 평안도로 향했고, 선조도 평양으로 파천했으나 평양마저 위태롭자 영변으로 옮겼다. 이 때 평양 수비군이 겨우 3,000여 명으로서, 당시 총사령관 김명원(金命元)의 군통솔이 잘 안되고 군기가 문란함을 보고, 먼저 당하에 내려가 김명원을 원수(元帥)의 예로 대해 군의 질서를 확립했다.

평양이 함락되자 정주로 가서 군졸을 모집하고,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어 왜병 토벌에 전공을 세웠다. 1593년 정월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합세해 평양을 탈환한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가자되었고, 선조가 환도한 뒤에도 평양에 남아서 군병을 관리하였다. 1595년 우의정 겸 4도체찰사로 임명되었으나, 주로 영남체찰사영에서 일하였다.

이 때 명나라의 정응태(丁應泰)가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중상모략한 사건이 발생해 조정에서 명나라에 보낼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를 인선하자, 당시 영의정 유성룡에게 “내 비록 노쇠했으나 아직도 갈 수는 있다. 다만 학식이나 언변은 기대하지 말라.” 하고 자원하였다. 그러나 정응태의 방해로 소임을 완수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선조로부터 많은 위로와 칭찬을 받고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이첨(李爾瞻) 일당이 유성룡을 공격해 정도(正道)를 지켜온 인물들이 내몰림을 당하자 상소하고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그 뒤 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가 그 해 9월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이 때 정영국(鄭榮國)과 채겸길(蔡謙吉)이 홍여순(洪汝諄)·임국로(任國老)를 두둔하면서 조정 대신을 공격하자 당파의 폐해로 여기고 이의 근절을 요구했고, 또 선조의 양위(讓位 : 임금이 왕위를 다음 임금이 될 사람에게 물려줌)를 극력 반대하고 영상직을 물러났다.


3. 임진왜란 이후

1600년 다시 좌의정을 거쳐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영남 지방과 서북 지방을 순무하고 돌아왔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광해군 즉위 후 다시 영의정이 되었을 때 전쟁 복구와 민생 안정책으로 국민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김육(金堉)이 건의한 대동법(大同法)을 경기도지방에 한해 실시해 토지 1결(結)당 16두(斗)의 쌀을 공세(貢稅)로 바치도록 하였다.

광해군이 난폭해지자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비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우애, 여색에 대한 근신, 국가 재정의 절검 등을 극언으로 간쟁했고, 임해군(臨海君)의 처형에 극력 반대하다 실현되지 못하자 병을 이유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정조(鄭造)·윤인(尹宎) 등이 대비폐위론을 주장하자,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극렬한 어구로 상소해 홍천으로 유배되었으며 뒤에 여주로 이배되었다.


4. 인조 시대

1623년(인조 1)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제일 먼저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았다.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인조에게 자신이 광해군 밑에서 영의정을 지냈으니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면 자신도 떠나야 한다는 말로 설복해 광해군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80세에 가까운 노구로 공주까지 왕을 호종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도체찰사로 세자를 호위해 전주로 갔다가 강화도로 와서 왕을 호위했으며, 서울로 환도하자 훈련도감제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고령으로 체력이 약해져 사직을 청하고 낙향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왕의 부름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5. 죽음

이후 치사(致仕)하여 관감당(觀感堂)으로 은퇴하여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등으로 여생을 보내니 그의 문하에서는 허목, 윤휴 등이 배출되었다. 특히 그의 애제자 중의 한사람인 미수 허목은 그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이원익이 40여년간 정승을 지내는 동안 초가집 생활을 영위하자 그의 검소함에 감동한 인조는 친히 관감정을 지어 집과 토지를 하사해 주었다. 조선 국왕이 신하에게 직접 집을 지어준 사례는 방촌 황희의 영당과 이원익의 관감정, 그의 제자이자 손녀사위인 허목의 은거당이 있다.

그가 만년에 거처하던 관감당 근처에는 그를 모신 사당과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그의 영정이 봉안되었던 곳은 후일 영당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영당말'이라는 자연부락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1634년 2월 26일(음력 1월 29일)에 사망하니 당시 그의 나이 향년 87세였다. 사후 인조의 묘정에 함께 모셨다.

저서로는 ≪오리집≫·≪속오리집≫·≪오리일기≫ 등이 있으며, 가사로 <고공답주인가 雇貢答主人歌>가 있다. 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6. 당대와 후대 평가

1)1623년(인조 9년) 1월 10일 인조가 승지 강홍중을 보내어 이원익을 문안한 뒤 "그가 사는 집이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강홍중은 "두 칸 초가가 겨우 무릎을 들일 수 있는데 낮고 좁아서 모양을 이루지 못하며 무너지고 허술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은 "재상이 된 지 40년인데 두어 칸 초가는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니, 청렴하고 결백하며 가난에 만족하는 것은 고금에 없는 것이다. 내가 평생에 존경하고 사모하는 것은 그 공로와 덕행뿐이 아니다. 이공(李公)의 청렴하고 간결함은 모든 관료가 스승삼아 본받을 바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5칸짜리 집 한 채를 이원익에게 하사했다. 하지만 이원익은 "신을 위해 집을 지으니, 이것도 백성의 원망을 받는 한 가지"라며 수차례에 걸쳐 받기를 사양했다고 한다.

2) 남인에서는 김육이 서인이라는 이유로 대동법에 무관심하거나 반대하였으나, 그는 당색을 초월하여 적극적으로 김육의 대동법을 지지하였다.

3) 성품이 소박하고 단조로워 과장이나 과시할 줄을 모르고, 소임에 충실하고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재물욕심이 없던 그는 스스로 짚신을 꼬아서 신고 지붕으로 쓸 만큼 청렴하였다. 청백리(淸白吏)에 뽑혔으며 남인에 속해 있었으나, 성품이 원만하여 반대파로부터도 호감을 받았다.

4) 공신들의 부패와 전횡이 계속되면서 1658년(효종 9년) 청백리이자 사심없었던 그의 뜻을 기리고자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현재의 경기 광명시 소하2동)에 지역 유림들의 공의로 그를 배향하는 삼현사를 세웠다. 그 뒤 삼현사는 충현사(忠賢祠)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676년(숙종 2년)에 숙종이 직접 충현서원(忠賢書院)이라 친필 사액을 내렸다.

오리 정승이란 이름으로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저서로 《오리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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