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전] 얼마전 이완구 국무총리가 내정되었다. 조선 시대로 따지면 영의정이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오른 이완구 총리는 여러모로 흠이 많다. 중요한 것은 이제 국무총리가 되었고, 과거의 허물을 덮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일을 해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참고하라는 뜻으로 조선의 5대 명재상에 대해 정리한다. 이들 선정 기준은 모두 영의정을 지낸 인물들로 영의정 중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고 후세에 평가를 받은 인물들이다. 더 상세한 정보는 차후에 정리해 보고 간략히 요약해 본다.
현대의 국무총리, 조선시대의 영의정을 지낸 재상들 중 최고의 명재상으로 일컬어 지는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을 요약해 본다.
조선(朝鮮)은 1392년 8월 5일 건국되었고 1897년까지 존속되었다. 이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해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강제 병합이 되는데, 명칭으로는 1897년이지만, 실재로는 1910년까지 조선의 시기로 본다면, 조선은 만 518년 지속된 국가다. 이 긴 시간동안 뛰어난 인재들이 많았는데, 그중 최고의 명재상 다섯을 일컬어 조선의 5대 명재상이라고 한다. 이들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본다.(글 출처/참고 자료: 위키백과)
1. 황희(黃喜, 1363년 3월 8일 (음력 2월 22일) ~ 1452년 2월 28일 (음력 2월 8일))
고려 개경(경기도 개성) 출신으로 초명은 수로(壽老), 자(字)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본관은 장수(長水).
고려 말기 음서(蔭敍)로 출사해 복안궁 녹사로 관직에 올랐다. 1389년(창왕 1년) 별장으로 과거에 급제했으나, 1392년(공양왕 3년) 고려 멸망 후 은거하였다. 그러나 동료들과 이성계의 부름으로 조선에 다시 관직에 올라 성균관학관으로 출사해 형조판서, 사헌부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거쳐 영의정부사에 이르렀다. 사후 1455년(세조 1년) 증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에 책록되고,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성격이 원만하여 존경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났고 관료생활 중 많은 치적과 일화를 남겼다. 사후 청백리로 규정되어 일반적으로는 청백리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뇌물수수, 간통, 부패 등 좋지 않은 물의를 빚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세종대왕의 신임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복직했다.
여러가지 비리와 이권 청탁의 의혹이 있었음에도 국가 미래를 내다보는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 세종은 그의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를 신임했다. 현명함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세종대왕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의 한사람으로서 세종대왕 치세기간 중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였다. 한편에서는 그의 청렴성은 청빈함으로 과장되었으며, 기득권을 지키려는 조선의 양반 계층에 의해 의도적으로 미화, 신격화되었고, 이후 양반집단 기득권 유지 위해 '황희 신화'를 창조하고 확대했다는 주장이 있다.
2. 류성룡(柳成龍, 1542년 11월 7일(음력 10월 1일) ~ 1607년 5월 31일(음력 5월 6일))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文忠). 경상도 의성의 외가에서 태어났고 간성군수 유작(柳綽)의 손자이며,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柳仲郢)의 차남이다.
이황의 문하에서 조목(趙穆)·김성일과 동문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등용되어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계기로 강경파인 이산해, 정인홍 등과 결별하고 남인을 형성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군관인 이순신과 원균을 천거하여 선조로 하여금 이들을 각각 전라도와 경상도의 방어책임자로 임명하도록 하였으며 이 중 이순신으로 하여금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공을 세웠고,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라 절친한 사이로서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겪은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현재 대한민국의 국보 제132호이다.
3.이원익(李元翼, 문화어:리원익, 1547년 ~ 1634년)
유일하게 왕족 출신으로 음서로 관직이 승의랑(承議郞)에 이르러 1569년(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해 대사헌과 호조·예조·이조 판서, 의정부 좌의정 등을 지내고 관직이 의정부 영의정에 이르렀고 임진왜란 때 의주로 몽양가는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사후 근검절약, 청렴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당색으로는 동인(東人)이었으나 정여립의 옥사를 계기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될 때 그는 남인이 되었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고, 인조 반정 이후에도 영의정에 초빙되어 서인, 남인 연립정권을 구성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이황의 학맥을 계승하여 남인에 학통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윤휴, 허목, 이순신 등의 인척으로, 윤휴의 서모이자 윤효전의 첩은 그의 서녀였고, 서외손 윤영은 충무공 이순신의 서녀와 결혼하여 그의 사돈간이었다. 미수 허목은 그의 손녀사위로, 정실 손녀딸의 남편이었다. 자는 공려(功勵), 호는 오리(梧里),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태종의 서자 익녕군(益寧君) 치(袳)의 4세손이며, 외가쪽으로는 세조, 예종, 성종 세 조정에서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의 후손이다.
4.김육(金堉, 1580년 ~ 1658년 9월) 경기도 출신으로 효종·현종 연간에 대동법의 시행을 주장, 추진하였으며 화폐의 보급에 힘썼던 인물. 1638년(인조 16) 충청도 관찰사에 재직 중 대동법을 제창 건의하였고, 수차(水車)를 만들어 보급했고, 전후복구 사업을 시도하였고, 《구황촬요》(救荒撮要)와 《벽온방》 등을 증보·재간행하였다.
인조 반정 직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갔다가 그 뒤 과거에 급제하여 음성현감,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했다. 그 뒤 충청감사 재직 중 충청도 지역에서 시범으로 대동법을 실시하게 했으며, 호서대동법이 실시될 때 호조 판서로서 실무를 지휘한 이시방과 함께 대동법 시행의 주역으로 꼽힌다. 병조참판, 형조판서,의정부우참찬,사헌부대사헌,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43년과 1645년 청나라에 사절로 다녀온 뒤 화폐의 주조·유통을 건의하여 평안도부터 추진하였고, 수레의 제조, 보급을 확산시켰으며, 시헌력(時憲曆)의 제정·시행을 건의하고, 《유원총보(類苑叢寶)》 《종덕신편(種德新編)》 등을 저술하였다. 1636년(인조 14년) 성절사로서 명나라의 연경에 다녀왔는데, 그는 조선에서 명나라에 보내는 마지막 공식 사신이었다.
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하는 데 성공하였고, 아울러 화폐 이용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주전사업을 건의, 민간에 주전(鑄錢)의 유통에도 성공하였다. 대동법의 실시를 한층 확대하고자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하고, 이를 1657년 7월에 효종에게 바치면서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한국 최초의 태양력인 시헌력을 도입하여 양력 사용을 보급시키기도 했다. 1651년부터 1654년, 1655년부터 1658년까지 두 번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하였다.
그는 공납의 폐단을 없애는데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걸기도 했다.
자(字)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초호는 회정당(晦靜堂)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고손자이다. 현종비 명성왕후의 친정 할아버지이며 김석주, 김석연의 할아버지, 청풍부원군 김우명, 증 청릉부원군 김좌명의 아버지이다. 정조의 장인 청은부원군 김시묵은 김육의 5대손이다. 조호익, 성혼, 윤두수, 윤근수,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김상헌의 문인이 되었다.
5.채제공(蔡濟恭, 1720년 ~ 1799년) 충청남도 출신으로 본관은 평강,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번옹(樊翁),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영조 후반과 정조대의 남인의 영수로 정조의 최측근 인사 중의 한사람이며, 정약용, 이가환 등의 정치적 후견자였다. 강박과 오광운의 문인이며 사도세자를 가르친 스승이자 세자궁의 측근신하의 한 사람이었다. 사도세자의 사후에는 세손(정조)의 측근이었다. 정조 즉위 후 남인의 영수로 중용되어 요직을 역임하였다. 제도의 개선과 개정에 관심을 가졌고, 1781년 서명응(徐命膺)과 함께 ≪국조보감≫을 편찬하였으며, 가톨릭교에 대하여 온건 정책을 폈다. 1790년에는 영의정직의 공석으로 단독으로 국정을 보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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