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시무 28조 저자 고려 초기 재상 최승로 (崔承老) 생애, 평가와 한계

올드코난 2015. 2. 11.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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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최승로(崔承老, 927년 ~ 989년) 고려 초의 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시호는 문정(文貞), 신라 말기 그 유명한 유학자 최치원의 증손자, 아버지는 신라 6두품 출신 최은함(崔殷含) 성종(成宗)에게 시무 28조를 바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바친 시무 28조는 대부분 수용되어 고려의 정치제도와 지방통치 등 국정 운영의 중요한 기조가 되었다.


시무 28조 저자 고려 초기 재상 최승로 (崔承老) 생애와 평가 (최승로의 개혁은 신라 출신 호족들의 혜택을 주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1.최승로의 생애 초기

신라 말기인 927년 신라 조정의 관인 최은함(崔殷含)의 아들으로 태어났다. 태조 18년(935년)에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할 때 최은함 역시 고려로 귀했다. 고려사에는 최은함의 벼슬을 원보(元甫) 삼국유사에는 정보(正甫)로 적고 있다.

고려사 최승로열전에는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 기도하여 승로를 낳았다(久無嗣禱而生承老)"고 적고 있고 삼국유사에는 최은함이 중생사(衆生寺)의 관음보살에 기도하여 승로를 얻었다는 기록과 함께 그의 어린 시절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최승로가 태어난 지 채 3개월이 못되어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서라벌로 쳐들어와서 성 안이 어수선한 가운데, 최은함은 피난 직전에 어린 최승로를 안고 중생사로 찾아와 "이웃 나라의 군사가 갑자기 쳐들어와 사세가 급박한데 어린 자식이 누가 되어 둘 다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대성(大聖)이 보내신 아이라면 크나큰 자비의 힘으로 보호하여 길러주셔서 우리 부자가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서 강보에 싸서 관음보살상 사자좌 밑에 감추어 두었다. 6개월 뒤 후백제 병사들이 물러가고, 최은함이 와서 보니 어린 최승로의 살결은 새로 목욕한 듯 깨끗했고 젖 냄새가 아직도 입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다는 최승로는 12세 때 고려 태조(왕건)에게 불려가 논어(論語)를 읽어보였고, 감탄한 태조는 최승로에게 소금 단지를 하사하고 원봉성(元鳳省)의 학생(學生)으로 발탁하였으며, 안장을 얹은 말에 예식(例食) 스무 석(石)을 더 내렸고 이때부터 최승로는 문장과 관련된 일을 맡게 되었다.


2. 성종 시기(최승로의 개혁정치)

성종 1년(982년) 정광(正匡) · 행선관어사(行選官御事) · 상주국(上柱國)이 되었고, 6월에 왕명으로 시무책(時務策) 28조를 올려 국가의 전반적인 면에 걸쳐서 폐단의 시정과 새로운 제도의 제정을 건의하여 고려 왕조의 기초 작업에 큰 역할을 했다. 또한 불교 세력의 지나친 횡포와 그로 인한 국가 재정의 손실을 지적, 이를 시정케 했다. 성종 2년(983년) 3월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서 지제고(知制誥)를 겸임하였으며, 12월에 좌집정(左執政) 이몽유(李夢游) · 병관어사(兵官御事) 유언유(劉彦儒) · 좌승(左丞) 노혁(盧奕)과 함께 진사(進士)를 뽑았는데, 성종의 복시(覆試)를 거쳐서 갑과(甲科) 강은천(姜殷川)과 을과(乙科) 두 사람, 명경(明經) 한 사람을 급제시켰다고 한다. 성종 7년(988년) 12월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승진하고 청하후(淸河侯) 식읍(食邑) 7백 호(戶)에 봉해졌다. 이때 최승로는 여러 번 글을 올려 물러나기를 청했으나 성종은 받아주지 않았다.


3. 사후 추증

성종 8년(989년) 5월 12일(양력 6월 17일)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태사(太師)에 추증되고 부의로 베 1천 필과 보리 3백 석, 멥쌀 5백 석과 유향(乳香) 1백 냥, 뇌원차(腦原茶) 2백 각(角), 대차(大茶) 열 근이 내려졌다.

목종(穆宗) 원년(998년) 4월에 태사 최량(崔亮)과 함께 성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덕종(德宗) 2년에는 다시 대광(大匡) · 내사령(內史令)이 추증되었다.


4.시무 28조

최승로하면 시무 28조가 유명한데, 유교 사상에 입각한 28조의 개혁안으로 고려 성종에게 건의하였는데, 그 가운데 22조가 전해진다. 최승로의 시무 28조 (22조)내용을 살펴보면.

[시무 28조(22조)]

1조 국방비를 절감해야 할 것.

2조 공덕재를 왕이 직접 베풀지 말 것.

3조 왕실을 호위하는 군졸 수를 줄일 것.

4조 관리를 공정히 선발한다.

5조 중국과의 사사로운 무역을 금지할 것.

6조 사찰의 고리대업을 금지할 것.

7조 지방관을 파견할 것.

8조 승려 여철을 궁궐에서 내보낼 것.

9조 신분에 맞추어 복식을 입게 할 것.

10조 승려가 역관에 유숙하는 것을 금지할 것.

11조 예악(禮樂)을 비롯한 유교 도리는 중국 문물을 본받더라도 의복 등은 우리(고려) 풍속에 따를 것.

12조 섬사람들의 공역을 줄여 줄 것.

13조 연등회·팔관회의 규모를 줄이고, 의식에 사용하는 인형을 만들지 못하게 할 것.

14조 왕은 신하를 예로써 대우할 것.

15조 궁궐에서 일하는 노비 수를 줄일 것.

16조 사찰을 마구 짓지 못하게 할 것.

17조 신분에 따라 가옥의 규모를 맞추게 할 것.

18조 불상에 금·은을 입히지 못하게 할 것.

19조 삼한 공신의 자손에게 벼슬을 줄 것.

20조 불교는 몸을 닦는 근본이고, 유교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므로 불교의식인 공덕과 유교 통치 행위인 정사를 균형 있게 할 것

21조 음사(淫祀)를 제한할 것.

22조 노비의 신분을 엄격히 규제해서 미천한 자가 윗사람을 욕하지 않게 할 것.

(23조~28조 전해지지 않음)


시무 28조를 보면 최승로가 이상으로 여긴 정치 형태는 군주가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정치의 주체가 되어야 하되, 신권과의 대화를 통한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지며, 아울러 어느 한쪽의 독주도 상호 견제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얼핏 보면 강력한 왕권도 신권도 옳지 않다는 것처럼 보일수 있지만, 실재로는 신권을 주장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군주에게 대놓고 신권을 주장하기 보다는 균형을 말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이는 조선 초기 정도전과 유사한 점이 있다. 정도전 역시 신권을 주장했는데, 이는 왕의 독주를 견제해야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차후 이야기해 본다.)


시무 28조를 보면 불교에 대한 지적이 많다.

2,6,8,10,16,18,20조 총 7개 조항이 불교에 대한 사항으로 당시 불교의 폐단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고려를 창업한 태조의 숭불 정책의 영향이 크다. 고리대금과 화려한 불상을 만들고 큰 사찰을 지으면서 국가 재정과 백성들의 삶에 큰 해를 끼치고 있던 것이다.


5.올드코난의 최승로 평가

우선, 당시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요즘 개독교 목사들의 탈세와 성범죄로 큰 비판을 받고 있는데, 고려시대 불교의 폐단은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도 사찰은 세금을 내지 않고, 귀족들의 엄청난 후원에 많은 승려들이 무위도식하면서 사회문제 또한 컸을 것이다. 최승로의 불교 개혁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정도는 성공했다고 본다.

그 외에도 시무 28조에는 당대에는 반드시 해야할 개혁들이 적혀있다.


하지만, 최승로의 개혁은 한계가 분명히 있는데, 이는 19조 (삼한 공신의 자손에게 벼슬을 줄 것)과 22조 (노비의 신분을 엄격히 규제해서 미천한 자가 윗사람을 욕하지 않게 할 것.)이라는 조항은 문제다.

19조에서 말하는 공신들의 자녀는 신라에서 투항한 김씨왕족과 귀족들도 포함되는데, 이는 최승로 역시 해당되는 내용으로, 훗날, 김부식을 포함한 많은 신라출신 사대부 귀족들이 고려의 주요한 지위를 갖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또, 22조 항은 성종(고려 6대 임금)이전 4대왕 광종 시절 노비안검법을 폐지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광종이 실시한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956년)은 부당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해방시키는 노예 해방법으로 양민으로서 부당하게 노비가 되었거나, 빚 등으로 노비가 된 이들을 석방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노비는 인권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 국가 체제에서 정부의 힘을 약화시키고 호족을 강하게 만드는 경제적 무력적 기반으로 노비 해방은 국가 차원에서 반드시 해야할 일이었다.


노비 안검법으로 노비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간단했다. 노비 자신이 과거에 양인 신분이었다는 것을 관아에 신고하기만 하면 바로 양인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호족 중 자신의 노비가 거짓을 고하는 것이라고 무고하는 호족들에게 불이익을 주었고, 원래 양인 출신이던 노비들의 신분회복이 계속되었다. 호족들은 당연히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최승로는 호족들 편을 들어 준 것이다.

22조 '노비의 신분을 엄격히 규제해서 미천한 자가 윗사람을 욕하지 않게 할 것'이라는 조항은 노비들의 해방을 막으면서 호족들에게 힘을 실어준 것으로 최승로를 명재상으로 인정할 수 없게 만든 조항인 것이다.


6.결론

최승로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이다. 고려 초기 사회를 안정시킨 성종 대에 큰 공헌을 했다. 그의 시무 28조는 당시 고려의 틀을 만드는데 좋은 이정표를 마련한 점도 있지만 고려라는 국가 보다는 신라계의 호족들을 위한 정책을 했다는 점은 그의 한계로 봐야 한다. 개인적으로 상봉 정도전 이하의 인물로 보는 것도 정도전이 백성을 먼저 봤다면 최승로는 호족(특히 신라계 귀족)중심의 개혁을 하려 했기 때문이다. 

최승로 이후 고려 문치는 극에 달하고, 신라계가 정권을 장악했다는 점은 분명 문제였다.


최승로의 역사 자료가 의외로 많지 않아 지금까지 읽어 본 자료를 토대로 이렇게 생각해 봤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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