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의 문하에서 조목(趙穆)·김성일과 동문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등용되어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계기로 강경파인 이산해, 정인홍 등과 결별하고 남인을 형성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군관인 이순신을 천거하여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공을 세웠고,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라 절친한 사이로서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겪은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징비록의 저자 문충공 류성룡(유성룡 文忠公 柳成龍) 생애와 평가
1. 출생과 가계
류성룡(柳成龍, 1542년 11월 7일(음력 10월 1일) ~ 1607년 5월 31일(음력 5월 6일))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文忠). 어머니 안동 김씨의 친정인 경상도 의성현(義城縣) 사촌리(沙村里)서림에서 출생하였다. 사복시정 유소(柳沼)의 4대손, 유자온(柳子溫)의 증손자, 조부는 군수 유공작(柳公綽), 부친은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柳仲郢)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친형은 류운룡(柳雲龍)이다.
2. 이황의 제자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평가 받으며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유성룡은 17살 때 <양명집>(陽明集)을 구해 읽었다. 그러나 스승인 이황이 양명학을 사학(邪學)이자 사문의 화라고 비판하며 이를 이단으로 규정하자 그도 양명학에 대한 관심을 끊고 이를 비판한다.
3. 전쟁전 관료 생활
1564년 명종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66년 별시 문과를 거쳐 한원(翰苑)에 들어갔다가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 검열과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 선조 2년에는 성절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명나라의 지식인들로부터 ‘서애 선생(西厓先生)’이라 불리며 존경을 받게 된다.
이조 정랑이 되어 이준경(李浚慶)의 관직을 삭탈함이 옳지 않음을 주장하였고 인성(仁聖) 대비가 죽었을 때 예조에서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였으나 류성룡은 적손(嫡孫)의 예를 따라 3년설이 타당함을 주장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
심의겸이 김효원의 전랑 천거를 반대하자 같은 이황의 제자였던 류성룡은 김효원을 변호하였다. 1575년 을해당론(乙亥黨論)으로 동서가 분당되자 동인에 가담하였다.
이후 응교(應敎) 등을 거쳐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 직제학(直提學), 부제학(副提學), 도승지, 대사헌(1582년~1583년), 대제학 등의 요직을 맡으며 별탈없이 승진해 나갔다. 상주(尙州) 목사로 나가 예절로 다스렸으며 고향에서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던 중 함경 감사·대사성 등에 연달아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예조 판서 재직 중 위주 목사 서익(徐益)이 소를 올려 그를 간신이라 탄핵하니 물러나기를 청하고 3년 동안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형조 판서로 부름을 받고 대제학을 겸했다. 1590년 다시 예조 판서에 이르러 역옥(逆獄)이 일어나자 많은 사대부와 함께 그 이름이 죄인의 글에 나타났으므로 사퇴를 청하였으나 왕은 이조 판서에 옮겼다가 이어 우의정에 승진시키고 광국 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하였다.
1589년 정여립의 옥사가 발생했다. 1590년 다시 예조 판서에 이르러 정여립의 사건으로 역옥(逆獄)이 일어나자 많은 사대부와 함께 그 이름이 죄인의 글에 나타났으므로 사퇴를 청하였으나 왕은 그를 위로하였다.
이때 서인 정철이 전라도 유생 정암수(丁巖壽)를 사주해 이산해 등을 얽어 넣으려고 했으나 유성룡과 이산해에 대한 선조의 신임이 두터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호남 유생 정암수를 비롯한 50여 명이 '이산해, 유성룡, 나사침, 나덕준, 정인홍, 정개청이 정여립과 한몸과 같은 사이였다고 하면서, 그들을 진퇴시킬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를 받은 선조는 크게 노하여 오히려 이산해, 유성룡을 면접해 위로하고, 정암수 이하 10여 명에게 죄를 줄 것을 명했다. 이에 양사가 계사를 올려 죄주지 말 것을 청했으나 선조는 응하지 않았다.
1590년 이조 판서에 옮겼다가 이어 우의정에 승진하였다. 그러나 정철의 처리를 놓고 동인 내에서도 의견이 갈라지게 된다. 파직, 유배된 정철의 처벌을 놓고, 정승을 역임한 고관이라 차마 죽일수는 없다며 류성룡과 우성전은 선처를 호소했다. 이산해는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잊었느냐며 분개했고, 정인홍 등은 류성룡과 우성전을 공박했다.
바로 정철을 사형에 처해야 된다는 이산해, 정인홍의 주장과 사형은 지나치다는 류성룡, 우성전 간에 논쟁이 벌어졌다. 류성룡과 우성전을 공격하면서 우성전이 축첩을 한 것과 부모의 상중에도 기생 첩이 수시로 우성전의 집에 출입한 점 역시 지적했다. 이산해는 기축옥사와 정여립의 난으로 연좌되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원한을 어떻게 풀수 있느냐며 온건론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정철의 처벌수위 문제를 놓고 동인은 심한 내분에 휩싸인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정철의 치죄 문제와 전랑 천거 문제 등을 놓고 동인 세력간 대립하여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게 되는데, 이는 정철을 죽이자는 강경파와 죽이지는 말자, 유배를 보내자는 온건파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 된 것이다.
이듬해 좌의정과 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 문제로 정철을 비롯한 서인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동인에 속하여 정철을 처벌하는 데는 찬성하지만 서인 전체를 처벌하는 것에는 반대한다며 강경파인 북인의 일원인 이산해와 대립하였다. 또한 좌의정에 재직 중 일본이 그들의 군사를 명나라로 들여보내겠다는 국서를 보냈는데 영의정 이산해는 이를 묵살하자고 했으나 성룡은 이 사실을 중국에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대로 실시하였으므로 뒷날에 명나라에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였다. 그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성사시킨 공으로 광국 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하였다.
4. 전쟁 준비과정
1591년 선조가 명장을 천거하라고 했을 때 성룡은 권율·이순신·원균 등을 천거하여 뒷날에 나라의 간성이 되게 했다. 이 중 이순신은 전라도에, 원균은 경상도에 각각 배치되었으며 그 결과 이순신이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구원하였다. 일본의 군사적 도발을 근본적으로 저지하기 위해서는 국방 안보 체제를 제대로 확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 뒤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병사 조련 등 군비 확충에 총력을 기울였다.
5.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4도 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가 되어 당쟁과 전란 속에서 조선의 조정을 총지휘하게 된다. 이때 왕을 모시고 송도(松都)에 이르러 영의정이 되었으나 신잡의 말에 따라 그 날로 사퇴하고, 평양에서 소동을 일으킨 난민들을 진정시키고 조정에서 북행(정확하게는 북행하여 압록강을 넘어 명나라로 들어가자는 의견)을 말하는 자가 많았으나 홀로 의주로 향할 것을 주장하여 뒷날에 명나라 구원의 길을 열게 하였다.
.이듬해 관서 도체찰사(關西都體察使)가 되어 안주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직문하고 군량을 준비하다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만나 평양의 지도를 주어 전투상의 편의를 제공하고 파주까지 진격하여 일본군을 궁지로 몰아붙이는 한편 일본의 간첩 수십 명을 잡아 적의 연락을 끊었다.
6. 정유재란
징비록에 따르면, 1597년 이순신이 역모를 당했을 때 "이순신을 천거한 사람이 나이므로 나와 사이가 좋지 못한 사람들이 몹시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류성룡은 선조 앞에서 직접 이순신을 변호하였으나, 선조는 1월 류성룡을 경기 지방에 보내 순찰토록 했다. 류성룡이 한달 뒤 돌아와보니 그 사이에 이순신을 죄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류성룡은 사직을 결심하고 2월 하순부터 4월 초까지 무려 10여 차례나 사직 상소를 올렸다. 이원익, 정탁 두 사람만이 이순신을 옹호하여 이순신은 간신히 참수형을 면하고 백의종군을 하게 조치되었다. 이때 살아남은 이순신은 복직 후 명량해전에서 대활약을 하여 조선을 또다시 구하게 된다.
다시 영의정에 보직되었다가 1598년 명나라 장수 병부주사(兵部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해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정인홍 등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했다. 이후 학문 연구에 몰두하며 그 역시 정경세 등의 문인들을 배출했는데, 이들은 영남 남인을 형성한다.
7. 전쟁 이후와 최후
이에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한 그는 조용히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그 후 2년 만인 1600년에 복권되어 정부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다. 1604년(선조 37) 호성(扈聖) 공신에 책록되었다. 1607년 5월 31일(음력 5월 6일)에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당을 병산서원 뒤에 세우고 여산(廬山)의 퇴계묘(退溪廟)에 함께 모셨다.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호계서원(虎溪書院)과 병산서원(屛山書院) 남계서원 삼강서원 도남서원 빙계서원 등에 위패가 모셔져 제향하게 되었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져 문충공(文忠公)이 되었다.
[류성룡 생애 요약]
o 1545년 (인종 1년) 4세 : 글을 읽기 시작.
o 1547년 (명종 2년) 6세 : 대학(大學)을 배우다.
o 1549년 (명종 4년) 8세 : 맹자(孟子)를 읽다.
o 1554년 (명종 9년) 13세 : 동학(東學)에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강독(講讀)하였음.
o 1555년 (명종 10년) 14세 : 향시(鄕試)에 합격.
o 1558년 (명종 13년) 17세 : 부인 전주 이씨(李氏)를 맞이 하였음.
o 1560년 (명종 15년) 19세 : 10월 관악산 암자에 들어가 맹자(孟子)를 공부함.
o 1561년 (명종 16년) 20세 : 고향 하회에 돌아와 춘추(春秋)를 읽다.
o 1562년 (명종 17년) 21세 : 9월 도산(陶山)에가서 퇴계선생을 찾아 뵙고 수개월간 머무르
면서 '근사록' (近思錄) 등을 수업(修業)하였음.
o 1563년 (명종 18년) 22세 : 가을에 진사생원(進仕生員) 동당초시(東堂初試)에 합격.
o 1564년 (명종 19년) 23세 : 7월 생원회시(生員會試)에 1등, 진사에 3등으로 합격.
o 1565년 (명종 20년) 24세 : 태학(太學)에 들어감.
o 1566년 (명종 21년) 25세 : 10월 문과(文科)에 급제.
o 1567년 (명종 22년) 26세 : 4월에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에 임명.
o 1569년 (선조 2년) 28세 :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임명.
o 1571년 (선조 4년) 30세 : 3월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됨.
o 1573년 (선조 6년) 32세 : 2월에 이조좌랑에 임명됨.
7월 13일에 관찰공(선생의 아버지) 상을 당하셨습니다.
o 1576년 (선조 9년) 35세 : 1월에 원지정사가 완성됨.
4월에 사간원헌납에 임명.
다시 사헌부장령에 임명.
o 1577년 (선조 10년) 36세 : 2월 여강서원의 퇴계선생 봉안문을 짓다.
o 1580년 (선조 13년) 39세 : 특명으로, 상주목사로 임명되다.
o 1581년 (선조 14년) 40세 : 1월에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
o 1583년 (선조 16년) 42세 : 1월에 홍문관 부제학이 되다.
o 1585년 (선조 18년) 44세 : 3월에 왕명으로 정충록(精忠錄) 발문(跋文)을 지어올림.
o 1587년 (선조 20년) 46세 : 퇴계선생의 문집을 편차(編次) 하였음.
o 1588년 (선조 21년) 47세 : 10월에 형조판서에 임명.
o 1589년 (선조 22년) 48세 : 봄에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
o 1590년 (선조 23년) 49세 : 5월 29일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에 임명.
o 1591년 (선조 24년) 50세 : 7월에 홍문관 대제학을 겸하게 함.
o 1592년 (선조 25년) 51세 : 4월 왜군이 부산에 침입하여, 이에대비,조치함.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
o 1593년 (선조 26년) 52세 : 1월에 평양성을 탈환.
10월 왕이 서울에 돌아오고 훈련도감(訓練都監)을 설치.
o 1594년 (선조 27년) 53세 : 충주를 중심으로 한강 상류의 방어를 튼튼히 하고 조령에 관문과
둔전(屯田)을 마련할 것을 건의.
o 1595년 (선조 28년) 54세 : 경기, 항해, 평안, 함경 4도 도체찰사에 임명.
o 1596년 (선조 29년) 55세 : 군사를 훈련시키는 규칙을 정하여 각 도에 내려보냄.
9월에 4번이나 사직원을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음.
o 1597년 (선조 30년) 56세 : 2월에 5차례 사직월을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음.
o 1598년 (선조 31년) 57세 : 11월 19일 파직.
12월 5일 삭탈관직 되었음.
o 1599년 (선조 32년) 58세 : 2월 16일 하회로 돌아옴.
o 1600년 (선조 33년) 59세 : 퇴계선생 연보(年譜)를 초(抄) 함.
o 1601년 (선조 34년) 60세 : 3월 5일 백씨 겸암선생이 돌아가심.
8월 21일 어머니 정경부인 김씨가 돌아가심.
o 1602년 (선조35년) 61세 : 2월에 신종록(愼終錄)을 짓다.
4월에는 영모록(永慕錄)을 짓다.
o 1604년 (선조 37년) 63세 : 3월에 다시 부원군에 봉해짐.
o 1605년 (선조 38년) 64세 : 1월에 지행설(知行說)을 짓다. (지행합일설)
4월에 큰아들이 죽다.
제왕기년록을 짓다.
9월에 서미동으로 이사함.
o 1606년 (선조 39년) 65세 : 3월에 서미동에 초당을 지음.
조명(釣名)설을 지었습니다.
o 1607년 (선조 40년) 66세 : 3월 3일 왕이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을 간호하였음.
9월에 왕에게 유소(遺疎)를 씀.
조카에게 명하여 유계(遺戒)를 쓰게함.
o 1614년 (광해 6년) : 병산서원에 위판(位版)을 봉안하고 석채례(釋菜禮)를 행함.
o 1620년 (광해 12년) : 여강서원의 퇴계선생 사당에 배향(配享) 하였음.
o 1627년 (인조 5년) : 남계서원에 봉안함.
o 1629년 (인조 7년) : 문충공(文忠公)이라 시호(諡號)를 내림.
o 1631년 (인조 9년) : 도남서원에 위판을 봉안함.
o 1643년 (인조 21년) : 삼강서원에 위판을 봉안함.
o 1689년 (숙종 15년) : 빙계서원에 위판을 봉안함.
8.류성룡에 대한 평가
예악교화(禮樂敎化)·치병이재(治兵理財)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선조실록》에는 편찬자의 평으로, 재상으로서의 그릇이 작고 붕당에 대한 마음을 떨치지 못해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면 용납하지 않았고 임금에게 바른 말을 고하지 못하여 대신다운 풍절이 없었다고 하는 등, 그의 성품에 대한 단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서인들이 동인인 류성룡을 폄하하기 위해 쓴 왜곡으로 여겨진다.
류성룡의 관료로서의 삶과 전쟁에서의 행적, 그리고 이순신 장군과 권율 등의 명장을 추천한 행적을 보면 류성룡은 사람을 쓰는데 매우 공정했으며, 백성들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청렴한 또한 역사적으로 사실이며, 비록 동인이기는 하지만, 정파에 완전히 얽힌 인물은 아니었다. 중심을 잘 잡았고, 훌륭한 인품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명재상으로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는 분이다.
'역사 >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충절의 상징 사육신 성삼문(成三問)은 왕권에 반대했던 신권주의자였다. (0) | 2015.03.19 |
---|---|
조선초기 청백리 명재상 맹사성 (강호사시가 저자) 생애와 평가 (0) | 2015.03.18 |
조선의 마지막 명재상 정조의 조력자 채제공 (蔡濟恭) (0) | 2015.03.16 |
평생 민생을 위해 살다간 정승 김육 (관사유감 저자) (0) | 2015.03.16 |
조선 명재상, 키작은 재상, 오리정승 문충 이원익(李元翼) 생애와 평가 (0) | 2015.03.12 |
조선의 명재상 황희(黃喜) 정승 생애와 평가 (0) | 2015.03.12 |
조선의 5대 명재상 (朝鮮 名宰相) 요약 설명 (0) | 2015.02.25 |
중국 후한시대 청렴 강직한 관료, 조조를 알아본 교현(後漢 喬玄) 인물평가 (1) | 2015.02.18 |
삼국유사 저자 보각국사 일연 스님 왜 삼국유사를 썼을까 (0) | 2015.02.15 |
시무 28조 저자 고려 초기 재상 최승로 (崔承老) 생애, 평가와 한계 (0) | 2015.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