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현(橋玄, 109년 ~ 183년)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 자는 공조(公祖), 예주(豫州) 양국(梁國) 수양현(睢陽縣) 사람. 삼국지에 나오는 바로 조조(曹操)를 알아보고 감탄하여 조조가 명성을 얻게 만든 인물로 잘 알려져있다.
교현(喬玄)은 후한(後漢) 시대인물로 청렴하고 강직한 관료였다. 불의에 맞서는 의기 있는 인물로 당시 혼란스럽던 시대에 백성들에게는 참으로 보기 드문 훌륭한 인물이었다. 교현에 대해 알아 본다.
중국 후한(後漢)시대 청렴 강직한 관료, 조조를 알아본 교현 (喬玄) 인물평가
1.삶
교현은 젊어서 현의 공조(功曹)가 되었다. 외척 양기(梁冀)의 비호를 받던 진왕(陳王)의 상국(相國) 양창(羊昌)의 죄를 적발한 교현은 당시 예주자사(豫州刺史)였던 주경(周景)이 양국에 이르렀을 때 주경을 만난 자리에서 땅에 엎드려 진상(陳相) 양창(羊昌)의 죄를 아뢰었고, 자신을 진국(陳國)의 종사(從事)로 임명하여 감찰하도록 해줄 것을 청하였다. 주경은 교현의 결의를 높이 사서 그를 진국종사로 파견시켰고, 교현은 양창의 빈객들을 가두어 심판하였다. 대장군(大將軍) 양기(梁冀)는 평소에 양창과 친분이 있었는데, 이에 교현을 소환하려 하였으나 교현은 문초를 더욱 엄중히 하고는 양창을 함거에 태워 낙양(雒陽)으로 보냈다. 이 일로 교현은 명성을 떨쳤다.
이후 효렴(孝廉)에 천거되었고, 낙양좌위(雒陽左尉)에 임명되었다. 승진하에 제상(齊相)이 되었으나,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노역형을 받았다. 형기가 끝난 후 다시 초빙되어 상곡태수(上谷太守)가 되었고, 이어서 한양태수(漢陽太守) 재임 시에는 상규령(上邽令) 황보정(皇甫禎)을 뇌물 수수죄로 사형에 처했다. 이후 군의 명사인 강기(姜岐)를 초빙하려 하였으나, 강기가 병을 칭하며 응하지 않자 이에 노하여 독우(督郵) 윤익(尹益)을 보내 “그대가 정녕 나오지 않는다면, 그대의 어미를 (강제로) 시집보내겠다.”고 협박하였다.
윤익이 반대하였으나 교현은 듣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윤익은 급히 가서 강기를 데려오려고 하였다. 그러나 강기는 바닥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고, 군의 사대부들 또한 간하였으므로 교현은 마침내 포기하였다. 이 일로 교현은 많은 비난을 받게 된다.
교현은 병으로 사임하고 물러났다가, 다시 공거(公車)로 부름을 받아 사도장사(司徒長史)가 된 후 장작대장(將作大匠)에 임명되었다. 환제(桓帝) 말기에 대장군과 삼공부(三公府)의 천거로 도료장군(度遼將軍)에 임명되었고, 교현은 임지에 이르러 병사를 충분히 쉬게 한 다음 제장을 이끌고 고구려(高句麗)의 백고(伯固) 등을 무찔렀다. 도료장군으로 3년을 재임하는 동안, 변경은 안정되었다.
영제(靈帝) 대에 이르러 부름을 받아 하남윤(河南尹)이 되었고, 이후 구경(九卿) · 삼공(三公)을 역임하였다. 광화(光和) 원년(178년), 태위(太尉)에 임명되었다. 상서령이 된 교현은 태중대부 개승(蓋升)이 황제와 가깝다는 것을 믿고 백성들을 착취한 사실을 적발하여 처벌하도록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그 후 영제가 태위(太尉)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어 집에서 요양하다가 광화 6년(183년)에 향년 75세로 숨을 거두었다.
2.일화
하루는 교현의 열 살 난 아들이 강도들에게 붙잡혀 가는 일이 일어났다. 양구(陽球)라는 장수가 즉시 관병을 데리고 구출하러 갔지만, 교현의 아들이 다칠까 봐 강도들을 포위하고만 있을 뿐, 더 이상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교현이 화를 내면서 소리쳤다. “강도는 법을 무시하고 날뛰는 무리들인데 어찌 내 아들 때문에 그들을 놓아준다는 말인가.” 그러고는 병사들을 다그쳐 강도들을 잡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강도들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이 일로 사람들은 교현을 높이 평가했다.
3. 조조를 알아본 교현
교현은 낙양에 보름을 받은 후, 얼마 안 되어 조조(曹操)를 보고는 감탄하여
“나는 천하의 명사를 많이 봐왔지만, 자네와 같은 자는 보지 못했네. 나는 늙었으니, 처자를 자네에게 맡기고 싶네.” 라고 말하였다. 이 일로 조조는 명성을 떨쳤으며, 건안(建安) 7년(202년)에 조조는 군을 이끌고 교현의 무덤 곁을 지나갈 때 예의를 갖고 제사를 지내는 한편 제문을 올렸다.
4.성품
교현은 성격이 강직하고 급하여 예의를 크게 따지지 않았으나, 낮은 사람에게는 공손하였으며 문중에서는 교현의 지위를 이용하여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없었다. 교현이 죽은 후 집에 가업이 없어 상중에 빈소를 차리지 못할 정도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칭송하였다.
5.후세평
교현에 대한 이야기는 《후한서(後漢書) 〈교현전(喬玄傳)〉》에 나온다. 교현은 죽으면서 남긴 유산이 전혀 없었으며, 장례도 극히 간소하게 치러졌다. 조조도 교현의 무덤을 찾아가 제사를 지내 주었으며, 채옹(蔡邕)은 교현을 위하여 〈태위교현비(太尉喬玄碑)〉라는 비문을 지어 「그 성격은 엄격했으며, 화려함을 미워하고 소박함을 숭상했다. 백 번 꺾일지언정 휘어지지 않았고, 큰 절개에 임하여서는 빼앗을 수 없는 풍도를 지녔다.(其性莊, 疾華尙朴. 有百折不撓, 臨大節而不可奪之風.)」고 칭송하였다.
6.내가 생각하는 교현
당시 후한말은 난세였다. 우리가 잘아는 조조가 등장하는 시기로, 삼국지연의에서는 폄하되었던 조조는 현대에 이르러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당시 후한말에 조조의 등장은 필연이었고, 이를 알아 본 교현은 사람 보는 눈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교현이 74세(한국나이 75세)까지 천수를 누렸다는 점을 눈여겨 봐야 한다. 당시 충신들이 설자리가 없던 시기에 이리 오래동안 천수를 누리면서도 관료로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은 청렴하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강요를 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즉, 자신의 허물을 먼저 본 사람이고, 사소한 잘못은 덮어 주되, 큰 죄를 용납하지 않은 강직함과 융통성을 가진 인물로 생각된다.
교현은 권세에 빌붙어 사는 자를 경멸했고, 연약한 백성들에게는 큰 죄를 묻지 않았다. 약자에 약하고 강자에 강했던 사람이다.
역사를 통틀어 훌륭한 인품과 곧은 심성을 가진 위인들이 많았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큰 화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적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인데, 이는 개혁의 어려움도 있지만,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지나치게 엄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리 옳다고 해도 이것을 당장 강요를 해서는 안된다. 내 자신이 먼저 바르게 행동을 해 모범을 보이며 스스로 따라오게 만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교현이 그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교현이 처벌한 대상이 주로 높은 관직에 있던 사람들이며, 백성들을 엄히 벌했다는 기록이 없다.
부하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교현은 매우 청령하고 강직했다. 당시, 매관매직을 일삼던 어지러운 시대에 교현이라는 인물은 그래서 더 돋보인다.
교현은 모범과 실천 그리고 엄함과 관용을 잘 이해했던 인물이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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