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명장 고니시 유키나가 (소서행장) 인물 평가

올드코난 2015. 3. 23.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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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일본어: 小西 行長 こにし ゆきなが,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1555년 ~ 1600년 음력 10월 1일) 일본 상인 출신의 무장, 정치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끼던 장수였다. 당시 대조선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의 장인이자 가토 기요마사와 앙숙 관계였다. 종교는 로마 가톨릭교도였고 그의 부장이자 사위인 소 요시토시를 비롯한 그의 휘하 책사를 포함하여 병사들 역시 로마 가톨릭 교도였다. (글출처:위키백과)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명장 고니시 유키나가 (소서행장) 인물 평가


1. 임진왜란 전

고니시는 사카이(堺)출신의 약재 무역상 고니시 류사(小西隆佐)의 아들로 자신도 상인이었다. 본명은 고니시 야구로(彌九郎)였고 1559년생이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우키타 나오이에의 가신이 되어, 주로 외교 사자로 일했다. 우키타 나오이에가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통해 오다 노부나가에게 항복할 때에도 히데요시와 교섭했다. 우키타 나오이에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었다. 도요토미 정권의 후나부교로 임명되어 수군을 통솔했다. 규슈 정벌과 히고 고쿠진 잇키에서 전공을 세워, 히고 태수 삿사 나리마사 할복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히고 남부우토, 야시로, 마시키 3군 20만석을 받았고, 우토(宇土) 성을 새로 쌓아 본거지로 삼았다. 성을 쌓을 때 동원한 아마쿠사 제도의 다섯 고쿠진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를 가토 기요마사의 도움을 받아 토벌해 아마쿠사 4만 석도 고니시의 영지가 되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고니시는 군기로 붉은 비단 장막에 하얀색 십자가를 그린 것을 사용했고, 휘하 병사들 다수도 로마 가톨릭 교회신도였다. 조선을 침략했을 때 진중에는 포르투갈 출신의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인 세스페데스 신부가 사목했었고, 밤마다 미사를 올렸다고 한다. 봉토였던 아마쿠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후에 시마바라 봉기의 진원지가 된다. 한편 고니시의 영지와 인접한 가토 기요마사의 영지에서는 열렬한 니치렌 종 신자인 가토 기요마사가 로마 가톨릭 교회 신도를 탄압하였는데, 이를 피해 고니시의 영지로 달아난 로마 가톨릭 교회 신도들을 고니시가 보호해주면서, 종교로 인해 서로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2.임진왜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야욕을 감지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쟁을 막고자 했지만 조선에서는 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아 중재 노력은 실패했다. 사위인 소 요시토시(宗 義智), 나가사키 반도의 작은 다이묘들인 마쓰라 시게노부(松浦鎮信),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오무라 요시아키(大村喜前), 고토 스미하루(五島純玄)와 승려 겐소(玄蘇)를 이끌고, 18,700명으로 구성된 조선 침공 선봉대 제1군의 지휘관으로 가장 먼저 조선에 상륙했다.

견원지간이었던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로 진격하여 국경인 등의 반란 덕분에 임해군등을 생포하며, 커다란 야전을 치루지 않은 것에 비해,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진성과 다대포진성, 동래성을 함락하고, 서울을 가장 먼저 점령하여 참전 무장 가운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특히 기요마사는 보급을 무시한채 함경도로 계속 진격하여 정문부에게 각개격파 당하였고, 여진족에게 완패 당한 것에 비해, 유키나가는 평양성을 함락한 후 보급 문제와 명나라 원군에 대한 부담을 걱정하는 등 신중한 자세를 보인다. 이후 명나라의 개입과 이순신의 남해 제해권 장악, 그리고 각지에서의 의병의 활약으로 인한 보급문제로 인해 더 이상 진격을 못하고 지체하던 중 조명연합군에 패해 평양성에서 쫓겨났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시다 미쓰나리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강화교섭에 힘썼는데, 가토 기요마사가 이를 두고 '고니시가 조선에서 조금만 더 적극적이었다면, 전쟁의 양상은 달라졌을 것이다.'이라고 불만을 터트렸다.


3.정유재란

임진왜란 이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제 2군 사령관으로 다시 참전했다. 앙숙인 가토 기요마사가 제 1진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그러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보내어 가토군의 도해 정보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적군이 보내준 정보라 믿지 않아 공격하지 않았고, 조정에서 다시 공격 명령을 내렸을 때는 이미 가토군이 부산에 상륙한 뒤였기에 이순신은 공격 명령을 다시 거부했다. 그러자 조정은 이순신을 파면하고 대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임명했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출전하지 않았고 도원수 권율이 원균에게 태형을 가해 원균을 출전시켰고 이후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군은 대패하고 원균은 죽는다. 이후 5만 8천 군사를 이끌고 순천으로 해서 남원에 진입하여 함락시켰다. 8월 중순 남원성에 포위된 명나라 부총병 양원은 해안가로 내려간 전라도병마절도사 이복남에게 구명을 요청하였다. 이복남과 산성별장 신호, 접반사 정기원이 행군부기하자 그는 이들에게 문을 열어준다. 남원성 남문으로 잠입한 이복남군과 성 주민 1만이 힘을 합쳐 그를 대적하였으나 패전하고 남원성은 함락되고 사살당한 백성들의 코와 귀를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낸다. 고니시 군은 전주전투에서 꺾이게 된다.

1598년 음력 8월 18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후퇴하였다. 전라도 순천 왜성에 갇혀 버린 그는 명나라 수군을 지휘하던 진린에게 뇌물을 주어 간신히 탈출하였고, 퇴로를 열기 위한 노량 해전에서 원군으로 온 시마즈 요시히로 등과 함께 참패했으나, 본국으로 후퇴하는 것은 성공했다.


4.최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벌어진 문치파와 무단파 사이의 대립에서는 문치파의 거두인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친교로 인해 문치파에 가담. 문치파와 무단파의 대립이 깊어지는 가운데, 유키나가의 라이벌이자 무단파의 수장격인 가토 기요마사는 미쓰나리를 습격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1600년 10월, 도요토미 가문의 수호를 내걸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타도를 위해 일으킨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시다 미쓰나리에 호응해 서군의 주요 다이묘로서 참전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야전에 강한 이에야스를 의식하여 농성하는 쪽을 제안했으나, 이시다 미쓰나리는 간토의 대 다이묘인 이에야스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야전에서 크게 승리해야 한다며 제안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고니시 유키나가는 세키가하라에서 우키타 히데이에나 이시다 미쓰나리에 비해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혹은 동군이 진을 갖추기 전에 야습할 것을 건의했으나, 거절당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고도 한다.

세키가하라에서 전투가 시작되자 고니시 군은 오다 유라쿠, 후루타 시게카츠군을 맞아 격전을 치루지만, 서군측 장수들의 배신으로 인하여 고작 몇시간 만에 서군의 패배로 끝났고, 여기서 패한 고니시는 자결을 금지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할복을 거부하여, 1600년 교토 로쿠죠(六條)의 강변에서 이시다 미쓰나리, 안코쿠지 에케이 와 함께 참수되었다. 처형된 이후 그의 가문은 완전히 멸문되었으며, 자신이 소유하던 영토도 가토 기요마사가 가로챘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애용하던 무기는 거대한 검이었는데, 그것을 들고 있으면 적병들이 공포에 질려 감히 나서질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5.사후

고니시가 할복을 거부한 이유가 로마 가톨릭 교회 때문라는 것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인식하면서 일본에서는 대대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 탄압이 실시되었다. 고니시는 조선에서 고아 소녀를 데려와 양녀로 삼고 로마 가톨릭교회에 입교시켜 세례명을 '줄리아'라 하였다. 그의 사후 줄리아는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었으며, 그녀 역시 막부의 기리시탄 탄압으로 유배되어 여생을 유배지에서 보낸다.


6.올드코난의 평가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은 무장으로만 알려져있지만, 장사꾼 출신이라 이해득실을 잘 따지는 편이다. 그가 조선과의 전쟁을 반대했던 것도 평화주의자로서가 아닌 장사를 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톨릭 신자로서 신앙심은 깊다고 알려졌지만, 중세 유럽 귀족들처럼 진정한 의미의 예수의 사랑을 전파했던 인물은 아니다. 가토 같은 자들에 비해 덜 잔인했을 뿐,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역시 조선 백성들을 수 없이 살생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토 기요마사를 더 아꼈다고 알려져있지만, 실재 도요토미가 신임했던 부하는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가토가 도요토미 집안 대신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섰지만, 고니시는 끝까지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을 했다. KBS드라마 징비록에서 보여주는 가토의 충성은 다소 과장된 것이다.


마무리하자면,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은 유능한 장수이며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며 상술에 밝은 장사꾼이기도 하지만, 원칙을 지킬 줄도 아는 인물이었다. 가토 기요마사와의 대립은 그와 정 반대되는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다.(가토 이야기는 다음 페이지에)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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