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임진왜란 왜의 장수 소 요시토시(そう よしとし 종의지) 생애와 평가

올드코난 2015. 3. 29.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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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요시토시(そう よしとし 宗義智(종의지) 1568년 ~ 1615년 1월 31일)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전기에 걸쳐 활약한 왜의 무장 겸 다이묘. 소(宗) 가문의 20대 당주이며 쓰시마 후추 번의 초대 번주. 키리시탄(가톨릭)으로 세례명은 다리오. 임진왜란 초기 왜의 1군이었던 고니시 유키나의 사위(딸의 이름 고니시 마리아)로 고니시와 함께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섰었다. 

*참고: 실재 발음은 '소오~'라고 하지만 한글 표기는 '소' 요시토시로 한다.

임진왜란 왜의 장수 신중하고 영리했던 소 요시토시(종의지 = 평의지) 생애와 평가


1.출생과 가계

에이로쿠 11년(1568년) 소 마사모리(宗将盛)의 4남으로 출생. 제17대 당주 소 요시시게(宗義調)가 은거하면서 소 마사모리의 장자 소 시게나오(宗茂尚)를 양자로 맞아 가독을 양도했지만 일찍 죽고, 차남 소 요시즈미(宗義純)를 양자로 맞이해 가독을 양도 했지만 소 요시즈미도 마저 일찍 죽어 덴쇼 7년(1579년) 음력 1월 4남 소 요시토시를 양자로 맞아 가독을 양도해 소(宗) 가문 제19대 당주가 되었다.

소 요시토시(종의지)는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 영향을 받아 가톨릭에 심취하게 되고 다리오라는 세례명까지 받는다. (소 요시토시와 고니시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고니시 만쇼는 훗날 신부가 된다.)

덴쇼 15년(1587년) 음력 5월 정계에서 물러나 있던 양부이며 제17대 당주 소 요시시게가 당주로 복귀하자 소 요시토시는 가독에서 물러났는데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규슈 정벌 때문이다. 소 요시토시는 소 요시시게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신종하였고, 쓰시마의 영지를 인정받았다.



2.임진왜란 전 활동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준비하자 소 요시시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시마이 소시쓰(島井宗室)등은 조선과의 교섭에 힘썼다. 덴쇼 16년(1588년)에 소 요시시게가 사망 등의 악조건도 있어 교섭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이때 소 요시토시는 소 요시시게의 뒤를 이어 소 가문의 정식 당주가 된다.

덴쇼 18년(1590년) 일본을 방문한 조선 사절단 조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황윤길(黃允吉),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 수행무관 황진(黃進)을 복속사로 사칭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알현시켰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이 복속한 것으로 받아들여 조선에 명나라 정복사업의 선도역을 맡을 것을 명 하지만, 조선 사절단은 왜의 전국통일에 대한 축하사절이었고 이는 소 요시토시가 조선에 축하사절을 보내도록 거짓 요청을 했기 때문에 내방한 사절이었다. 조선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나라 정복사업의 선도역을 승낙할리 없었다. 궁지에 몰린 소 요시토시는 명나라 정복의 선도역 명령을 조선에게 전해야 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 대신 조선이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 달라는 거짓 요청을 하지만 이것도 당연히 실현되지 않았다.


3.임진왜란 전쟁시

조선과의 교섭은 결과적으로 실패하였고, 덴쇼 20년(1592년) 결국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소 요시토시(종의지)는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대에 속해 일본군의 최선봉으로서 참전하게 된다. 덴쇼 20년 (1592년) 음력 4월 12일 소 요시토시는 5,000명의 군세를 이끌고 쓰시마 섬 북단의 오우라(大浦)를 출항해 부산에 상륙한 후 고니시와 함께 동래, 기장, 좌수영, 양산, 밀양, 대구, 인동, 선산을 공략하고, 이일(李鎰)의 군대를 상주에서 격파하고, 음력 4월 27일에 경상도를 넘어 충청도로 진군, 탄금대에서 요격 나온 신립(申砬)의 조선군을 괴멸시켜 충주를 공략한다. 음력 5월 1일에 경기도 여주 공략 후, 2일에 용진을 거쳐 한성 흥인지문 앞에 도착한 후, 3일에는 수도 한성에 입성한다. 한성에서 회의 결과에 따라 음력 5월 18일에 임진강에서 김명원(金命元)등의 조선군을 격파하고, 27일에 개성 공략, 황해도의 서흥, 평산, 황주, 중화를 차례차례로 공략하여 평안도로 나아갔다. 음력 6월 8일에 대동강의 근처까지 도달하고 16일에는 평양을 공략하였다. 음력 7월 16일, 명의 요동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이 평양을 공격해 왔지만 격퇴했고 이때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패주하는 명군을 추격 해 명군장수 사유(史儒), 천총(千総) 장국충(張國忠), 마세륭(馬世隆)등을 죽였다. 29일, 이원익(李元翼)의 조선군이 평양을 공략하지만, 이도 격퇴하였다.(3차 평양 전투)

분로쿠 2년(1593년) 음력 1월 7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약 4만의 명군과 김명원의 1만명의 조선군과 가세해 평양을 공격한다.(4차 평양전투) 고니시의 1군은 전투에 패하고 후퇴를 하게 되는데, 결지한 왜군이 벽제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명군은 위축되고, 일본군도 병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강화교섭을 한 후, 부산 주변까지 후퇴한다.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명나라의 강화 담당자 심유경(沈惟敬)과 교섭을 하지만 아무 성과 없이 결렬된다.


4. 정유재란 참전

몇 년간의 소강상태를 유지하다 게이초 2년(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소 요시토시는 좌군에 속해 참전한다. 우선 서쪽으로 진격해, 음력 8월 13일 남원성 공략을 개시하였고, 4일째에 성을 함락했다. 다음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를 점령하고. 전라도를 제압하지만 겨울을 앞에 두고 후퇴한 후 남해 왜성에 머물렀다. 게이초 3년(1598년) 음력 8월 18일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조선에 파견된 일본군에게 음력 10월 15일부로 귀국명령이 하달되고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창선도에서 만나 함께 귀국할 예정이었지만, 이때 순천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마쓰라, 아리마, 오무라, 고토 5제장은 이순신(李舜臣)과 진린(陳璘)의 조명연합수군에 퇴각로가 저지되어 순천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이것을 본 소 요시토시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다카하시 무네마스(高橋統増), 데라자와 마사시게(寺沢正成) 등과 함께 순천에 갇힌 일본군을 구원하러 출진하였고, 노량해협에서 매복하고 있던 조명수군과 교전한다.(노량해전) 고니시 유키나가등 5명의 왜장은 이 틈을 이용해 탈출에 성공하였다.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부산을 거쳐 귀국하였다. (임진왜란 종전)


5.임진왜란 이후 서군 가담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일본은 도요토미 가에 충성하는 서군(이시다 미츠나리파)과 동군(도쿠가와 이에야스 파)간의 대결이 펼쳐진다. 이들의 승자를 가린 것은 게이초 5년(1600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였다.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였기에 서군에 속해 후시미 성 공격에 참전하고, 오쓰 성 공략과 세키가하라 전투는 가신을 대신 출진시켰다.

하지만 이시다 미츠나리의 인망관리 실패, 모리 데루모토의 불성실한 태도,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와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배신 등 여러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패배하고 동군이 승리한다.

패한 서군의 다이묘 대부분은 영지가 몰수 되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특히 서군 소속 다이묘들 중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참수형에 조리돌림까지 추가되어 가장 혹독한 형벌을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그가 소 요시토시의 장인어른이었다. 하지만 소 요시토시는 목숨을 건지는데, 임진왜란 전에 반대했다는 점과 조선과의 국교회복을 원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의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참수당하자마자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인 고니시 마리아와 이혼하고, 아들마저 내쫓았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쓰로부터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6. 조일 외교활동

소 요시토시는 이에 응해 조선 조정에 전국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을 반대했고 단 1명도 군대를 보내지 않고 끝까지 버틴 다이묘라는 점을 강조해 조선과 일본이 다시 외교를 시작하게 된다. 게이초 14년(1609년)에 조선과의 기유약조를 맺어 국교를 회복하였다. 이 공적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인정받아 소 가문은 막부로부터 독립한 기관으로 조선과의 독점적 무역권리를 인정받았다. 소 요시토시는 서군 다이묘들의 몰락했음에도 쓰시마 후추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게이초 20년(1615년) 음력 1월 3일 향년 48세의 나이로 죽었다. 장남 소 요시나리(宗義成)가 뒤를 이었다.


7.역사 속 평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소 요시토시가 임진왜란 당시 맨 먼저 조선 땅을 밟은 인물이기에 소 요시토시의 이혼을 거론하며 간사하고 음흉한 자로 묘사했다.

“만력 28년에는 덕천가강(도쿠가와 이에야스)이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린 아들 풍신수뢰(豊臣秀賴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끼고서 싸워 서해도(西海島)의 대명휘원(大明輝元)을 내치고, 휘원이 친근하게 신임하는 장관 소서행장(일본어: 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과 석전삼성(일본어: 石田三成 이시다 미쓰나리) 등 8∼9명을 모두 살해하여 죽이고 나라 안을 평정하여 제도(諸島)를 호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갑비수(甲斐守: 구로다 나가마사)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 등이 바야흐로 친근하게 신임을 받으며 용사하는데, 종의지( 宗義智 소 요시토시) 는 소서행장의 사위인 이유로써 자기 아내를 내쫓고 덕천가강에게 가서 붙었고, 평조신은 소서행장의 모주(謀主)였었으므로 어떤 일을 기회로 납총(納寵)하려 하여 가강과 청정의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갖은 말을 늘어놓는다는 것입니다.

종의지와 평조신은 곧 왜적들 중에서도 매우 교활한 자들로서, 거주하고 있는 곳이 우리의 지경과 밀접하게 가깝습니다. 강화 요청을 핑계삼아 자주 사람을 보내 바다를 건너와 간곡한 정성을 다하기도 하고 멋대로 공갈 협박을 하기도 하며, 몰래 쾌속선을 내보내 사람을 약탈하기도 하고 그들 섬의 왜인들로 하여금 투항해서 굶주리고 있음을 고하게도 하여, 변태가 종잡을 수 없으므로 더욱 측량하기가 어렵습니다. 빈번하게 왔다갔다 하면서 탐색이 갈수록 급박해지고 말을 바꾸어 가면서 계책을 더욱 깊이 쓰고 있습니다. 그들이 꺼리면서 은밀히 물어보는 것은 매양 중국 장수들이 어느 땅에 머물러 있느냐는 것과 중국군이 과연 본국에 머물러 있으면서 방수(防戌)하느냐는 것이니, 이런 때에 천조(명나라)에서 힘을 내어 구제해주지 않는다면 우리 나라에서 어떻게 스스로 도모하여 큰 실패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선조 163권, 36년(1603 계묘 / 명 만력(萬曆) 31년) 6월 9일(갑오) 7번째 기사


반면,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을 군종 사제 자격으로 방문한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는 "지극히 신중한 젊은이로, 학식이 있고 훌륭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평가한다. 


8.올드코난의 평가

한국인 입장에서는 간악한 인물인지 몰라도, 그레고리오 신부 평가가 조금 더 옳아 보인다. 

소 요시토시(종의지)가 조선과 왜의 전쟁을 반대했던 것은 평화주의자라서가 절대 아니다. 양국의 무역으로 이득을 보고 있던 쓰시마 섬의 영주로서 전쟁은 자신들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에, 전쟁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막상 전쟁이 벌어지자 왜의 편에서 싸웠고, 이후 일본 내전에서도 어쩔 수 없기는 했지만, 고니시 편에서 전투를 치루면서도 그는 결국 살아 남았다. 비겁했기때문이 아니라, 영특했기때문이다.

도쿠가와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적극 활용할 줄 알았던 것은 신중함과 영리함을 가졌기때문이다.

소 요시토시(종의지)이 왜가 아닌 조선의 관리였다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 본다.

최소한, 조선군의 장수와 관리들처럼 무능하거나, 도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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