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임진왜란 장렬히 전사한 동래부사 충렬 송상현 (忠烈 宋象賢)은 시간이 부족했다.

올드코난 2015. 3. 23.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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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현(宋象賢, 1551년 ~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작가이며 임진왜란 때의 장수이다. 임진왜란 초기 동래성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과 교전하다가 패전 살해되었다. 왜적은 그를 포로로 사로잡아 항복을 강요하였으나 항복하지 않자 처참하게 살해하였다.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한천(寒泉)이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임진왜란 초기 장렬히 전사한 동래부사 충렬 송상현(忠烈 宋象賢)에게는 전쟁을 준비 할 시간이 부족했다. 만일 좀 더 일찍 그에게 동래성을 맡겼더라면.


1. 출생 및 가계

송상현(宋象賢, 1551년 ~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전라북도 정읍군,현 정읍시 출생. 아버지는 평강, 용안 등에서 현감을 지낸 후 임진왜란이 발발한 시점에서 이미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고 있던 송복흥(宋復興), 할아버지는 송전(宋琠), 증조할아버지는 송승은(宋承殷). 부인은 성주이씨(星州李氏)로 기묘명현인 묵재 이문건(李文健)의 손녀.

어려서부터 남달리 재주가 뛰어나 10여세에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15세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하면서 문장을 떨쳤고 사계 김장생과 우의를 맺었다.


2.관직

1570년(선조 3) 진사시에 합격 진사가 되고, 1576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보임되었고 다음해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다. 1579년 박사(博士)와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고, 다음해에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외직에 나가 유학을 진작시켰다. 1583년 사헌부지평으로 들어와 호조·예조·공조의 정랑(正郞), 공조좌랑과 군자감(軍資監)의 정(正) 등을 지냈다. 1584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시 지평이 되었다가 은계도찰방(銀溪道察訪)으로 좌천되었가 다시 지평을 지내고 배천군수로 나갔다가 3년 만에 전직되어 경력(經歷), 집의, 사간과 사재감(司宰監), 군자감(軍資監)의 정(正)이 되었다. 1591년(선조 24년)에 집의(執義)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되고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임명되었다. 왜구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오는 가운데 임지에 도착하여 방비를 굳게 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3.임진왜란 및 전사

1592년 5월 23일 (음력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그 다음날(음력 4월 14일)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이어 동래에 쳐들어온 왜병이 남문 밖에 목패(木牌)를 세우고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 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전즉전의 부전즉가도)” 하자 송상헌은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 전사이 가도난)”고 목패에 글을 써서 항전했다.

송상현 부사는 군사를 이끌고 분전하였으나 결국 중과부적이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갑옷 위에 관복을 입고 북쪽의 임금께 절을 올린 후 성문의 누각에 단정히 앉은채 왜병에게 피살되었다. 적장이 그의 충절에 탄복하여 송상현을 살해한 자기 부하를 잡아 죽이고, 일본장수인 소 요시토시 등이 그의 충렬을 기려 동문 밖에 장사 지내 주었다 한다. 그의 첩인 김섬(金蟾) 등도 그를 따라 순절하였다.



4. 사후

 송상현의 의연함에 감동한 적장 중의 한 사람은 그가 죽은 뒤 시(詩)를 지어 제사지내 주었다.  송상현의 시신을 찾지 못해 일각에서는 그가 정발과 함께 일본군에 투항하여 일본군 장수가 되었다는 헛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사후 조정에서 그 아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 주었다. 사후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고,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에 제향되었다. 1595년 선조 28년에 묘소를 청주로 이장하고 충신문을 세웠으며, 1610년 광해군 2년에 사당 동래부사송상현충렬사(東萊府使宋象賢忠烈祠)을 창건하였다.

1742년 영조 때 동래성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들을 기념하여 송상현 장군이 순절한 정원루가 있던 곳에 송공단을 만들었고 매년 음력 4월 15일에 동래기영회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다. 또한 동래 충렬사에서도 동래성 전투와 부산진성 전투 등 임진왜란에서 전사한 여러 사람들을 모시고 있다. 또, 황해도 개성 숭절사(崇節祠), 청주 상당구 용정동 신항서원(莘巷書院)과 흥덕구 수의동 충렬사(忠烈祠),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정충사(旌忠祠), 함경북도 경성(鏡城) 화곡서원(禾谷書院) 등에 제향되어 있다.


5.  송상현의 첩

(1)김섬(金蟾)은 함흥기생 출신으로 미모와 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송상현 부사가 함경도 경성판관으로 있을 때 송상현의 첩이 되어 동래로 따라왔다. 동래성 전투 때에 송상현이 조복을 가져가는 것을 보고, 여종 금춘(今春)과 함께 관아의 담을 넘어 송상현 곁에 달려갔다가 왜적에게 사로 잡혔다. 그 뒤 사흘 뒤까지도 꾸짖는 소리가 그치지 아니하자 왜적에게 살해되었다. 사후 충북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동래부사송상현충렬사 동문 밖에 별도 사당이 만들어져 있으며, 송상현의 묘 옆에 묻혀있다

(2) 송상현의 또 다른 첩 이양녀는 김섬보다 젊은데, 동래성 전투에서 왜적들이 사로잡아 범하려 하자 그들을 달래어 거절하였다. 왜인들이 절부로 칭찬하고, 일본에 끌려갔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은 이양녀를 후시미 성에 살게 하고, 일본인 부녀들의 스승으로 삼아 풍기를 지도하게 했다. 일본인 부녀 중에는 뒷날 에도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처도 있었는데, 임진왜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과 화해하는데 그 처가 큰 조력을 하였다 한다. 마침내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왔고, 송상현 부사의 정 본가인 청주에서 만나 손잡고 통곡했다 한다


6.손상현에 대한 후대 평가

성격이 치밀하고 준비성이 많았다고 전한다. 왜구가 쳐들어올 것을 미리 대비하여 동래성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어 복병을 숨기기 좋은 여건을 조성함과 동시에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성이 보이지 않게 위장을 하고 성문 밖에는 능철과 마름쇠를 깔아 왜군의 보병과 기병에 대비하였다. 또한 기와를 뜯어 기왓장 마저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도록 하는 등 동래성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절대적인 숫적열세를 이기지 못해 동래성은 함락되었다.



7.올드코난이 생각하는 송상현

과거 학창시절 국사 시간에 임진왜란을 배울 때 송상헌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짧았다. 왜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도로만 설명이 되었다. 이는 단기간에 동래성이 함락되고 전사를 해버렸기에 업적을 남길 수 없던 상황이니 그 정도로 밖에 묘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송상현이 1591년(선조 24년)에 동래부사로 임명이 되었는데, 만일 전쟁 발발전 최소 3년 전에 부임을 했더라면  송상현의 치밀한 성격에 분명 그 이상의 대비책을 내 놓았을 것이다. 왜적에 대한 연구를 할 시간도, 병사들을 훈련시킬 시간, 성을 제대로 방비할 시간과 물자 그리고 인력 등이 턱 없이 부족했다.


송상현에게 특히 아쉬웠던 것은 시간이 너무 부족했는 것이다. 만일 그에게 충분한 시간과 지위를 주고 대비를 하게 했더라고 임진왜란 초기 정세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럴 능력과 자질을 갖춘 인물이었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던 상황에서 송상헌은 물러서지 않고 죽음으로 맞섰고 그의 용기는 후세에 귀감이 되어 마땅하다. 조선 선조는 신립이 아닌 송상현을 믿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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