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전]성삼문(成三問, 1418년 ~ 1456년 6월 8일) 요약
충청남도 출신 조선 전기 문신, 사육신의 한 사람. 세종대왕 시대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본관은 창녕이다. 성승(成勝)의 아들이며, 성달생의 손자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13회나 찾아가 왕래하며 그로부터 정확한 음운(音韻)과 언어 연구를 배워오고,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하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기여하였다. 1450년 어린 세손을 부탁한다는 세종의 유지를 받들다가 세조 찬위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을 주관하였으나, 신숙주, 정인지 등이 세조의 편에 서고 김질 등이 밀고함으로써 실패하고 만다. 생육신인 성담수, 성담년은 그와 6촌간이며 이기, 이행 등은 외종질이다. 그의 남계 친족은 모두 몰살당했고, 외손 박호의 후손, 외손 엄찬의 후손과 유자미의 며느리가 된 손녀딸의 후손만이 현전한다. 성종 때부터 복권 여론이 나타났으나 숙종 때 가서 복권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이후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 추앙받게 된다.
충절의 상징 사육신 성삼문(成三問)은 사실 단종에 충성했던 인물이 아니라, 절대왕권에 반대했던 신권주의자이며 혁명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삼문하면 충절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고 있고, 그렇게 배웠다. 하지만, 성삼문은 임금(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이 아닌, 절대 왕정에 반대했던 혁명가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내용을 정리해 본다.
1.우선 계유정난 당시 성삼문의 행동을 살펴본다.
1453년 (단종 1년) 단종이 즉위하고 그해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과 김종서등을 죽이고 군력을 잡게 된다. 수양대군은 집현전 학사들을 포섭하기 위해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등 집현전학사 36명과 함께 성삼문을 집현전 관원으로서 직숙(直宿)한 공이 있다고 하여 공신의 칭호를 주게 되는데 모두들 순번으로 축하연을 베풀었지만 성삼문은 수치로 여기고 혼자만이 연회를 베푸는데 참여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2. 세조의 왕권 강화에 부정적이었던 성삼문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으로부터 양위를 받는식으로 즉위하자 성삼문은 이를 찬탈로 여겼다. 성삼문은 예방승지로서 국새(國璽)를 안고 통곡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세조의 집권과 권력 장악에 이르는 과정에서 보여준 세조의 왕권 강화 정책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 성삼문은 이때부터 단종복위운동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받은 녹봉은 월별로 표시하여 취하지 않고 집 근처의 곡간에 별도로 쌓아두고 손도 대지 않았다. 그는 단종 복위 운동을 계획할 때 절친한 친구였던 신숙주에게 참여를 요청하였지만 신숙주는 비현실적이라며 참여를 거절했다. 이후 성삼문은 단종 복위 거사를 도모할 때 '비록 신숙주는 나의 평생 벗이긴 하나 죄가 무거우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영리한 신숙주는 자신을 위협할 세력을 보낼 것을 미리 감지하고 은신해 있었다.
3.단종 복위운동과 실패
성삼문과 집현전 출신 관료들과 그 주변 무인들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 운동이 조심스럽게 전개되었다.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 박중림(朴仲林), 박팽년, 유응부, 권자신(權自愼), 금성대군, 이개, 유성원, 윤영손(尹鈴孫), 김질(金礩) 등과 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세웠고 세조의 반정에 반대하여 외부로 나가거나 사퇴한 전직 관료들과도 연락하였다.
1456년(세조 2) 6월 명나라 사신이 한성부에 도착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향응을 베풀기로 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기회로 삼아, 명(明)나라의 사신이 왔다가 돌아가는 송별연회 석상에서 왕의 운검(雲劒, 큰 칼을 들고 왕을 시위하는 것)을 맡은 성승과 유응부로 하여금 세조와 의경세자 부자 및 한명회·정인지·권남 등 일파를 없애버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연회 당일, 세조는 갑자기 자리가 좁으니 운검(雲劍)은 그만두라고 지시하였다. 이 운검은 임금이 정좌한 앞에 큰 칼을 들고 서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도총관으로 있던 성승(成勝:성삼문의 아버지)과 유응부가 운검으로 내정되어 그 자리에서 처치하기로 한 것이었다. 유응부는 그대로 하려고 주장하였으나 성삼문이 극구 말려서 후일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이에 같이 모의하던 김질이 거사가 탄로날 것을 두려워해 전부터 이를 알고 있던 자신의 장인 정창손의 권고와 회유로 이를 세조에게 이를 밀고하였고 성삼문은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의금부에 체포, 투옥되었다.
4. 최후
1456년(세조 2) 6월 체포된 성삼문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신숙주를 배신자, 반역자라며 꾸짖고 고집을 꺾지 않는 기개를 보였다. 6월 8일 성삼문은 성승, 이개, 하위지, 유응부, 박팽년, 박중림, 김문기, 박쟁(朴崝) 등과 함께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다.
성삼문의 일가는 멸족을 당했다.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을 비롯해 동생 성삼빙, 성삼고, 성삼성과 아들 성맹첨(孟瞻), 성맹년(孟年), 성맹종(孟終) 등 남자는 모조리 살해당해 혈손이 끊기고 조부 성달생의 묘는 훼손되었고 그의 아내와 딸은 박종우의 집 노비로 분배되었고 다른 딸들은 관비가 되었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이미 박씨와 엄씨 집으로 시집 간 두 딸만이 화를 모면하였다. 그 외에 그의 가까운 일족으로 당숙 성희 등은 유배되었다. 성삼문 외 거사 관련자 70여명은 각각 혹형, 처형, 유배 등을 당했고 그 관련자 500여 명도 처형당했으며 부녀자들은 관비나 기생, 공신의 여종, 첩으로 분배되었다.
5. 사후
거열형에의해 찟겨진 성삼문의 시신은 조선 8도에 돌려졌고, 이후 김시습이 성삼문의 시신과 일가족의 시신 일부를 수습하여 노량진에 매장하였다. 이 묘는 후에 누군가 비석을 세워 ‘성씨지묘’라 하였다. 팔도로 보내진 성삼문의 시신 중 한쪽 다리 부분은 충청남도 연산군 은진 양촌리(현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 58)에 안장되었다. 이후 비석이 없던 논산의 묘소는 숙종 때 가서 비석과 신도비가 세워지고 사당이 세워져 제향되었다.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그의 부모 묘소 근처에도 성삼문의 유품을 동리 선비들이 묻고 제사를 지내던 가묘가 전한다. 그의 유품을 모신 묘소 근처에는 1668년(현종 9년) 송시열의 문인이자 관찰사로 왔던 민유중이 추모표를 세우고, 뒤이어 숙종때 우암 송시열이 묘소의 실전을 막기 위해서 친필로 쓴 유허비가 세워졌다.
6.조선 후기 충절의 상징이 된 성삼문
성삼문의 충절을 기리는 움직임은 사림 집권 후 계속되었다. 김종직, 조광조, 홍섬, 이이, 김집, 송시열 등이 그의 충절을 논했으며, 사육신의 복권 여론을 주청했으나 실패했다. 남효온(南孝溫)은 자신의 저서 〈추강집 秋江集〉에서 그를 비롯하여 단종복위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6명의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겼다.
성종 때 사림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복권 여론이 나타났다.
그 뒤 중종 때 조광조 등 사림이 집권하면서 다시 복권 여론이 나타났으나 기묘사화로 사림이 몰살당하면서 다시 수그러들었다. 이후 숙종 때 다시 노론 계열에 의해 복권 여론이 나타났다.
1691년(숙종 17년) 사육신의 관직이 복구될 때 관작이 복구되었고, 노량진 사당에는 민절(愍節)이라는 사액을 내려졌다.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에 있는 그의 옛집은 녹운서원(綠雲書院)이 되었다.
영조 시대에 들어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충문(忠文)의 시호를 받았다.
1791년(정조 15)에는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으며, 노량진 민절서원, 의절사(義節祠), 영월의 창절서원(彰節書院), 홍주 노은서원, 논산의 사당, 의성의 학산 충렬사(鶴山忠烈祠), 창녕 물계세덕사(勿溪世德祠), 연산(連山) 충곡서원(忠谷書院), 충청남도 공주의 동학사 숙모전(東鶴寺 肅慕殿) 등에 6신 및 단종 때의 순절신들과 함께 배향되었다.
7. 성상문이 남긴시
(1) 죽기전 남긴 시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굶주려 죽을진들 채미를 먹는 건가
비록에 부새엣것인들 그 뉘 땅에서 났다니
(2) 청구영언에 남은 시
이 몸이 주거 가서 무어시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第一峯)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야 이셔,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3) 영해당(詠海棠)
子固不能詩(자고불능시) / 그대는 본래 시를 짓지 못하나니
不能亦何傷(불능역하상) / 짓지 못하니 어찌 마음 아프겠는가
我愛柳中郢(아애유중영) / 나는 유중영을 좋아하니
夜不喜薰香(야불희훈향) / 밤에도 향기를 기뻐하지 않노라
8. 후대의 평가
후일 남효온의 사육신전 등을 통해 성상문은 충절, 절의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성상문을 절의의 상징으로 여기는 시각은 중종 때 조광조 일파가 집권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숙종 때의 송시열, 김수항 등은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을 충절과 절의의 상징으로 추앙하였다. 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계속되었다.
성삼문은 특히 절친한 친구이면서 서로 상반된 길을 간 신숙주와 비교가 되는데, 신숙주가 현실과 업적괄 실리를 생각한 인물이라면 성삼문은 이상과 대의를 중시했다. 성삼문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지만 신숙주는 단종 복위를 비현실이며 자신과 관계가 없는 일로 봤다. 신숙주는 살아서 부귀영화를 누렸고, 성삼문은 죽어서 명예를 남겼다.
9. 올드코난이 생각하는 성삼문.
학창시절부터 늘 충절의 인물로 배워온 성삼문은 분명 대의를 위해 목숨을 던진 훌륭한 선비다.
이 점은 요즘 철새같은 정치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단지,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성삼문을 단종에게 충성을 했던 충절의 인물로 보기 보다는 세조라는 독재자에 반대하는 즉, 왕권이 아닌 신권을 위해 목숨을 내 던지 혁명가로 봐야 하지 않을까하는 것이다.
이는 과거 정도전이 꿈꿨던 일이기도 하며, 이후 조선은 중종 반정을 거치면서 훈구를 대신해 사림(사대부)이 권력을 잡으면서 조선은 강력한 왕권국가가 아닌 신권이 왕권을 견제하는 국가체제로 가게 된다.
성삼문이 조선 중기 이후 많은 사림들에게 충절의 상징이 된 것도 사실 이 때문인 것이다.
성삼문이 단종 복위를 했다는 자체보다는 세조라는 절대 왕권을 추구했던 임금에게 대항했기에 이에 반대했던 사림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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