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를 기록한 조선실록에 따르면 명나라의 장수 마귀는 이순신, 정기룡, 한명련, 권율을 조선 제일의 장수로 꼽았다고 기록한다. 정기룡은 당시 나이가 30대초반의 젊은 장수였다. 수많은 장수들을 놔두고 그를 꼽은 것은 장수로 뛰어난 그의 재능을 인정한 것이다. 정기룡에 대해 알아본다.
명나라 장수 마귀도 인정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젊은 명장 장군 정기룡 (鄭起龍)
1.출생 및 가계
정기룡(鄭起龍, 1562년~1622년)은 1562년 명종 17년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에서 몰락한 양반 집안인 증좌찬성 정호(鄭浩, 본관은 진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곤양 정씨(昆陽鄭氏)의 시조로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 영조때 시호는 충의(忠毅), 아명은 무수(茂壽).
2.탄생과 이름에 얽힌 일화
(1)탄생: 전설에 따르면 정기룡 장군의 어머니는 홍역에 걸려 출산 중 죽게 되는데, 가족이 염을 하던 중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기가 있는 것을 보고 어찌할 줄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살기가 느껴지더니 사흘 후 어머니는 사망하고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바로 정기룡이었다 정기룡은 태어날 때부터 우렁찬 울음 소리를 내고 하늘엔 무지개가 떠 마을 사람들은 영웅이 탄생한 것이라 믿었다고 전한다.
(2)이름: 정기룡 장군의 본명은 정무수엿다. 정무수가 과거를 보러 서울로 떠나게 되는데, 당시 임금인 선조가 꿈에 종각에서 용이 자고 있었다. 잠에서 깬 선조는 종각에 있는 사람을 데려오라 명했는데 그가 정무수였다는 것이다. 무과 시험에서 무용이 출중한 정무수에게 선조는 친히 기룡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전한다.
3.관료생활
1580년 선조 13년 고성에서 향시에 합격하고, 1586년 무과에 급제했고 1590년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립의 휘하에서 일하였고, 다음 해 훈련원봉사가 되었다.
4.임진왜란
31세가 되던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는데, 처음 참여한 전투는 역사적인 참패를 기록한 용인전투였다. 당시 극소수밖에 참가하지 못한 경상도 병력 중 유일하게 전과를 올린 군관이 정기룡이었다. 4개월 뒤 상관인 경상우방어사 조경을 따라 종군, 실질적으로는 첫 전투로 볼 수 있는 거창에서 기병 수십기를 거느리고 왜군 500여명을 격파하고 금산 전투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필마단기로 구출한 뒤 1592년 9월에 곤양의 수성장이 되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는데 크게 기여한다. 이때부터 정기룡은 삼국지의 "조자룡"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상주 목사 김해의 요청으로 상주 판관이 되어 상주성을 탈환하고, 이후 진주 목사 김시민을 도와 진주성 부근에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주둔하여 왜군을 견제함으로써 진주대첩에도 다소 기여했고 1593년 전공으로 회령부사에 승진되었고, 그 해 왜적에게 왕자를 내준 반역자 김수량 등 16인을 효수했다. 1594년에는 상주목사가 되어, 통정대부에 올랐다. 정유재란 때에 고령에서 적 장수를 생포하고 병마절도사가 되어 일본군이 철수한 성주, 합천, 초계, 의령 등 여러 성을 탈환한다.
5.사후
1617년에는 삼도수군통제사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오른다. 1622년 통영 진중에서 병사했다. 상주 충렬사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6.유적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금흔리에 묘가 있고 경북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상촌 마을에 사당인 '경충사'가 있고 중평리 당산골 진양 정씨 사당 아래쪽 100m지점이 정기룡 장군의 생가가 있었던 곳인데 지금은 밭이 되어 있고 생가 뒤쪽에 있던 대밭이 약간 남아 있다.
7.오해
당시 최고의 공을 세운 장군을 ‘선무 1등 공신’이라고 하며 이순신, 권율, 원균 등 3명이다. 그 다음이 선무원종1등공신으로 여기에 정기룡 장군이 포함된다. 얼핏들으면 비슷한 단어지만 ‘원종’이 들어가 있다. 간혹 여기에 착오를 일으켜 정기룡은 선무1등 공신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8.평가
정기룡은 임진왜란 당시 뛰어난 활약을 하기는 했지만, 대전투를 직접 지휘하지는 못했다. 당시 그의 나이가 30대 초반이었고, 바다는 이순신, 육지는 권율, 의병은 곽재우였던 상황에서 이들과 공적을 논하기에는 조금 부족하기는 하다.
하지만, 그의 군사적인 재능과 용맹은 당대에서 충분히 인정을 받을만큼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군을 비웃던 명나라 장수도 그를 인정했을 정도다.
단지, 그의 공적은 부풀린 경향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60전 전승이라는 기록은 과장된 것이다.
그의 공로를 인정해야 되지만, 성웅화 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그리고, 정기룡이 1622년 만 60세로 사망했는데, 1636년 병자호란때 살아있어 조선의 군을 책임지고 있었다면 능히 이를 막을 능력이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정기룡은 임진왜란 당시에는 젊었고, 병자호란에는 없었다.
정기룡이 역사에 더 크게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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