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이순신을 모함하고 원균을 명장이라 우겼던 윤두수 (尹斗壽) 생애와 평가

올드코난 2015. 4. 13. 22:26
반응형

최근 KBS 사극드라마 징비록에 임진왜란이 본격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등장인물 중 윤두수에 대해 잠시 알아본다. 아마 국사 시간에 윤두수와 윤근수가 형제 정승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봤을 것이다. 30년전 내가 학창시절은 박정희 유신과 전두환 군부독재의 연장선이었는데 이들을 지지해 어른 대접을 받은 극우주의자 윤치영의 9대조가 바로 윤두수였다. 윤두수에 대해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해 본다.

이순신을 모함하고 원균을 명장이라 우겼던 무책임한 정승 윤두수(尹斗壽) 생애와 평가


1.출생과 가계

오음 윤두수(尹斗壽, 1533년~1601년)는 1533년 윤변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앙(子仰), 호는 오음(梧陰), 시호는 문정(文靖). 윤두수보다 20여세 연상의 이복 형인 윤담수와 윤춘수가 있었고, 아래로는 친동생인 윤근수가 있었다.

사육신의 인척으로 고조부 이후로 높은 벼슬을 역임하지 못했지만, 윤두수와 그의 동생 윤근수가 정1품 벼슬까지 올라가면서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아버지 윤변은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이르렀으나 후에 아들들의 현달로 영의정에 추증된다. 본처에게서 담수와 춘수를 얻었으나, 본부인을 잃고 후처를 얻어 두수와 근수 형제를 보았다. 그러나 아버지 윤변은 일찍 사망한다. 서인이면서 서인 중 몇안되는 이황학파 사람이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고 성수침(成守琛)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묵암 성혼을 만나 평생지기 친구가 되었고 이때의 영향으로 후에 붕당이 형성될 때는 서인을 택하게 된다. 그 뒤 이중호(李仲虎)의 문하에도 출입하면서 수학하다가 안동 도산의 이황(李滉)의 문하가 된다.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한 다른 동문인 박승임, 유성룡 등은 동인이 되나 그는 서인을 선택하게 된다. 친척이 되는 원균과도 친밀했다.


2.명종 시대 관료 생활

1555년 3월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고, 생원이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 수학했고 1558년 문과 식년시에 을과 17등위로 급제 승문원에서 일하게 되었고, 이후 예문관검열, 홍문관정자, 저작, 병조 좌랑, 사간원 정언, 이조 좌랑, 이조정랑이 되었다.

1563년 이조정랑에 재임 중 이량(李樑)이 그의 아들 정빈을 이조좌랑에 천거한 것을 박소립, 기대승 등과 함께 반대하였다. 이에 그해 8월 대사헌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다. 이때 이감은 그가 박소립, 이문형, 허엽 등과 파벌을 만들고 부박하게 선동한다며 탄핵했지만 심의겸이 이감이 이량의 당여라고 공격하여 대호군으로 전임되면서 사태가 수습되었다. 그해 9월 영의정 윤원형, 우의정 심통원 등의 상계(上啓)로 무죄임이 밝혀진 뒤 수찬에 다시 서용(敍用)되었다.

그 뒤 사헌부장령을 거쳐 수찬, 이조정랑, 의정부 검상, 사헌부 장령, 이조좌랑, 도감 낭청 등 삼사의 요직을 역임한 뒤, 명종 말엽 윤원형, 심통원 등의 외척들을 탄핵하여 몰락시켰고, 그 뒤 사복시정, 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사인·사헌부장령·성균관사성·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내고, 1565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천거로 부응교에 임용된 뒤 1566년 1월 동부승지, 우부승지를 거쳐 우승지를 지냈다. 이때 사람을 살해한 종실(宗室) 경양군(景陽君) 이수환(李壽環) 사건의 위관으로 참여했고 경양군의 형량이 감형되자 형을 두번 감하는 것이 부당하다며 탄핵했고 이후에도 계속 경양군 부자의 처벌을 청하여 성사시켰다.

1566년 8월 좌부승지, 윤 10월 우승지를 거쳐 1567년(명종 22) 자전이 살아있는데도 경솔하게 상례를 논했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명종이 무마시켰다. 그해 3월 형조참의를 거쳐 4월 다시 우승지가 되었다가 명종의 임종을 지켰다.


3. 선조시대

1567년(선조 즉위년) 11월 대사간, 1568년(선조 1) 8월 우승지 등을 지냈다.

1574년 8월 문과의 고시관의 한명으로 과거 시험 주관에 참여하였고, 9월 대독관(對讀官)에 임명되었다. 9월 병조로부터 함부로 정계(停啓)했다는 이유로 탄핵당했다. 1575년의 을해당론으로 동인과 서인이 나뉘게 되자 그는 동문인 김효원 등을 따르지 않고 이이, 심의겸, 성혼을 따라 서인에 가담하였다.

1576년(선조 9) 7월 사간원대사간에 발탁되었다. 이듬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로 선발되어 연경에 다녀왔다. 귀국 후 승정원도승지가 되었으나 이후 이종 사촌동생인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옥사에 동생 윤근수와 함께 연좌되어 1579년 3월 파직당했다.

얼마후 1579년 복직되고 그해 대사간 김계휘(金繼輝)의 주청으로 다시 기용되어 연안부사(延安府使)가 되었다. 1581년 3월 황해감사의 서장(書狀)에 의하여 재령군수 최립(崔岦) 등과 함께 구황(救荒)을 잘하였다 천거받고 선조로부터 옷 한벌을 상으로 하사받았다. 이후 한성부 좌윤·오위도총부 부총관·형조참판을 역임하고, 1587년 6월 통정대부 수전라도관찰사(通政大夫守全羅道觀察使)를 지냈다.

그해 7월 전라도관찰사 재직 중 우후를 무단으로 잡아들여 벌했다가 대간의 탄핵을 당하고 추고받았다. 1588년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4. 기축옥사 관련

1589년 호조판서를 거쳐 평안감사(平安監司)가 되고,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대동계 사건이 확대되어 기축옥사가 터지고 서인이 동인을 제거하고 집권하자 다시 대사헌으로 발탁되어 내직에 돌아왔다. 그 뒤 호조판서가 되었다가 홍순언, 황정욱 등과 더불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종계(宗系)를 변무(辨誣)하고 돌아왔다. 1590년 종계변무에 성공한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관에 서훈되고 해원군(海原君)에 봉하여졌다. 이후 형조판서(刑曹判書), 대사헌, 호조판서(戶曹判書) 등을 지냈다.

1591년 1월 사헌부대사헌, 2월 호조판서가 되었다. 대사헌 재직 중 왕세자 책봉 문제로 벌어진 동인과 서인 간의 당파싸움인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이산해 등과 함께 신성군을 지지하기로 했으나 광해군을 지지하는 문제로 선조의 진노를 사서 호조판서로 임명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 윤근수와 함께 삭탈관직되어 회령으로 유배를 갔다. 그 뒤 동인계열의 계속된 탄핵으로 배소가 옮겨져 홍원으로 이배되었다. 그해 10월 공이 적지 않다는 왕명으로 근도로 이배되었다가 11월에 방면되었다.


5.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어 피난가는 선조를 호송하여 어영대장(御營大將)과 5월 우의정, 약방 도제조, 좌의정으로 연달아 승진한다. 이때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자는 홍순언 등의 주장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며 조선만의 힘으로도 능히 일본의 침공을 저지할 수 있다며 평양성 사수를 주장한다. 임진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울과 개성을 연달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한 일본군의 공격으로부터 평양을 사수하려 했지만 패하고 만다.(1차 평양성 전투)

패전 소식을 들은 선조는 명나라에 망명 요청을 전달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윤두수는 급히 쫓아와 선조의 말고삐를 잡고 ‘필부의 경솔한 행동’이라며 극언을 서슴지 않으며 부디 망명 요청을 철회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어 함흥피난론이 나왔으나 물리치고 의주행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는데, 얼마후 함흥이 함락되었다. 그러나 의주에 도착한 선조가 월경을 준비하자 상소를 올리고 직접 막는 등 선조의 요동(遼東: 랴우둥) 피난을 막았다. 1593년(선조 26)에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를 겸하게 되고, 1595년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뒤 판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1594년 9월 윤두수는 군사를 이끌고 거제(巨濟)에 머물고있는 왜적을 몰살시키려 했다가 계획이 누설되어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윤두수는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95년초 판중추부사로 복직하였다.


6. 정유재란과 원균 후원

윤두수와 원균은 인척관계였다. 그점이 작용해서인지 임진왜란 중 원균과 이순신이 대립할 원균의 손을 들어주었다.(당파때문만이 아니다) 여기에 동생 윤근수와 함께 원균은 고금에 없는 명장이라고 치켜세운다.

1597년 선조 30년 일본이 조선을 재침공한다.(정유재란) 이때 선조는 이순신을 불신하고 있었던 상황으로 1597년 1월 27일 당시 판중추부사였던 윤두수는 "위급할 때는 장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순신은 파직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고, 결국 이순신 장군은 파직되고 국문까지 받게 된다.

정유재란 당시 영의정은 유성룡(柳成龍)이었지만 이듬해 파직되고 윤두수는 좌의정에서 영의정에 이르지만 대간의 계속되는 탄핵으로 사직하고 남파(南坡)에 물러났다.


7. 최후

1597년 판중추부사를 거쳐 전쟁이 끝난 다음해 1599년 의정부영의정이 되지만 동인들이 반대로 곧 사직하고 영돈녕부사로 전직되었다가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이후 부원군 자격으로 정사에 출입하다. 1601년에 병사하였다.

사후 1605년(선조 38) 선조의 어가를 의주까지 호종한 자들을 포상할 때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관에 추서되었다.


8. 평가

서인들은 평소 온화하고 화평하였지만 직언을 아끼지 않았고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국가적 위기 극복에 노력했다고 평가를 한다. 관료로서는 일을 잘한 편이다.

반면, 임진왜란 당시 그가 보여준 행적은 비난이 되고 있다.

선조실록 82권, 29년(1596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11월 7일(기해) 3번째 기사에 이런 내용이 있다. “선조가 원균은 어떠한 사람인가하고 묻자, 윤두수가 말하기를 원균은 소신의 친족인데, 신은 오랫동안 그 사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윤두수가 원균의 인척임을 밝힌 내용인데, 젊은 시절에는 충분히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충분히 짐작된다.

그리고, 서인이었던 윤두수는 임진왜란 당시 동인의 지지를 받는 이순신(李舜臣)을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친척인 원균을 비호하며 그를 삼도 통제사에 앉히는데 직접적인 역할을 했음이 사료에 남아있다.


9. 올드코난이 생각하는 윤두수

우선, 당시 관료들에 비해 윤두수가 유능한 인재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그의 행동은 소신보다는 아집이 강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1차 평양성 전투에서 무모하게 패배를 불러왔고, 선조와 더불어 피란을 같이 다니기는 했지만, 당시 전쟁으로 고통받는 민심에 대한 업적은 그리 없다. 

선조에게 충성을 했을지는 몰라도 백성을 위한 선정과 넓은 시야를 가진 인물은 아니었다.


특히, 사사로이 원균을 옹호한 정도가 아니라, 이순신을 파직하게 만들고 원균에게 수군을 맡김으로 칠천랑 해전에서 사실상 조선 수군이 전멸하게 만든 원인이 그에게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를 그저 당시 서인과 동인들의 세력다툼으로 볼 수 없는 것이, 당시 군은 물론 남해(전라도) 지역의 민심이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선조의 질투심에 윤두수가 편승을 한 것이고. 이전부터 윤두수는 선조에게 원균을 명장이라고 적극 추천을 했기에 선조가 원균을 대안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선조가 이순신을 쉽게 버릴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정리하면 윤두수가 원균을 선조에게 최고의 명장이라고 추천하고 선조는 마침 이순신에 대한 불신이 있던 상황에서 원균을 의지하게 만든 것이다. 만일 윤두수가 객관적으로 원균의 장수로서 부족함을 밝혔어도 선조는 끝내 이순신을 내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 수군을 전멸시킨 원균을 이순신, 권율과 더불어 선무 1등 공신으로 만드는데 앞장선것도 선조의 의중만은 아니었다. 여기에 윤두수가 일익을 담당한 것이다. 의병장 곽재우 등 많은 공을 세운 장수와 의병장 대신 인척이라는 이유로 끝까지 원균 편에선 윤두수는 선조에게는 충신이었을지 모르지만, 역사의 죄인으로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윤두수는 동생 윤근수과 더불어 형제 정승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후손들은 영광을 누렸지만, 이들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본 의병과 백성들이 많았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원균에 대해 옹호하는 자들이 윤두수의 영향 혹은 그 후손들과 연관된 자들이 많은데 윤두수는 학문과 왕은 알아도 백성과 역사는 몰랐던 인물이며 서인이라는 소속 당파의 목소리와 자신에게 유리한 말만했던 자였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윤두수는 서인이다. 최초의 붕당에서 동인을 몰아내고 서인들이 권력을 잡았고 이후 선조실록을 만든 것이 서인 집권 세력이었다. 같은 서인인데도 실록에는 윤두수에 대해  후하게 쓰지 않았다. 그의 부패한 점도 실려있다. 승자(서인)의 편에서도 윤두수는 싫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되면 조선왕조실력 선조 편을 확인해 보기를 바란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글에 공감하신다면 SNS (트위터, 페이스북)로 널리 널리 알려 주세요. ★ 글의 오타, 하고픈 말, 그리고 동영상 등이 재생이 안되는 등 문제가 발견 되면 본문 하단에 댓글로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