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조선 태종(이방원)의 정비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생애와 평가

올드코난 2015. 11. 18.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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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가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등장인물 중에 훗날의 원경왕후 민씨가 등장했는데, 개인적으로 원경왕후하면 KBS사극 ‘용의 눈물’에서 최명길이 연기했던 모습이 가장 먼저 떠 오른다. 원경왕후에 대해 가장 잘 표현한 배우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그럼 원경왕후 민씨에 대해 정리해 본다.

남편을 왕으로 만든 댓가는 멸문이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조선 태종 이방원의 정비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생애와 평가


1.원경왕후 요약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년 7월 29일 (음력 7월 11일) ~ 1420년 8월 18일 (음력 7월 10일))는 여흥부원군 문도공 민제(驪興府院君 文度公 閔霽)의 둘째 딸로,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개경 철동에서 태어났다. 조선 태종(太宗)의 왕비,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모후. 별호는 정비(靜妃), 시호는 창덕소열원경왕후(彰德昭烈元敬王后). 성격이 담대하고 괄괄한 여장부로 알려져있다.

남편 태종이 왕이 되는 데 큰 역할을 했지난 태종에 의해 친정이 멸문당한다. 조선 왕조에서 정희왕후, 문정왕후와 더불어 가장 정치적인 왕비로 꼽힌다.


2.태종을 왕으로 만들다.

훗날 태종이 되는 이방원은 이미 왕이 되려는 야망이 컸다. 단지,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자식된 마음에 망설이고 있었을뿐이다. 이런 이방원을 부추기고 용기를 준 이가 원경왕후 민씨였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태조가 몸져 누워있을 때 민씨는 이방원에게 무기를 주며 반정을 독려했다고 전해 진다. 결단력이 있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당시에도 자신이 창을 들고 나가서 남편과 함께 싸우다 죽겠다고 일갈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2번의 왕자의 난을 거쳐 왕위에 오른 태종 뒤에는 원경왕후 민씨가 있던 것이다.


3.몰락한 친정

하지만, 민씨가 간과한 것이 있다. 태종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던 인물이었다. 이전 자에게 혈육이나 친척은 경계의 대상이며 친정 또한 그냥 둘리가 없다는 것을 민씨는 미처 예견하지 못했다. 절대 권력을 추구하던 태종에게 권세를 누리려는 민무구·민무질 형제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여기에 원경왕후 민씨와 갈등도 있었고, 훗날 태종의 자신이 왕이 되었을 때 외척에 의해 국정이 농락되는 것을 염려한 점도 있었다.

결국 태종은 민무구·민무질 형제를 제주도에 유배시켰다가 1410년에 이들을 사사(賜死)시키고, 민씨의 아버지 부원군 민제는 1408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1416년 3남 민무휼과 4남 민무회가 세자 제 (당시 양녕대군)에게 외가를 잘 부탁한다는 말이 일파만파로 번지며 태종은 이들을 유배시킨다. 그리고 얼마 후 민씨가 태종의 후궁 효빈 김씨와 그녀의 소생 경녕군을 학대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분노한 태종은 민씨를 중전에서 폐위시키는 대신 민무휼, 민무회 형제를 교살시키고 만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원경왕후 민씨는 4남 3녀중 차녀로 위에 맏언니가 한명 막내 여동생 한명이 있었다. 그리고 남동생이 넷이었는데, 네 명 모두 태종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 형제자매는 우애가 있던 것으로 알려져 원경왕후 민씨의 가슴에는 큰 한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4.말년과 최후

1418년에 세자 제가 폐위되어 양녕대군에 책봉되고 충녕대군이 세자에 책봉되는데 원경왕후 민씨는 이를 끝까지 반대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그 해 태종이 세자 도(충녕대군 훗날 세종대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고 민씨도 왕대비가 되어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로 존호가 올려졌다. 이후 1420년 조선 세종(世宗) 2년에 수강궁 별전에서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능은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인릉 내에 위치한 헌릉(獻陵)에 있다. 남편 태종과 쌍릉을 이루고 있다.



5.올드코난의 생각

남편을 왕으로 만들고 자신의 집은 멸문을 당했다. 

역사에 이런 파란만장한 여인도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원경왕후 민씨의 행적들을 보면 태종의 결정은 조선이라는 나라 전체를 봤을때는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여장부 민씨와 능력과 야심까지 갖춘 처남 민무구·민무질 형제가 조선의 권력을 좌지우지할 상황까지 갈 여지는 분명히 있었다. 태종의 사후에 이들이 국정을 휘어잡았을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비록 태종의 왕권 강화가 백성들을 위함은 아니었지만, 역사적으로 외척들의 세도정치가 국가에 더 큰 화를 초래했다는 것을 보면, 이들 민씨 형제들의 처형은 불가피했다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태종이 민씨 집안을 그대로 두었다면 세종대왕은 정치적으로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민씨의 입김과 그들 집안은 그만큼 영향력이 막강했었기때문이다

반면, 남편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원경왕후 민씨 입장에서 남편은 자신과 친정을 배신한 파렴치한 인물로 여겨졌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민씨의 한은 한 개인의 아품이었을 뿐이다.

원경왕후에게는 미안하지만, 민씨의 집안보다 국가가 더 중요하다.

나는 태종의 편을 들어 주겠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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