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혼여성 월리스 워필드 심프슨(Wallis Warfield Simpson)과 결혼을 하기 위해 왕위를 남동생 조지 6세에게 물려주고 에드워드 8세에서 윈저 공으로 신분이 바뀐 사건으로 세기의 로맨스로 알려진 이들 에드워드 8세와 심프슨 부인의 삶은 화려했지만,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이들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본다.
왕위를 버리고 심프슨 부인의 세기적인 로맨스를 이룬 주인공 에드워드 8세(Edward VIII), 윈저공 히틀러 지지자였다? 로맨스로 가려진 이들 부부의 실체를 알아 본다.
1.에드워드 8세 요약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의 국왕 겸 인도의 황제(영어: King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and Emperor of India) 에드워드 8세(영어: Edward VIII, 1894년 6월 23일 ~ 1972년 5월 28일)로 본명은 에드워드 앨버트 크리스천 조지 앤드루 패트릭 데이비드 윈저(영어: Edward Albert Christian George Andrew Patrick David Windsor)로 재위기간은 1936년 1월 20일~ 1936년 12월 11일이다.
에드워드 8세는 1894년 6월 23일 조지 5세의 아들로 태어나 1913년 군에 입대하여, 총사령관, 보병장 등을 거쳤다. 1916년 예편 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했고 1919년 교사, 약제사, 육군교관, 연방행정관, 라디오 뉴스 해설자, 국방행정관 등으로 일했고 1926년 에든버러 대학총장, 1932년 해군장관, 1934년 병원 의사가 되고 1936년 영국의 왕이 되지만 그해 1936년 12월 11일 사퇴하고 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했다. 이후 세계적인 명사로 살다 1972년 급성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2. 심프슨 부인과의 로맨스
월리스 심프슨 부인은 미국 출신의 이혼녀였고 에드워드 8세는 왕위 계승순위 제1순위의 후계자였다. 이들의 만남은 이미 왕실과 정가에서는 알려진 사실이고 문제는 이들의 결혼을 영국에서는 인정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왕에드워드 8세는 영국 왕이 된지 만 1년도 되자 않아 동생에게 양위하고 물러난다. 그리고 이들은 결혼을 하게 되는데 월리스 심슨과의 결혼 소식은 기념비적인 세기의 로맨스로 전 세계인들의 관심을 받게 되고 지금까지도 회자가 되는 신데렐라 같은 이야기로 전해진다.
3.유부였던 심프슨
심프슨은 이혼녀임에는 분명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쳐 모르는 사실이 있다. 심프슨 부인이 에드워드8세와 사랑에 빠졌을 당시 심프슨은 2번째 결혼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혼 소송중이기는 했지만, 분명 유부녀였다. 1936.10.27. 2번째 남편 어니스트가 간통을 저질렀다는 사유로 공식 이혼을 하게 되고 1936.12.10. 에드워드8세는 양위를 선언, 다음해인 1937.6.3. 정식 결혼을 하게 된다. 심프슨이 영국 왕비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도 2번의 이혼과 유부녀 신분으로 교제를 했기때문인 것이다.
4.왕의 자질도 관심도 없던 에드워드8세
당시 자료를 보면 에드워드8세는 대중들의 기대는 매우 컸음에도 정작 본인은 왕으로서의 삶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1년도 안되는 보위 기간 동안 대내외의 서류를 검토하는 것도 싫어했다고 한다.
5. 히틀러를 지지했던 윈저공과 심슨 부인
문제는 이들의 사랑은 로맨틱했을지라고, 이들의 삶 자체가 존경스럽지는 않다는데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에는 나치 독일을 방문해 히틀러와 나치 당원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는데, 이들 부부는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상황에서도 히틀러를 지지했다고 알려졌다.
훗날 윈스턴 처칠은 이렇게 말했다. “이들 부부는 그들 자신은 사랑이었겠지만, 영국에게는 위기였다.“
6.마무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원저공과 심프슨 부인의 로맨스는 동화와 같은 이야기로만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삶을 들여다 보면, 이들은 왕위를 버린 것이 아니라, 능력과 자질이 부족했기에 감당할 수 없었던 에드워드8세와 허영심이 컸던 심프슨 부인이 마음이 맞아 벌어진 불륜이 결혼까지 이어진 것이지, 아름다운 로맨스까지는 아니었다. 특히, 이들 부부는 현실 인식이 매우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나치와 히틀러를 지지한 것은 히틀러에게 속았다기 보다는 선전과 화려한 볼거리에 쉽게 현혹되는 어리석음과 허영심이 이유였던 것이다.
단지, 이들의 사랑과 패션은 지금도 큰 영향을 남겼는데, 윈저공과 심프슨 부인의 패션은 당시에 큰 유행이었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대중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마음은 있지만, 정작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몰랐던, 오로지 볼거리와 가십거리 밖에는 없는 이들 부부를 동경한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씁슬하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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