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을 한 왕비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생애 평가

올드코난 2015. 12. 13.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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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1418년 12월 8일 (음력 11월 11일) ~ 1483년 5월 6일 (음력 3월 30일))는 세조의 왕비로 시호는 자성흠인경덕선열명순원숙휘신혜의신헌정희왕후(慈聖欽仁景德宣烈明順元淑徽愼惠懿神憲貞熹王后)이다. 조선 최초로 대왕대비의 칭호를 받았고, 1469년부터 1476년까지 손자 성종 대신 섭정을 한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왕후이면서, 후에 문정왕후, 정성왕후, 순원왕후와 더불어서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가장 강력한 정치를 한 인물이었다. 윤씨에 대해 정리해 본다.

조선 세조의 왕비이며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을 한 왕비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생애 평가


1.출생 및 가계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는 1418년 12월 8일 (음력 11월 11일) 충청남도에서 태어났다. 파평부원군 정정공 윤번(坡平府院君 貞靖公 尹璠)의 딸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증손자인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는 그의 오빠 윤사분의 증손녀로 종증손녀였으며, 문정왕후와 인종의 후궁 숙빈 윤씨는 남동생 윤사흔의 후손들이었다.


2.수양대군(세조)와 혼인

윤씨는 11세에 수양대군과 혼인을 하는데, ‘송와잡설’에 의하면 원래 윤씨의 언니가 수양과 결혼할뻔했었다. 감찰상궁과 보모상궁이 윤씨의 언니를 보러 집에 왔는데, 윤씨가 어머니 뒤에서 숨어서 이들의 이야기를 듣던중 감찰상궁의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 언니 보다 더 비범하고 자태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로 인해 윤씨는 수양대군과 결혼을 하게 되면서 운명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3. 계유정난, 왕위 찬탈

남편 수양은 능력도 있었고 권력욕이 강했다. 권람과 한명회를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한 수양은 계유정난(1453.10.10.)을 일으키는데, 이때 망설이는 수양대군에게 갑옷을 입겨주며 용기를 불어 넣어준 사람이 정희왕후 윤씨였다. 평소 조용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과감한 결단력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1455년 수양은 조선의 7대왕 세조로 즉위를 하고 윤씨는 왕비로 책봉된다. (2년후 단종은 사약을 받고 목숨을 잃게 된다.)


4. 아들 예종(조선 8대임금)의 단명

1468년 세조 14년 52세 나이로 세조가 사망하고, 뒤를 이어 당시 19세였던 예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예종은 차남이었다. 장남 의경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둘째인 예종이 임금이 된 것인데, 문제는 예종 역시 몸이 좋지 않아 1년2개월만에 죽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단종의 저주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참고로 예종 시대는 수렴청정을 하지 않았다. 당시 19세로 성인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예종은 짧은 치세동안 개혁정치를 하려 했는데 이는 당시 훈구파인 한명회와 신숙주는 물론 정희왕후 또한 지지를 하지 않아 독살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한다.(사실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5.손자 자을산군(성종)이 임금이 된 이유

예종의 후사로 예종의 부인 안순왕후 한씨의 아들 제안대군이 순서가 맞지만, 정희왕후가 반대를 한다. 당시 4살이었던 제안대군이 너무 어리다는 것이 이유였다. 정희왕후가 선택한 사람은 먼저 죽은 장남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이었다. 여기에는 논란이 있는데 의경세자의 첫 아들인 월산군은 당시 16세로 어리지도 않고, 원칙적으로도 문제가 없었다. 그럼에도 13세의 자을산군을 선택한 것은 월산군의 처가는 힘이 없었지만 자을산군은 당대 최고의 권세가 한명희의 사위였다는 점이다. 든든한 배경이 있는 자을산군이 보위에 오르는 것이 안정적이라는 생각에 아직은 미성년자이이게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할 수 있다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보이다.

결국 예종의 뒤를 이어 제9대 임금 성종(成宗, 1457~1494, 재위 1469~1495)이 보위에 오른다.


6.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

조선 시대 여성들은 남성들과 맞대면을 할 수 없었다, 만일 불가피하게 대면을 할 상황이라면 수렴을 드리우고 마주해야 하는 것에서 수렴청정이 유래가 된 것이다.

이 수렴청정이 처음 실시된 것이 성종시대였다. 그리고 정희왕후는 대왕대비 자격으로 조선 최초로 수렴청장을 한 왕후가 된다.


7.섭정

정희왕후는 수양대군 시절부터 정치적인 조력자로 인정을 받았던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성종시기에는 사실상 임금과 같은 권한을 갖고 본인의 뜻대로 정치를 펼치는데, 여기에 그녀의 정치적인 감각이 있었기에 성종 시기 안정기를 이루게 된다. 훗날 성종이 성군으로 칭송을 받게 된 것은 정희왕후가 제 역할을 잘했기때문으로 여겨진다. 섭정시기 종친들을 권력에서 배제하는데, 왕실 종친의 관료등용을 법으로 금지하게 된 것이 이때부터인 것이다. 그리고 불교를 믿으면서도 숭유억불 정첵을 시행한 유교적인 태도를 보였고, 여러 가지 대민 정책을 펼치게 된다.


8. 물러날 때 물러나다.

성종이 20세가 되던해 7년간의 섭정을 끝내게 되는데 여기에는 어떤 사건이 있었다. 세조 시대에 공을 세워 세조에게 죽을 죄를 저질러도 세 번을 용서하라는 글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살인죄를 쓴 이 사람에게 윤씨는 세조의 유언대로 살려주라하고 성종은 당연히 사형을 시켜야 한다고 반박한다. 결국 성종 뜻때로 처형되고 이 일을 계기로 윤씨의 섭정에 반대하는 글이 나돈다. 윤씨는 과감하게 섭정을 끝내기로 결단을 내린다. 한명회가 반대하고 나섰지만 윤씨는 물러났다. 이 점이 윤씨를 높게 보는 이유다.


9.사후

윤씨가 섭정에서 물러난 이후 성종은 사림파를 대거 등용해 훈구파를 견제하면서 조선 전기 안정기를 구가하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공과 과도 있지만, 성종 시대는 평화로웠던 시대였다. 정희왕후 윤씨는 이후 1483년(성종 14년) 음력 3월 30일 66세로 세상을 떠난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위치한 광릉(光陵)으로, 남편 세조의 능과는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10.자손

장녀(첫째) : 세희공주 (금계필담)

장남(둘째) : 추존 덕종대왕(德宗大王, 1438~1457).

차녀(셋째) : 의숙공주(懿淑公主, 1442~1477)

차남(막내) : 제8대 예종대왕(睿宗大王, 1450~1469, 재위 1468~1469)

손자 제9대 성종대왕(成宗大王, 1457~1494, 재위 1469~1495).

증손자 제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재위 1494~1506)

증손자 제11대 중종대왕(中宗大王, 1488~1544, 재위 1506~1544) - 이하 생략


11.평가

권력을 쥔 여성들의 최후나 후대의 평가는 좋지 않다. 하지만 정희왕후에 대해서는 비판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좋은 평가가 많다. 한명회와 신숙주같은 당대 권신들과 함께했다는 점은 비판일수는 있지만, 훈구파를 무시할 수 없던 시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그녀의 한계이기도 했다. 이후 성종이 성인이 되어 물러난다는 용단을 내렸을 때 반대를 무릅쓰고 과감히 떠났다는 점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권력을 쥔 자들이 순순히 자신의 자리를 내놓은 예는 많지 않다. 특히 권력을 잡은 여성들은 특히 악착스런 면을 보였는데, 그리인해 망국이 원인이 된 사례가 많다.

정희왕후 윤씨는 그런 점에서 칭찬을 받을 만한 왕비였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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