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조선 첫 왕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생애

올드코난 2015. 12. 10.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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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는 조선 태조의 둘째 부인으로 태조의 정치적 조언자로 지략 또한 뛰어나 조선 개국에 큰 공헌을 했다. 공식적으로 조선의 첫 왕후가 되지만, 사후 태종에 의해 그녀의 명예는 물론 아들들이 모두 목숨을 잃게 된다. 조선 건국의 최대 공로자이면서 사후 불명예스런 존재가 되어 버린 비운의 왕비 신덕왕후에 대해 정리해 본다.

조선의 첫 왕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보령택주, 삼한국대부인, 현비)의 생애


1.출생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1356년 7월 12일(음력 6월 14일) ~ 1396년 9월 15일(음력 8월 13일))는 황해도 곡산 출신으로, 조선 태조(太祖)의 계비 별호는 현비(顯妃), 시호는 순원현경신덕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 상산부원군 강윤성(象山府院君 康允成)과 진산부부인 강씨(晉山府夫人 姜氏)의 딸로 본관은 곡산(谷山)이다. 친정 친가의 성씨(康氏)와 친정 외가의 성씨(姜氏)가 비슷하나 음이 다르다. 친정어머니는 진산부부인 강씨(晉山府夫人 姜氏)로 신덕왕후의 외가는 강씨(姜氏)로, 그녀의 외가는 강이식의 후손이다.


2.가계

신덕왕후의 조상은 호경과 강충으로 고려 태조 왕건의 외가쪽 선조였다. 강충의 셋째 아들 강보전의 후손으로 그의 8대조 인 고려 고종 때의 문하시중 신성부원군(信城府院君) 강지연(康之淵)의 대에 다시 가문을 일으켰다.

강지연의 6세손인 할아버지 강서(康庶)가 상산부원군에 봉해지면서 곡산강씨의 시조가 되었고 7대손인 친정아버지 강윤성은 문하찬성사를 지냈고, 사후 증 영돈녕부사에 추증되고 상산부원군에 추봉되었다. 강씨의 숙부 강윤충은 태조의 큰아버지이자 환조의 형 이자흥의 사위였다. 이런 인연으로 이성계의 계비가 된다.


3. 이성계와의 결혼

이성계는 고려말 최고의 무훈을 떨치는 장수였지만, 그에게는 든든한 개경의 호족들과의 연줄이 필요했다. 그래서 강씨와 정략 결혼을 하게 된 것인데, 이들이 결혼할 당시 강씨는 이성계보다 20살 가량 연하였다.


4. 조선 개국 공로

1392년 음력 3월 이성계가 해주에서 말을 타다가 낙마를 한다. 해서 벽란도에 머무르게 되는데, 당시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라는 정몽주는 이때 이성계를 제거하려 한다. 이를 눈치챈 강씨는 생모인 한씨의 무덤에서 여묘살이를 하던 이방원(李芳遠)을 급히 해주로 보내 이성계를 개경으로 불러내 위기를 모년한다. 이후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였을 때도 대신을 함부로 죽였다며 크게 꾸짖던 이성계의 분노를 무마시킨 것도 강씨였다. 야사에서는 강씨의 판단력으로 이성계가 정몽주를 제거할 수 있다고 전한다.

강씨는 조선 개국에 있어서 이성계를 가까이서 도운 최고의 공로자였고 조선의 개국한 1392년(태조 1년) 8월 25일(음력 8월 7일) 조선의 첫 왕비로 현비(顯妃)에 봉해졌다.


5.왕세자 문제

조선의 왕비가 된 강씨는 자신의 낳은 아들이 보위에 오르기를 원했다. 정도전과 정치적 연합을 해 자신의 둘째 아들 의안대군(방석)을 왕세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장남도 아니고, 후처 소생의 차남이 왕세자가 된다는 것을 신의왕후 한씨의 자손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특히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가장 격분했다.


6.사망

1396년 9월 15일(음력 8월 13일) 40세라는 매우 젊은 나이로 신덕왕후 강씨는 세상을 떠났다. 신덕왕후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태조는 몹시 애통해하며 명복을 빌기 위해 능 옆에 조그만 암자를 지어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향차를 바치게 하다가 다시 1년 간의 공사를 거쳐 흥천사(興天寺)를 짓기도 했다. 태조는 흥천사가 완공되자마자 그 때부터 능과 절을 둘러보는게 일상사가 되었다. 능과 절을 다 돌아본 뒤 신덕왕후와의 소생들과 함께 저녁시간을 보내고, 신덕왕후의 능에 재를 올리는 절의 종소리가 나야만 비로소 침소에 들었다. 뿐만 아니라 수라 때에도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불경 소리를 들은 후에야 비로소 수저를 들어 식사를 하는 등 정성을 보였다.



7.제1차 왕자의 난과 자식들의 죽음

신덕왕후가 죽은지 2년 후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다. 의안대군을 포함한 신덕왕후의 두 아들 방번과 방석은 모두 이때 죽음을 당하고 사위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도 살해당한다. 딸 경순공주는 여승이 되었다(1407년 사망). 사실상 대가 끊긴 것이다.


8. 후궁으로 격하된 강씨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후 강씨의 능인 정릉(貞陵)을 파괴하고 이전을 명한다. 1409년(태종 9) 당시 사대문 밖 경기도 양주 지역이던 지금의 서울 성북구로 이장하고 묘의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명했다. 정자각은 헐어버린 뒤 1410년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정자각 석물을 광통교를 보수하는 데 사용하게 해 백성들이 이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종묘의 제례에서도 신덕왕후에게 올리는 제례도 왕비로서가 아닌 후궁의 예로 올렸다.


9.복권

사후 300년 가까이 지난 1669년(현종 10년) 8월 30일(음력 8월 5일)에야 지위가 왕비로 복위되고 신주를 종묘로 들여왔고 황폐하게 버려진 정릉이 복구되었다. 또한 9월 14일(음력 8월 20일)에는 존호를 순원현경신덕(順元顯敬神德)으로 추존하고, 1899년(광무 3년) 양력 12월 19일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로 최종적으로 추존되었다. 현재 능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 위치하고 있다.


10.영향

태종이 강씨에 대한 분노는 서얼 금고령과 적서 차별로 이어지는데 서얼 금고령과 적서 차별제도는 성종 때 가서 세부조항을 성종이 직접 지어 반포함으로써, 재가녀(재혼 여성) 자손 금고령과 함께 하나의 규정으로 정착되고 이는 조선사회를 지나치게 혹독한 신분사회로 만든 원인중 하나가 된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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