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태종(이방원)의 장자방 하륜(河崙) 생애와 평가

올드코난 2015. 12. 16. 12:13
반응형

고려 말 정몽주, 남은, 권근 등과 함께 신진사대부를 형성했고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참여했다. 정도전과 함께 한양 천도를 적극 주장했고, 정안대군 이방원을 도와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 1등에 책록되었던 하륜은 이방원에게는 장자방이라는 극찬을 받았었다. 하륜에 대해 정리해 본다.

적당히 때가 묻은 유능했던 관료 조선 태종(이방원)의 장자방 하륜(河崙) 생애와 평가


1.출생과 가계

하륜(河崙, 1348년 1월 22일(1347년 음력 12월 22일) ~ 1416년 11월 24일(음력 11월 6일)) 자는 대림(大臨) 또는 중림(仲臨), 호는 호정(浩亭),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진양(晋陽), 1347년(고려 충목왕 3년) 순흥부사(順興府使)를 지낸 하윤린(河允潾)과 진주강씨(晉州姜氏)사이에서 태어났다. 하공진의 후손으로, 하식(河湜)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식목녹사(拭目錄事)를 지낸 하시원(河恃源)이고 어머니 진주강씨는 증 찬성사 강승유(姜承裕)의 딸이다.


2.고려시대

초은 이인복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뒤이어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선배인 정도전, 정몽주, 조준 등을 만나고 이때 하륜은 10년 연상인 정몽주를 무척 어려워했으나 정도전은 나이를 따지지 않고 그와 가깝게 지냈다. 또한 후에 정몽주의 문하생 중의 한사람인 권근과도 가깝게 지냈다. 1360년(공민왕 9년)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 국자감의 유생이 되었다.

이때 그는 스승 이인복의 동생인 이인임과도 가까이 지냈다. 스승인 이인복은 자신의 아우들 중 이인임, 이인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하륜은 이인복의 문인이면서도 이인임과 가깝게 지내, 한때 이인임의 대표적인 인척으로 지목될 만큼 가까웠다.

1365년(공민왕 14년) 문과에 급제하고 스승 이인복의 아우 이인미(李仁美)의 딸과 결혼한다. 1367년(공민왕 16년) 춘추관 검열(檢閱)ㆍ공봉(供奉) 1368년(공민왕 17년)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는데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신돈의 문객인 양전부사(量田副使)의 비행을 탄핵했고, 신돈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짐을 들어 신돈을 공박하다가 지영주군사로 좌천되고 신돈에 의해 파직 되었다.

1371년(공민왕 20년) 신돈이 사형당하자 복직되어 다시 지영주군사가 되었고, 이때에 영주목(榮州牧)을 잘 다스려 안렴사 김주(金湊)는 그의 치적을 가장 높이 평가하여 보고했다. 이어서 고공좌랑(考功佐郞)을 거쳐 판도좌랑(版圖佐郞)으로서 교주(交州)ㆍ강릉도찰방(江陵道察訪)이 되었다.

이후 우왕까지 관료생활을 하게되는데 1380년(우왕 6년) 모친상을 당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1383년 아머니의 3년 상을 마친 뒤 복직, 사간원우부대언, 우대언, 전리판서, 밀직제학을 역임했고 퇴근후에는 제자들을 가르쳤다.

1388년(우왕 14) 최영의 요동 공격을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며 비판, 적극 반대하다가 양주(襄州:지금의 양양군)로 유배되고 그해 여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이 제거되자 복직, 관작을 회복했다. 그 해 가을 영흥군 왕환(永興君王環)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그가 가짜라고 공격하였다가, 역공격을 받고 오히려 광주, 울주 등지로 추방되었다가 윤이 이초의 변이 일어났을 때 복직하고, 1391년(공양왕 3)에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었다.


3.조선 개국 참여

스승인 이색이나 동문인 정몽주, 이숭인, 권근, 길재 등과 함께 정치적 입장을 같이함으로써 초기에는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하다가 정도전 등의 권고로 권근 등과 함께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게 된다.

1392년(고려 공양왕 4년, 조선 태조 1년) 7월초 고려가 멸망하자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했다가 이성계가 즉위한 뒤 경기좌우도관찰사(京畿左右道觀察使)로 기용되어 관직에 나갔다. 이때 경기도의 부역제도를 개편,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393년(태조 2) 경기도도관찰사로 기용되었을 때 수도 천도 논의가 나오자, 정도전과 함께 계룡산 건도역사(建都役事)의 부당함을 역설하고 중지시킨다. 그리고 정도전과 함께 한양 천도를 적극 주장한다.


4.정도전과 갈라서다.

1396년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로 복직했다가 예문춘추관학사로 있을 당시 명나라 홍무제가 표사(表辭)와 표전물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시비가 일어나 표사 글을 지은 정도전을 소환하지만 정도전은 명나라에 가기를 거부하고 대신 하륜이 표전문 작성에 연루된 권근, 정탁, 노인도 등을 데리고 갔는데 이들 모두 억류되고 하륜 혼자 돌아오게 된다. 1396년(태조 5) 한성부윤으로 계품사(計稟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표전문 작성의 전말을 상세히 보고해 홍무제의 오해를 푸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표전문 문제가 제기될 때 명나라의 요구대로 정도전을 보내자고 했다가 정도전의 미움을 받아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좌천되었는데, 그 때 항왜(降倭)를 도망치게 했다 하여 정도전파 사람의 탄핵을 받고 파면, 수원부에 안치되었다가 얼마 뒤 복직, 충청도도순찰사가 되었다.


5.이방원과 손을 잡다.

관상을 볼 줄 알던 하륜은 처음에 정안대군(이방원)을 보고 장차 크게 될 인물인 것을 알았다고 전한다. 하륜은 정안대군의 장인 민제에게 이방원과의 만남을 주선해 만나게 되고 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알게된 하륜은 그때부터 이방원의 심복이 된다. 이후 하륜은 제1차 왕자의 난과 제2차 왕자의 난 당시 이방원의 최측근으로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실질적으로 계획하고 지휘해 성공시킨다.


6. 태종 시대

1400년 태종이 즉위하고 하륜은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좌명공신 1등(佐命功臣 一等)에 책록되었다. 하륜은 태종에게 스스로 창업과 수성의 방책으로 '변통'(變通)을 제시하는데 학문은 하나의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은 변화하는 현실에 맞추어 그때그때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6조 직계제(六曹直啓制)를 도입하여 각 판서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왕에게 업무를 직접 보고할 것을 주청하여 성사시켰으며, 재상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였다. 시장에서의 화폐유통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저화를 발행하게 하고 재정의 확충을 도모하고 좌주문생제의 혁파나 호패법의 실시, 신문고의 설치 등 태종 초기 많은 업적을 남기지만 사사로운 인사 청탁을 많이 받고 통진 고양포(高陽浦)의 간척지 200여 섬 지기를 개인 농장으로 착복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태종이 공신이라는 이유로 용서한다.


7. 최후

1414년(태종 14) 영의정부사에 재임명되고 1416년(태종 16년) 노환을 이유로 치사(致仕)하였다. 치사를 청하자 태종은 극구 만류하며 허락하지 않았으나, 고집을 꺾지 않고 나이가 많고 병이 들었음을 이유로 거듭 치사를 청하여 허락받고 물러났다. 태종은 친히 교서를 써서 진주의 전세 100결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하륜은 성상께서 주신 것을 어찌 감히 사사로이 쓸 수 있겠는가 하며 따로 향사당(鄕射堂)을 지어 교서를 모셔두고 전세는 동리 노인들을 위해 쓰게 하였다. 이때 향사당에는 태종이 직접 친필로 벽오당(碧梧堂)이라는 현판을 써서 내려주었다.

바로 진산부원군에 임명되어 왕명을 받아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능침을 순찰하기 위하여 함길도에 가서 봉심하고 그해 11월 6일 한성으로 되돌아오던 도중에 정평군 관아에서 죽었다. 저서에 《호정집》(浩亭集), 《삼국사략》등이 있고, 가사인 도인송도지곡, 수명명 등이 있다. 작품으로는 스승 이색의 묘지명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8.사후

하륜은 사후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하륜의 묘는 진양군(현 진주시) 미천면의 오방동(현,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 산 166)에 위치하고 진주성 내 영남포정사 왼편으로 1970년대 세운 출생지비가 있다. 묘소 주변에는 할아버지 하시원, 할머니 진주정씨, 아버지 하윤린, 어머니 진주강씨의 묘가 함께 소재해 있고 이들 묘역은 1977년 12월 28일 경상남도기념물 제41로 지정되었다.

함양 경충재, 함양 부조묘 등에 제향되었다.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에 있는 사당 경충재는 후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86호로 지정되었다. 불천지위의 은전을 받았고 경상남도 함양군에는 그의 부조묘가 세워졌다.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 441번지에 있는 하륜의 부조묘는 2004년 7월 1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56호로 지정되었다.


9.평가

하륜은 시문에 능했고 음양·의술·경전·지리에도 정통했다. 태종은 하륜을 자신의 장자방이라 칭했고 후대에도 하륜은 한나라의 장자방, 송나라의 치규(稚圭)에 흔히 비유하고는 한다. 하륜은 자신의 이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변통도 가능하며 때에 따라서는 변절이나 권모술수로 보일 수 있는 수단까지도 불사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조선 사대부들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륜은 이(理)와 인간의 본성을 하나라고 보아 인간의 본성은 선량한 것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사람마다 기질이 다르다고 파악했다. 즉 하륜은 사람을 하나로 뭉쳐서 좋다 나쁘다라고 단정하는 편협된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마다의 개성과 인품 등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10. 올드코난 생각

그의 삶이 군자였다고는 보지 않지만, 고려와 조선시대에서 관직에서 한 그의 업무 능력과, 백성에 대한 선정 등을 보면 흠은 이해 할 줄도 알며 큰 죄는 덮지 않으려는 강직함 또한 있었다. 그리고 청렴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그렇다고 백성을 수탈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하륜은 적당히 때가 묻었던 유능한 관료였다고 생각해 본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