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연산군의 할머니 인수대비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 생애와 평가

올드코난 2016. 1. 7.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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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빈이었으나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으로 왕비가 되지 못했지만, 아들이 임금이 되어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된다. 아들 성종이 또한 먼저 죽어 손자인 연산군이 임금에 오르기까지 인수대비의 권위는 대단했지만, 이후 연산군이 폭군이 되어가는 과정 또한 봐야 했다. 인수대비 한씨에 대해 정리해 본다.

성종의 어머니이며 연산군의 할머니 인수대비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 생애와 평가


1.개요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 1437년 10월 7일(음력 9월 8일) ~ 1504년 5월 11일(음력 4월 27일) 세자빈이며 덕종(德宗, 추존왕)의 왕비로 시호는 인수자숙휘숙명의소혜왕후(仁粹慈淑徽肅明懿昭惠王后)이다. 1450년(문종 즉위년)에 수양대군의 큰아들인 도원군(의경세자, 덕종)과 혼인하여 군부인에 봉작되었으며, 1455년(세조 즉위년)에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왕위로 즉위하여 한씨는 맏며느리로 세자빈이 되었지만 1457년(세조 3년) 남편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어 사가로 물러났다가 1469년에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이 왕이 되면서 왕비로 진봉되었다 1475년(성종 6년) 왕대비에 올라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되었다.


2. 가계와 출생

의정부좌의정을 지낸 서원부원군 양절공 한확(西城府院君 襄節公 韓確)과 남양부부인 홍씨(南陽府夫人 洪氏) 여섯째 딸로, 본관은 청주(淸州)다.

한씨의 아버지 한확은 당시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내면서 명나라로부터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작위를 하사받은 세도가였다. 또 한씨의 큰 고모는 명나라 제 3대 황제 영락제(성조)의 후궁이었던 강혜장숙여비(康惠莊淑麗妃)였으며, 작은 고모 역시 명나라 제 5대 황제 선덕제 선종의 후궁인 공신태비(恭愼太妃)였다. 큰고모가 영락제 사후 순사되었는데, 그의 절개를 높이 평가한다는 명목으로 명나라 선덕제는 그의 둘째 고모를 후궁으로 맞이했다. 한씨의 둘째언니는 세종의 둘째 서자인 계양군의 부인이다. 소혜왕후 한씨는 수양대군의 이복동생인 계양군의 처제였고, 시어머니가 될 정희왕후의 형부인 홍원용의 생질녀(누이의 딸)였고, 외종언니인 강녕부부인(홍이용의 딸)은 평원대군(세종의 일곱번째 왕자)의 정실이었다.

한씨의 가문은 명과 조선 양국의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있는데다가 한확이 명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하던 당시 외교관으로서 명나라의 총애를 받아 출세가도를 달렸던 것이다. 이런 집안에 시아버지가 수양대군이었으니 한씨의 배경은 역대 조선 왕비 중에서도 가장 막강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3. 세자빈이 되다.

1450년 수양대군은 정치적 입지를 넓히기 위해서 큰아들인 도원군(의경세자)과 한씨(인수대비)를 정략결혼을 추진했다. 한씨의 나이 13살에 수양대군의 큰아들 도원군과 혼인하여 도원군부인 한씨(桃源君夫人 韓氏)가 되었다. 1454년 갑술년에는 잠저에서 첫 번째 자녀인 월산군을 낳았다.

다음해 1455년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양위를 받아 즉위하고 아들인 도원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자 왕세자빈이 되었고 그해 동궁(東宮)에서 두 번째 자녀인 태안군주를 낳고, 1457년에 세 번째 자녀이며 훗날의 성종인 자산군을 낳았다.

왕세자빈 한씨는 빈틈이 없고 시부모 섬김에 극진해서 세조로부터 효부(孝婦)라는 칭찬을 들었고 두아들에게는 엄한 어머니였다. 사소한 과실만 있어도 추호도 감싸는 법 없이 정색을 하고 꾸짖어 세조와 중전 윤씨(정희왕후)는 농담 삼아 부르게 된 별명이 폭빈(暴嬪)이었다고 전한다.


4. 남편의 죽음과 사가 생활

1457년, 친정아버지 한확의 객사와 함께 남편인 의경세자(懿敬世子)가 20살의 나이로 요절한다. 연이은 불행을 안쓰럽게 여긴 세조는 한씨가 궁궐에서 살도록 허용하지만 사양한다. 시동생이 되는 해양대군(예종)이 남편의 뒤를 이어 왕세자에 책봉되면서 시아버지 세조로부터 정빈(貞嬪)의 작호를 받아 정빈 한씨(貞嬪 韓氏)가 되었으나, 을유년인 1465년에 세조가 교지를 통해 원경왕후가 세자빈이 되었을 때 정빈으로 책봉하였으므로 한씨의 작호를 수빈(粹嬪)으로 고쳤다.

세조는 한씨를 위해 의경세자 사당 옆에 덕수궁을 지어줄 정도로 아낀 며느리였다. 후에 한씨의 작은 아들 자산군이 보위에 오른후 큰아들 월산대군이 사저(덕수궁)을 물려받았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고 덕수궁이 왕궁으로 쓰이게 된다.)

한씨는 정치적 야심은 대단했던 것 같다. 당대의 권신 한명회의 넷째 딸 한씨(훗날 공혜왕후)와 자신의 둘째 아들 자산군을 혼인시켜 사돈관계를 맺고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한다.

또 권신 신숙주 등과도 긴밀하게 교류하고 이런 노력의 결과 예종 서후 한명회의 강력한 추천과 시어머니인 정희왕후의 지지에 힘입어 당시 원자였던 예종과 안순왕후의 아들 제안대군 대신 자산군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성종 즉위

시동생 예종이 재위기간 14개월만에 갑작스럽게 죽자 조정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논의가 있었다. 예종의 맏아들이 되는 원자(제안대군)의 나이가 겨우 3살 밖에 되지 않았다. 수빈 한씨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의 장인이 권신 한명회이었던 점이 강력하게 작용했고 왕실의 어른 대비 윤씨(정희왕후)와 원상 신숙주, 한명회 등의 결정으로 의경세자와 수빈 한씨의 둘째 아들 자산군이 보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바로 성종이다.

하지만, 성종은 생부인 의경세자가 아닌 작은아버지가 되는 예종의 아들로 입적하여 왕위(王位)의 대통(大統)을 이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수빈 한씨가 성종의 어머니가 아니라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 한씨가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로 성종의 법적 어머니가 되었다. 따라서 수빈 한씨는 국왕의 모후(母后)가 되는 왕대비의 자격이 아니라 왕세자의 부인으로서 지위가 세자빈에 불과했다. 하지만, 왕(성종)의 생모이므로 궁궐에 들어와 살았는데 그녀의 호(呼)를 붙여 수빈궁(粹嬪宮)이라 불렀다.


6. 인수 왕비에서 대비로.

성종이 임금이 되고 한씨에 대해서는 왕비로 추숭하느냐, 왕대비로 추숭하느냐는 논의가 벌어지는데 권신들 대다수의 의견대로 왕비로 결정된다. 수빈 한씨에서 인수왕비(仁粹王妃)가 된 것이지만, 내심은 왕대비가 되기를 바랐다.

특히, 서열 문제가 있었는데 성종의 할머니가 되는 자성대왕대비 윤씨(정희왕후), 법적 어머니이자 숙모가 되는 인혜왕대비 한씨(안순왕후), 그리고 친어머니이지만 법적으로는 큰어머니가 되는 인수왕비 한씨 중에서 왕실 서열 1위는 할머니가 되는 자성대왕대비 윤씨(慈聖大王大妃 尹氏)이지만 서열 2위가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냐 인수왕비냐를 놓고 조정에서 논의를 벌이게 되고 결국 인수왕비가 인혜왕대비의 윗전이 된다. 이는 왕비가 된 적이 없던 한씨가 왕비였던 예종의 부인 인혜왕대비 보다 더 서열이 높아진 것이다.

1474년, 성종의 의지로 생부 의경세자 의경왕(懿敬王)을 추봉(追封)하고 덕종(德宗)의 묘호를 받았다. 그로 인해 왕의 생모가 되는 인수왕비는 왕대비로 진봉되어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가 된다.


7. 최후

1494년 성종이 죽고 왕세자 융(조선 10대 임금 연산군)이 즉위한다. 인수대비 한씨는 연산군의 할머니가 되므로 대왕대비로 진봉되고 휘호가 자숙(慈淑)으로 새로이 올려졌다. 실록에는 자숙대왕대비(慈淑大王大妃)라는 명칭이 휘호를 올린 당시에만 등장할 뿐, 인수대왕대비(仁粹大王大妃)로 계속 일컬어 진다.

문제는 성종의 아들 연산군이 왕세자 시절 자신이 정현왕후의 아들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가 자신이 폐비 윤씨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폐비 윤씨를 모함해 사사(賜死)시킨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철퇴로 내리쳐 죽이고 인수대비에게 고함을 지르는 등 이상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후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하려 하자 병상에 있던 인수대왕대비가 이를 꾸짖었으나 화가 치밀어오른 연산군은 인수대왕대비의 가슴을 밀쳤다. 이에 인수대왕대비는 얼마 후 그 충격으로 갑자년인 1504년 4월 27일, 68세의 나이로 죽고 만다.


인수대왕대비는 이미 죽기 서너 달 전인 1504년 1월경에 노환으로 목숨이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 때문에 당시 연산군은 의정부의 삼정승(三政丞)과 육조의 판서들을 불러 미리 상제(喪制)를 의논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연산군은 병석에 누워있던 할머니에게 고함을 지르며 행패를 부려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조선은 유교 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나라였고, 그 중 임금에게 적용되는 가장 큰 덕목은 효(孝)이므로, 이와 같은 연산군의 행동은 패륜으로 훗날 박원종이 중심이 되는 중종반정의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위치한 경릉(敬陵)이다.



8. 사후 평가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한문과 유교 경전에 능통하여 《열녀》,《여교》,《명감》,《소학》등에서 발췌하여 엮어 《내훈》(內訓)을 편찬했다. 내훈은 조선시대 사대부 여인들의 수신서이자 당시 여성교육의 기본서가 되었다. 또 불교 옹호론자로 불교 억압 정책에 강력히 반발하였으며, 이 때문에 당시 조정의 신하들과 4차례의 격한 논쟁을 벌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금승법(禁僧法)과 그녀가 추진한 봉선사 금자경 간행 작업이다.

며느리이자 연산군의 생모가 되는 폐비 윤씨가 왕비 시절 성종의 얼굴을 할퀴는 사건으로 내쫓기고 사사되는 데에는 거의 전적으로 인수대비의 의지였다. 지나치게 유교(성리학)적인 자세로 며느리들을 대했는데, 이는 당시는 물론 후대에도 영향을 끼쳐 왕비와 후궁들은 물론 사대부 여인들에게도 경직된 자세를 갖게 만든 악영향을 준 것은 분명한다.

무엇보다 자신은 불교를 믿었으면서 다른 여인들에게는 성리학적인 삶을 강요한 것으로 보아 인수대비는 자상함은 부족하고 타인에게 특히 엄격한 인물이었다고 생각해 본다. 권력지향적인 사대부 여인이었다는 말로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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