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억울하게 죽은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廢妃 尹氏) 생애

올드코난 2016. 1. 8.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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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서 자주 듣게 되는 성종의 두 번째 왕비였고, 연산군의 어머니였던 폐비 윤씨(廢妃 尹氏)에 대해 알아 본다.


1.개요

폐비 윤씨(廢妃 尹氏, 1455년 7월 15일 (음력 윤 6월 1일) ~ 1482년 8월 29일 (음력 8월 16일)) 조선 제9대 왕 성종의 둘째부인. 장남이 조선 10대 왕 연산군이고 둘째 아들은 일찍 죽었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에 지위에 있다가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王妃)로 책봉되었으나 남편 용안에 상처를 내어 폐비(廢妃)당했다. 그러나 연산군 즉위후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왕비(王妃)의 작호가 추존되었다.


2.출생 및 가계

봉상시 판사(奉常寺 判事) 윤기견(尹起畎, 또는 윤기무, 尹起畝)와 장흥부부인 신씨(長興府夫人 申氏)의 딸로 3명의 이복 오빠와 1명의 친오빠가 있다. 본관은 함안(咸安)으로 윤관의 11대손이다. 고조부 윤희(尹禧)는 고려조에서 정순대부(正順大夫)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지냈고 증조 할아버지 윤득룡(尹得龍)은 조선조정에 처음 벼슬해 자헌대부 (資憲大夫)와 호조판서 (戶曹典書)를 할아버지 윤응(尹應)은 통훈대부(通訓大夫) 교하현감(交河縣監) 등을 지낸 명문가 여식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정희왕후(세조의 왕비)가 그녀를 훗날의 정현왕후가 되는 윤호의 딸과 함께 입궁시켜 숙의(淑儀)의 첩지를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3. 간택에서 폐비까지

윤씨는 성종 4년(1473년) 4월 15일(음력 3월 19일)에 후궁간택으로 숙의(淑儀)에 봉해졌고 성종 5년(1474년)에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가 죽자 2년 뒤 공혜왕후의 3년 상을 마치고 1476년 7월 31일(음력 7월 11일)에 숙의(淑儀)였던 윤씨를 왕비(王妃)로 삼을 것을 전교했는데, 당시 윤씨는 (연산군을) 임신하고 있었다. 8월 27일(음력 8월 9일) 왕비(王妃)로 책봉되어 3개월 뒤인 11월 23일(음력 11월 7일)에 원자를 낳아 중전(中殿)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고 윤씨의 아버지는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에 추증되고 함안부원군(咸安府院君)에 추봉되었다.

문제는 성종은 여자관계가 매우 복잡한 바람둥이라는 점이다. 흔히 윤씨는 질투심이 강하다고 전해져 오지만, 성종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 성종이 여러 후궁들과 잠자리를 하게 되면서 아직 젊은 윤씨가 화가난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다 성종과 말싸움을 벌이다 남편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이 발단이 되어 시어머니 인수대비의 분노를 샀다고 하는 전하지만 이는 공식 기록이 아니다. 실록에는 성종이 윤씨의 뺨을 때렸다고 나온다.

하지만, 성종의 다른 후궁들이 인수대비를 찾아가 윤씨를 비판하며 폐위를 부추긴 것은 사실로 보인다. 여기에는 인수대비가 윤씨를 싫어한 점이 크기 때문이다.

1479년, 윤씨는 자신의 생일 바로 다음날인 음력 6월 2일(양력 6월 21일)에 왕비(王妃)에서 폐위되었는데 폐비(廢妃)된 이후 조정에서는 원자의 생모이자 조강지처가 되는 윤씨를 다시 왕비(王妃)로 복위시켜야 된다는 상소와 시위가 끈임없이 반복되었으며, 많은 조정대신들이 파직당하거나 유배를 가게 된다.

그리고, 인수대비는 하루빨리 새 중전(中殿)을 새워야 된다는 명분으로 훗날의 정현왕후가 되는 숙의 윤씨(淑儀 尹氏)를 왕비(王妃)로 책봉시켰다. 연산군이라고 하는 비극의 씨앗을 키운 사람은 인수대비였던 것이다.


4. 죽음

조정에서는 윤씨가 폐비(廢妃)가 된 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있는 반성하는 점, 세자의 생모라는 점 등을 이유로 들어 그녀를 살려 두고자 하였으나, 숙의 엄씨와 귀인 정씨 등의 모함과 인수대비의 뜻에 의해 윤씨는 1482년 8월 29일(음력 8월 16일) 사약을 받아 사사되고 말았다. 당시 윤씨의 나이 28살이었다. 윤씨는 죽기 전 자신의 피가 묻은 금삼을 친정어머니 장흥부부인 신씨(長興府夫人 申氏)에게 "세자가 자라거든 이를 전달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5.사후

아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고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된다.

윤씨를 복위시켜야 된다고 하여 유배를 갔거나 파직당한 대신들은 연산군이 즉위 후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반대로 윤씨 폐위에 앞장 섰거나 복위에 동참하지 않았던 대신들은 무자비한 보복을 당해 1504년 갑자사화 등이 일어나게 되고 한명회, 한치형 등의 사람들이 부관참시를 당한 데 이어 그 이외의 사람들이 사사되거나 유배되었다.

윤씨는 연산군에 의해 제헌왕후(齊獻王后)에 추숭되고, 회묘는 회릉(懷陵)으로 격상되었다.

무덤은 현 위치인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신동(현 고양시 덕양구)로 이장되었고, 서삼릉 내에 위치한 회묘(懷墓)로 왕비(王妃)의 예에 따라 능으로 개장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화려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그러다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 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연산군이 그의 어머니 윤씨에게 올린 관작과 존호는 모두 삭탈되었고, 회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었다. 회묘 근처에는 후궁 묘역이 있으며, 그 중 윤씨의 묘소는 봉분이 크고 석물들이 존재하고 있다.



6. 윤씨는 억울하게 죽었다.

조선시대 초기 임금이었던 성종은 성군이었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데, 성종은 분명 능력은 있던 임금이었다. 하지만, 성종은 그나마 나았던 왕이라고 봐야지,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고 본다. 윤씨가 폐비되고 죽게 되는 과정을 보면, 윤씨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성종의 바람기와 인수대비의 지나친 권력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종은 한 여자에게 마음을 두지 못하는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을 가진 사람이었고, 어머니되는 인수대비는 중전 윤씨가 자신의 자리를 넘보는게 싫었던 것이지 사대부 여인으로서 여필종부로 윤씨를 훈계하려했다는 해석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윤씨는 나쁜 남자와 욕심 많은 시어머니를 만나 억울하게 죽어간 것이고, 이로 인해 연산군이라고 하는 조선 유일의 폭군이 탄생한 것이다. 연산군에 대한 책임은 성종과 인수대비가 져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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