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조선 최단명 7일 중종의 왕비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 생애

올드코난 2016. 2. 1.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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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비들 중 가장 짧은 7일간의 재위 후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연좌되어 폐출된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에 대해 정리해 본다.

조선 역사상 최단명 7일만에 왕비에서 폐비된 중종의 왕비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는 결국에는 중종에게 버림을 받은 것이다.


1. 가계와 출생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 1487년~1557년 12월 27일(음력 12월 7일))는 조선 중종(中宗)의 정비로 시호는 공소순열단경왕후(恭昭順烈端敬王后)이다.

좌의정 증 영의정 익창부원군 신도공 신수근(左議政 贈 領議政 益昌府院君 信度公 愼守勤, 1450~1506)과 정경부인 청원부부인 청주 한씨(貞敬夫人 贈 淸原府夫人 淸州 韓氏)의 딸로,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증조부는 황해도감사 증 영의정 거창부원군 양간공 신전(黃海道監司 贈 居昌府院君 領議政 襄簡公 愼詮)이고, 조부는 영의정 거창부원군 장성공 신승선(領議政 居昌府院君 章成公 愼承善, 1436~1502)이고 외조부는 길창부원군 익평공 권람(吉昌府院君 翼平公 權擥, 1416~1465)이다. 조선의 대표적인 명문가 여식이었다.


2. 생애

1487년 2월 7일(음력 1월 14일)에 신수근의 딸로 태어났다. 신수근은 정실인 영가부부인 권씨와 계실인 청원부부인 권씨,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단경왕후는 두 번째 부인인 한씨의 소생이다.

1499년(연산군 5년) 13살의 나이에 당시 진성대군에 봉해져 있던 중종과 결혼하여 부부인(府夫人)이 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하면서 남편 진성대군이 왕위(王位)에 오르자 그녀도 자연스럽게 왕비(王妃)에 올랐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 익창부원군 신수근이 연산군의 처남이며 반정에 가담하지 않은 관계로, 1506년(중종 원년) 9월 25일(음력 9월 9일)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왕위(王位)에 앉힌 반정세력에 의해 7일 만에 폐위되고 만다.

그녀가 폐위된 후 새로이 중종의 왕비(王妃)가 된 장경왕후가 1515년 사망하자, 담양 부사 등이 그녀의 복위를 간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복위를 반대하는 중신들에 의해 복위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단경왕후의 복위를 간한 사람들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3. 폐비 후

폐비 된후 친정으로 돌아갔는데, 친정에는 고모뻘 되는 연산군의 폐비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도 살고 있었다. 폐비된 고모와 조카가 같은 집에서 살게되었는데, 따지고 보면 중종이 연사군을 내몬 처지기에 거창군부인 입장에서는 중종이 싫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폐비라는 공통분모가 있어서인지 이 두 여인은 서로를 위로하며 지낸 것으로 보인다.


4.사후

1557년(명종 12년) 12월 27일(음력 12월 7일)에 71세의 나이에 사망하자 왕후(王后) 시부모의 예(例)에 따라 이등례(二等禮)로 초상을 치렀다. 사후 시호도 없이 폐비 신씨 혹은 신비(愼妃)라고 불리다가, 영조 때인 1739년(영조 15년) 5월 5일(음력 3월 28일)에야 김태남 등의 건의로 왕후(王后)로 복위되어 단경(端敬)이라는 시호와 함께 공소순열(恭昭順烈)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이때 그녀의 아버지 익창 부원군(益昌府院君), 어머니 권씨(權氏)는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 친어머니 한씨(韓氏)는 청원부부인(淸原府夫人)으로 격상되었다.

능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위치한 온릉(溫陵)이다.



5. 뒷 이야기

중종은 높은 산에 올라 그녀가 거처하고 있던 사가를 바라보는 일이 많았고, 그 사실을 안 그녀의 사가에서도 중종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자주 입던 붉은 치마를 펼쳐놓았다는 야사가 전해져 온다.

중종의 임종 직전에는 신씨를 궁궐 내에 들였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종실록 등에는 그녀를 폐위 할 때 중종이 크게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폐위된 이후 중종기에 그녀의 처우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어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인종이 즉위하여 그녀가 거처하는 곳에 폐비궁(廢妃宮)이라는 이름을 주고 생활에 보조를 하기 시작했다.

신씨는 아들이 없었는데, 만일 아들이 있었다면 폐비까지는 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많다.


6.중종이 버린 것이다.

7일만에 폐위가 된 것은 분명 중종의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38년동안이나 재위를 했던 중종은 박원종이 죽은 이후 임금으로서의 권한을 대부분 찾아왔다. 아주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신씨를 복위를 할 수 있었고, 신료들의 그런 움직임도 있었다. 하지만, 중종은 그리하지 않았다. 후궁도 여럿 두었고 재위기간 동안의 정치 행적을 보면 매우 음흉한 인물이었다고 보인다. 정리해 보면 중종은 신씨에 대해서는 애정이 식어 버려 최종적으로 버림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일 것이다. 신씨는 이런 중종의 본심을 알았을까, 끝까지 모르고 세상을 떠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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