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조선 선조 정비 의인왕후(懿仁王后 朴氏)의 생애와 평가

올드코난 2016. 3. 4.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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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대들에게 조선시대 임금 중 가장 싫은 혹은 무능한 임금을 꼽으라면 늘 상위권이나 1위로 선정되는 임금이 바로 조선 14대 왕 선조다. 이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에 대해 알아 본다.

조선 선조 정비 의인왕후(懿仁王后 朴氏)의 생애와 평가


1.출생 및 가계

의인왕후(懿仁王后, 1555년 5월 5일(음력 4월 15일) ~ 1600년 8월 5일(음력 6월 27일)) 박씨 조선 14대 임금 선조의 정비(正妃) 본관은 반남(潘南) 박(朴). 정식 시호는 장성휘열정헌경목의인왕후(章聖徽烈貞憲敬穆懿仁王后). 5위도총부의 수장인 도총관과 영돈녕부사 등을 역임하며 후일 영의정에 추증된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의 딸이다. 박응순은 딸이 왕비가 되었음에도 검소하고 성품이 부드러워 집에 손님이 오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이는 권력과는 거리를 둔 전형적인 선비의 모습을 갖춘 올바른 유학자로 여겨진다.


2. 선조의 정비

선조의 즉위 2년째인 1569년에 열다섯 살의 나이로 왕비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선조는 이미 한 살 연상의 공녀 공빈 김씨(광해군의 친모)와 정을 통하고 있었다. 전임왕이 명종의 3년 상이었던 시기로 선조와 공빈 김씨의 깊은 사랑이 있을 즈음에 의인왕후가 선조의 첫 정비로 궁궐에 들어 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선조는 의인왕후에게 그다지 마음을 주지 않았다.


3.선조의 여인들

의인왕후가 원래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임이었는지 선조의 외면을 받아서인지는 모르지만 의인왕후는 평생 아이를 낳지 못했다. 왕의 후사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큰 약점이 되는데, 의인왕후는 전국 각지에 원찰(願刹)을 설치하고 건봉사(乾鳳寺)와 법주사 등을 비롯한 여러 사찰에 자주 재물을 베풀었지만 끝내 자식을 얻지 못한다.

반면 공빈 김씨는 첫째 임해군에 이어 둘째 광해군까지 출산하게 되는데, 의인왕후는 이들에게 매우 잘해 주었다고 하며, 특히 광해군 출산후 산후병을 얻어 1577년 선조 10년에 17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여기서 선조의 인간미가 나오는데, 이때 선조는 인빈 김씨에게 빠져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를 외면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빈 김씨는 매우 권력욕이 강한 여인이었는데, 신분이 낮아 정비가 될 수는 없었지만, 의안군을 포함해 4남 5녀를 둘 정도로 선조의 마음을 얻었고, 이를 이용해 세력을 만들게 된다.


4. 임진왜란

정여립의 모반사건과 세자책봉 문제 등이 일어나지만, 문제는 선조가 광해군에 마음이 없었다는 데 있다. 의인왕후는 미는 광해군과 인빈 김씨의 아들 신성군을 두로 신료들은 둘로 나뉘는데, 그즈음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근데 선조는 후궁인 인빈 김씨만을 데리고 의주로 피난을 떠나 버리고 정비인 의인왕후는 선조와 떨어져 평안도 강계로 피난을 떠나게 된다. 선조에게 의인왕후는 마음에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후 한양이 수복되고 선조는 한양으로 돌아 올때도 인빈 김씨를 데리고왔지만 의인왕후 박씨는 계속해서 4년동안이나 해주에 머물렀다. 이는 의인왕후 역시 선조가 싫었기 때문일 것이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선조는 이번에도 인빈 김씨를 데리고 피난을 떠난다. 그리고 이때는 왕세자가 되었던 광해군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는데 의인왕후는 이때 병을 얻어(심신이 지쳐) 결국 1600년 8월 5일(음력 6월 27일) 4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5.사후

선조는 "투기하는 마음, 의도적인 행동, 수식하는 말 같은 것은 마음에 두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권하여도 하지 않았으니 대개 그 천성이 이와 같았다. 인자하고 관후하며 유순하고 성실한 것이 모두 사실로 저 푸른 하늘에 맹세코 감히 한 글자도 과찬하지 않는다." 고 그녀의 죽음을 칭송했지만, 이는 형식이었을 뿐이다. 선조는 의인왕후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

1604년에 휘열(徽烈), 1610년에 정헌(貞憲), 고종 대인 1892년에 경목(敬穆)의 존호가 추상되었고 능(陵)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위치한 목릉으로 선조와 계비 인목왕후와 같은 경역 내에 묻혀있다.



6.평가

의인왕후(懿仁王后)를 살아있는 관음보살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이는 그녀의 훌륭한 인품을 표현한 말이기도 하지만,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그녀의 일생이 매우 심적으로 힘이 들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남편의 선조의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아이를 낳지도 못해 왕비로서의 권위나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도 못한 의인왕후는 후궁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잘해 줌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한 마음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왕실에서 자식이 없다는 것은 큰 약점이며, 다른 후궁의 자식이 임금이 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수긍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떠나 의인왕후는 본래의 성품이 온화하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올바른 마음과 바른 행동을 보였던 왕비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자녀는 없었지만, 왕비라는 직함으로 후궁들에게 군림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를 않았다는 점은 권력에 대한 욕망은 크지 않았고, 광해군의 사람됨을 보고 세자로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의인왕후가 광해군의 후견인이 되어주면서 광해군은 훗날 임금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리해 보면, 의인왕후는 선한 마음과 바른 자세를 갖춘 왕비의 자질은 갖추었지만, 남편 선조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자식도 없어 한을 가슴에 안고 살았던 여인이었다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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