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조선 초기 탐관오리 조말생(趙末生)과 조선 최대의 뇌물 수수사건 김도련 노비소송사건 전말

올드코난 2016. 2. 2.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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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드라마 육룡의 나르샤에 조말생이 등장했다. 태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 태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세종 때까지 활동한 문신으로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탐관오리면서도 천수를 누린 인물이다. 개인적으로 무척 싫어하는 인물인데, 조말생이 어떤 인간이었는지 그리고 과연 세종은 왜 이런 인물을 썼는지 정리해 본다. (참고: 이상각의 평가, 조선왕조실록, 세종대왕 전기 등)

시대를 잘 만난 조선 초기 탐관오리 조말생(趙末生)의 조선 최대의 뇌물 수수사건 김도련 노비소송사건 전말과 의문 '세종은 과연 성군이었을까?'


1.가계 및 출생

조말생(趙末生, 1370년 ~ 1447년) 고려 공민왕 19년(1370년) 출생, 자(字)는 근초(謹初)·평중(平仲), 아호(雅號)는 사곡(社谷)·화산(華山). 본관은 양주(楊州). 아버지는 천변지이를 관측, 기록하고, 역서를 편찬하며, 절기와 날씨를 측정하고 시간을 관장하던 서운관의 책임자인 서운정 조의였다. 조말생은 어린시절부터 유학교육을 받았는데 정몽주의 문인으로 대제학과 성균관대사성을 역임했던 유학자 조용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2. 태종의 무조건적인 신임

1401년(태종 1년) 4월 9일에 치러진 증광문과에서 당대에 천재로 소문이 자자했던 이적과 윤회를 제치고 장원급제를 한다. 태종의 첫 과거에서 장원을 해서인지 조말생에 대한 태종의 신임은 대단했다. 장원에게 주어지는 종6품 요물고부사를 맡는데 요물고(料物庫)는 왕실의 미곡을 관장하는 창고(관청)였다. 이후 감찰, 정언, 헌납, 이조정랑 등의 요직을 맡게 된다.

1403년(태종 3년) 4월 명나라 영락제의 등극을 축하하는 하등극사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가 영락제 고명과 인장을 받아 돌아와 태종을 기쁘게 했고 1407년(태종 7년)에는 문과 중시에서 2등으로 급제 종4품 전농부정에 제수되고, 사헌부 장령, 직제학 등을 역임한다.

1411년(태종 11년) 1월 종3품 사헌부 집의 직에 있을 때 조강지처를 버리고 부잣집 딸에게 다시 장가들어 면직되었다 곧 복직되었는데, 유교를 중시한 조선에서 이는 매우 비난을 받을 짓이었다. 이후 조말생은 훗날의 도승지인 지신사(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오른다. 태종이 조말생에 대한 신임은 이토록 컸다.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를 하고 임금이 된 세종 역시 조말생을 주요 요직에 기용하게 되는데 1418년(세종 원년) 이조참판을 거쳐 형조와 병조판서에 이른다. 상왕으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권력을 놓지 않았던 태종은 중요 사안을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 병조판서 조말생 세 사람과 상의할 정도로 조선 초기 조말생의 위치는 확고했던 것이다. 1419년(세종 2년) 6월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후 ‘대마도는 조선 땅이며 경상도의 계림(鷄林)에 속한다.’는 서찰을 대마도주에게 전하는 역할도 맡았다.


3. 김도련 노비 소송 사건

하지만, 조말생은 태종과 세종대의 신임을 받을 정도의 능력은 있지만 전형적인 탐관오리의 행태를 보이게 되는데, 대표적인 예가 김도련 노비 소송 사건이었다.

1414년(태종 14년) 김도련이 변정도감에 노비소송을 제기하는데 당시 승정원에서 형방승지였던 조말생이 김도련 편에서 엄청난 뇌물을 받아 챙겼던 것인데, 사건 전말을 살펴보면.

김도련의 할아버지 김원룡은 양인이었던 친구 김생과 함께 함길도에 가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다. 조선이 창건된 뒤 한양에 내려와 정계 실력자들과 인연을 맺었던 김도련은 김생이 현지에서 엄청난 전답과 천여 명의 노비를 가진 갑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갈취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게 되는데 김도련은 김생이 본래 할아버지 김원룡의 노비였는데 함길도로 달아났다는 노비추쇄문서를 위조한 다음 형조에 소송을 제기했고 형방승지로 형조를 담당하고 있던 조말생은 김도련에게 뇌물을 받고 형조 관리들을 포섭해 승소를 이끌어내어 김생의 후손 426명이 억울하게 노비가 되고, 그들의 재산은 모두 김도련이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조말생은 이 사실을 교활하게 숨겨 겉으로는 청렴결백한 관리로 행동한다. 이런 조말생을 태종은 재상까지 만들려 했다.


4.드러난 진실

조말생의 죄가 드러난 것은 1422년(세종 4년) 5월, 태종이 죽고 나서 억울하게 재산을 빼앗기고 노비가 된 김생의 손자 김득경이 사건의 주모자인 김도련을 고소하면서부터이다. 당시 병조판서 조말생은 김도련에게 다시 뇌물을 받고 형조 참의 박고와 정랑 김영을 사주하여 판결을 몇 해 동안 지연시켰고 그의 아들에게는 종9품 무관직인 대부(隊副) 벼슬까지 주었다.

시간이 흘러 1426년(세종 8년) 김도련 노비소송사건을 조사하던 사헌부는 이 사건에 중신들이 깊이 개입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내사 끝에 혐의를 확보한 사헌부 관리들은 우의정 조연, 곡산부원군 연사종, 병조판서 조말생 등이 김도련에게 뇌물을 받고 그를 비호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특히 조말생이 주도했다는 것을 세종에게 고한다.

세종은 형조 참의 박고와 정랑 김영의 직첩을 회수하고 국문하고 결국 김도련이 김득경의 송사를 무력화하기 위해 중신들에게 빼앗은 노비를 뇌물로 바쳤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밝혀진 김도련의 주요 중신들에 대한 노비 증여 내역은 좌의정 이원이 4명, 우의정 조연이 15명, 곡산부원군 연사종이 10명, 병조 참의 조성덕이 8명을 받았고, 조말생은 36명의 노비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여기에 조말생이 사헌부의 수사를 방해하기 위해 증인을 협박한 정황까지 드러났는데, 조말생의 아들 조선이 사람을 풀어 대사헌의 집을 드나들던 승려 만우의 시종과 노비를 잡아 구타하고 위협하여 조말생에게 유리한 진술을 받아냈다는 사실까지 드러난 것이다.


5. 밝혀진 조말생의 뇌물 내역

사헌부에 의해 밝혀진 조말생의 뇌물은 지신사(도승지)로 있을 때 홍충에게 토지를 대가로 만호 벼슬을 주었고, 병조판서 때는 보충군 서철에게 은과 비단을 받고 대부 벼슬을 주는 등 매관매직의 회수나 대가가 매우 많았다는 사실들이 드러났다.

사헌부에서 집계한 그의 뇌물 수수 총액은 김도련의 노비 41명, 허반석의 노비 4명, 양민의 노비 3명, 홍충의 토지 2결, 허충의 토지 1결, 임우의 토지 1결, 서철의 비단과 은병 등이었다. 이를 장물로 계산하면 총 780관이나 되었다고 조사되었고 받은 이유에 대해서도 밝혀졌는데, 다음과 같다.

조말생은 양인이었던 상가와 사덕 등이 낳은 자식들을 천민이 아닌 줄 알면서도 부려먹었다. 승려인 상해와 의유 등에게 은을 받았고 형인 승려 설우가 불기를 녹인 은을 받았다. 양주 목사 송흥에게 청탁하여 그 고을 사람 임우의 군역을 면제시켜 준 다음 관직을 주고 그의 밭을 차지했다. 홍충과 허충에게 밭을 받고 관직을 주었다. 가난한 친척인 한회가 소작료를 바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토지를 빼앗았다. 온진과 순위 등의 수령에게 편지를 보내 뱃삯까지 후려냈다.

이에 대해 당시 대사헌 이승직은 ‘조말생의 죄상은 죽어도 죄가 남을 것인데 뻔뻔스럽게 조정에 들락거린다.’고 비판했다.



6. 세종의 옹호

좌사간 신포시와 집의 이견기는 조말생의 죄상을 고발하면서 이 외에도 얼마나 많은 뇌물을 받았는지 알 수 없다고 개탄했고 언관들은 조말생의 엄벌을 요구했지만 세종은 그가 챙긴 뇌물만 몰수하고 귀양 보내는 것으로만 정리하려 했다. 이에 우사간 박안신은 그를 형률로 단죄하여 선비의 기풍을 바로잡으라고 질타했고, 대사헌 권도 역시 강력한 처벌을 주청했다. “형률에 뇌물을 받은 것이 80관이면 교형에 처하게 되어 있는데, 말생의 죄는 780관이나 되니 80관의 수십 배나 됩니다. 이를 용서하고 다스리지 않는다면 뒷사람을 무엇으로 징계하겠습니까?”

하지만 세종은 조말생이 선왕(태종)때부터 조정에 복무한 지 20년이 넘었고, 그 동안 조정에서 공적이 많다는 이유로 극형에 처하지 않는다.

그러자 1426년 5월 27일, 대사헌 권도 등 사헌부 관리들이 떼로 몰려와 전대를 상고해 보니 조말생의 공적이 대단치 않다며 임금을 공박했다. 그러자 세종은 대신은 죽이지 않는다는 선대왕 때부터의 관습법을 내세웠다.

이에 관리들은 선대왕 때에는 탐오한 대신이 드물어 형벌을 가벼이 했지만, 이제는 대신들의 부정부패가 심해졌으니 형벌을 무겁게 해야 하지 않느냐고 주장하지만 세종은 끝내 극형을 반대한다.


7.솜방망이 처벌

결국 이원은 여산에, 조연은 황해도 수안에, 연사종은 강원도에, 조말생은 회인을 거쳐 황해도 평산 땅으로 유배되고 조말생에게 협조한 박고와 김영은 곤장형을 받고 파면되었다. 또 사건에 연루된 예조참판 하연, 경창부 소윤 이숙치, 이조정랑 조극관, 판내자시사 김타, 첨지통례문사 임인산, 호조 정랑 이효례, 지승문원사 황보인, 부정 남지, 지안산군사 김이공, 지의천군사 윤간, 정주목사 남궁계 등이 조정에서 쫓겨났지만 이 사건의 주범 김도련은 노비 132명만을 압수당했을 뿐 다른 형벌을 받지 않았고 김생의 후손들은 신분을 회복하지 못하고 계속 노비로 남게 된다.


8. 복귀

1428년(세종 10년) 4월, 세종은 유배지 평산에 있던 조말생을 사면해주고 2년 뒤 1430년(세종 12년) 4월에는 회수했던 직첩까지 돌려주자 또 다시 조정이 시끄러워졌다. 우사간 변계손과 신포서가 조말생의 재임용을 영구히 막으라고 청하지만 세종은 듣지 않는다. 2년 뒤 1432년(세종 14년) 12월 8일에 세종은 조말생을 동지중추원사에 제수하고 이에 사간원에서 부당함을 상소하고, 이견기의 11차례 상소에 이르기까지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연일 조말생의 관직을 거둘 것을 간청한다.

그해 12월 15일 조말생은 자신도 조금은 부끄러웠는지 스스로 사직을 청하지만 세종은 물리치고 12월 17일 권도를 내세우고 이틀 동안 대간들이 전원 사직 시위를 펼쳤지만 세종은 대간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북방을 안정시키다

당시 함길도 백성들은 여진족의 잦은 침입과 명나라 사신이 행차할 때마다 공물을 징발당하는 등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세종은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여진족을 섣불리 정벌하다 국경이라도 침범하면 명나라와 외교적 마찰이 빚어질 수 있었다. 조말생은 태종 때부터 병조판서로 8년을 복무하고 대마도 정벌에 참여했던 경험 명나라와의 외교를 담당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해서 군사작전 수행능력이나 외교력이 뛰어난 인물로 세종은 조말생을 적임자로 보고 1433년(세종 15년) 1월 19일 세종은 조말생을 함길도 관찰사에 임명한다.

조말생은 함길도에 부임하자 명나라 조정을 설득한 후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 북방을 안정시키는 공을 세우게 되고 조말생에 대한 비난은 누그러 진다.

하지만, 1436년(세종 18년) 세종이 조말생을 재상급인 의금부 제조에 임명하자 대간은 격렬하게 반발하지만 세종은 조말생을 끝까지 비호한다. 대간들이 집단사직원을 내고 20여 일이나 항의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10. 도를 넘은 세종의 조말생 편애

1438년(세종 22년) 3월 25일 조말생의 막내아들 조근이 문과 한성시에 급제하는데 예문관 관리들이 아버지 조말생의 전과기록을 빌미로 급제자 등록을 이틀이나 지연시키는데 당시 예문관 대제학이 조말생이었다. 조말생은 세종에게 억울하다 호소하고 의금부의 조사를 이끌어내 예문관 관리들을 벌하게 된다.

그해 10월 세종은 조말생의 아들 조찬을 정6품 사헌부 감찰에 제수했다. 당시 법에 의하면 뇌물 수수의 죄를 범한 관리의 자식은 관리로 임용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세종은 이를 무시해버린 것으로 사헌부에서 극력 반대했지만 세종은 듣지 않았다.


11. 기록은 남는다.

이런 세종의 신임에 자신감을 얻은 조말생은 사헌부에서 한동안 조찬의 서경(署經)을 미루자 상소를 올려 부당함을 따졌고 자신에게 씌워진 비리 혐의가 억울하다고 호소한다. 이는 자신의 비리 기록을 지우겠다는 뜻이었는데, 세종은 사헌부에 조찬의 서경을 명하지만 기록자체를 없애는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

1441년(세종 23년) 10월 20일 조말생은 다시 세종에게 상소를 올려 자신의 뇌물수수 사건에 증거조사가 충분하지 않았고 자백한 사실도 없고 노비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니 장물조항을 적용한 것은 잘못이라며 재심을 요구하지만 세종은 듣지 않는다. 이는 조말생을 용서하고 일은 맡겨도 비리 기록은 남기겠다는 뜻이었다.

태종과 세종대에 온간 편의를 받으며 요직을 차지했던 조말생은 1446년(세종 28년) 1월 24일 영중추원사로 임명되고 다음해 1447년(세종 29년) 4월 27일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강(文剛)이다.


12. 올드코난 생각

오랫동안 나에게 고민거리를 안겨준 인물이 바로 조말생이었다. 왜냐하면 조말생을 떠올릴때마다 세종은 과연 성군이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조말생이 능력은 있는 인물이지만 과연 그를 대체할 인물이 없었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면, 세종대에는 유능한 인재들이 매우 많았다. 오히려 조말생보다 더 청렴하고 유능했던 인재들 틈에서 유독 조말생을 편애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세종의 진짜 속마음은 잘 모르겠지만, 조말생의 행적은 전형적인 탐관오리였다. 유능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자들에게 요직을 주기 시작하면 결국에는 국정이 문란해지는 것이다. 세종대 이후 조선이 큰 발전을 못하고 고리타분한 성리학 이념에 빠지게 된 것은 세종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조말생은 단호하게 처벌했어야 했다. 

그러지 못했기에 세종에게 조말생은 큰 오점으로 남았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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