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조선 인조 정비 인렬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 인열왕후)는 현명한 왕비였다.

올드코난 2016. 3. 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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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이 폐위되고 능양군이 인조로 즉위를 하고 왕비가 된 인조의 정비 인렬왕후 한씨는 소현세자와 효종의 친모가 된다. 현명한 여인이었던 한씨에 대해 정리해 본다.

현명한 왕비, 조선 인조 정비이며 효종과 소현세자의 어머니 인렬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 인열왕후) , 만일 10년을 더 살았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1. 개요

인렬왕후 한씨(仁烈王后, 1594년 8월 16일(음력 7월 1일) ~ 1636년 1월 16일(1635년 음력 12월 9일)) 원주읍내 우소 출생, 조선 16대 왕 인조의 정비, 소현세자와 제17대 왕 효종의 모후. 정식 시호 정유명덕정순인렬왕후(正裕明德貞順仁烈王后)이며, 본관은 청주 한씨(淸州 韓氏). 한준겸의 넷째 딸로 한준겸은 선조가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한 유교7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으로 홍문관 부제학, 호조판서,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 등을 역임했다. 


2. 능양군과 결혼

1610년에 17세의 나이로 한 살 연하였던 능양군(綾陽君)과 가례를 올리고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에 봉해졌다. 능양군의 첫 부인으로 장남 소현세자 왕(昭顯世子 汪, 1612~1645), 차남 효종(孝宗, 1619~1659, 봉림대군), 3남 인평대군 요(麟坪大君 㴭, 1622~1658), 4남 용성대군 곤(龍城大君 滾, 1624~1629) 등이 있었고 이 외에 두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지만 일찍 요절했다. 다산을 한 것은 부부 금실은 좋았다는 것이고 무엇보다 인품이 좋았다는 평가가 많다. 당시 임금은 광해군이었고, 광해군은 능창군을 포함해 여러차례 역모 사건으로 일으켜 왕실 종친들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능양군(인조) 또한 마찬가지였다.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때 인렬왕후(청성현부인)는 궁녀들에게 동양아치 중전마마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다고 한다. 이런 가난한 삶에 대한 경험이 그녀가 왕비가 되어서 인조의 훌륭한 조언자 역할을 하게 된다.


3.왕비

1623년 4월 11일 남편 능양군이 인조반정을 일으키고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된다. 이때 인렬왕후가 어떤 사람인지는 상궁 한보향에 대한 처분에서 알수 있다. 광해군의 정비였던 폐비 유씨는 궁녀들에게 아주 잘 대해주었는데, 그때를 잊지 못하는 궁녀들이 인렬왕후에 불만을 갖고 속으로 무시를 하는 하고 있던 시기에 한 궁녀가 한보향이 폐주(광해군)을 잊지 못하고 눈물로 옛일을 생각한다고 고자질한다. 하지만 인렬왕후는 고자질한 궁녀를 오히려 매로 다스렸고, 상궁 한보향은 의리가 있는 사람이라 위로 하고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을 맡긴다. 이 일로 많은 궁녀들에게 왕비로서의 권위를 어느 정도 얻게 된다. (완전히 얻지는 못했다.) 그리고 인렬왕후는 인조가 광해군을 죽이지 못하도록 막는데 큰 공헌을 한다. 인조와 반정을 했던 자들은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인렬왕후는 인조를 만류했고, 결국 광해군은 목숨을 건지게 된다. 이 외에도 기민운동 등을 통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려는 노력과 인조에게 조언을 하면서 인조 즉위 초반에 매우 든든한 조력자이면서도 조언자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4.최후

하지만, 1636년 1월 12일(1635년 음력 12월 5일), 6번째 아들을을 낳았는데 곧 숨졌고 산후병을 얻은 인렬왕후 나흘 뒤인 1636년 1월 16일(1635년 음력 12월 9일) 창경궁 여휘당(麗輝堂)에서 43세로 사망한다.

능묘는 장릉(長陵)이고, 인을 베풀고 의를 따르는 것을 인(仁), 공로가 있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열(烈)이라 하여 인렬(仁烈)의 시호를 받았는데 원래 인조는 명헌(明憲)의 시호를 원했지만 대사헌 김상헌이 시호를 정하는 일을 담당 관원이 아닌 군주의 의향대로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바꾼 것이다. 전호는 숙녕(肅寧), 능호는 장릉(長陵). 후일 정유(正裕)의 휘호를 받았고 아들 효종이 명덕정순(明德貞順)의 휘호를 더 추상하였다.

인조는 왕후의 장릉 곁에 자신의 수릉(壽陵)을 만들어두었다가 사후 효종이 그곳에 아버지 인조를 봉릉하고 장사지냈다. 장릉은 원래 파주 운천리(雲川里)에 있었지만 묘 주위에 뱀과 전갈이 살기 시작하자 영조가 현재의 파주 갈현리로 이장한 것이다.



5.올드코난 생각

인렬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잘 모른다. 이유는 그녀의 남편 인조는 큰 업적은 없지만, 과는 많은 임금으로 주로 14대 임금인 선조과 비교될 정도로 인기가 없는 왕이기 때문이다. 그런 왕의 왕비였기에 인렬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에 대해 관심이 없던 것이다. 한씨가 살아있는 동안 인조가 큰 실정이 없었다는 것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녀가 낳은 장남 소현세자는 인조에 의해 독살된 것으로 의심을 받고 있는데, 만일 이 당시 인렬왕후가 생존해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사후 벌어진 이런 아픈 역사를 모르고 죽었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살어서 그런 비극을 막아주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소현세자는 좋은 임금이 될 수 있었다는 여러가지 정황이 남아 있기에 소현세자의 죽음은 조선의 비극이었다.


덧붙여 만일 인렬왕후가 살았다면 병자호란 초기 인조의 오판을 막을 수도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당시 인조와 조정 신료들은 현실인식이 부족했다. 반면 인렬왕후는 그 누구보다 민심과 당시 시대를 이해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이해하려는 노력의 흔적이 있다. 병자호란은 청나라의 땅 욕심이 아니라 명분에 의한 전쟁과 명나라를 치기 전에 뒤를 든든히 하려는 이유가 컸다. 이때 광해군같은 현실적인 외교를 펼쳤더라면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믿을 수 있는 현명한 자의 조언은 이래서 중요한 것이다. 만일 그녀가 10년을 더 살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좋은 쪽으로 흘러갔을 가능성을 매우 높게 본다. 조선을 위해서 인렬왕후는 조금 더 살았어야 했다는 말로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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