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 趙氏) 생애

올드코난 2016. 3. 6.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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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계비이며 대왕대비까지 올랐지만, 실재로는 영광 보다는 아픔의 세월을 보냈던 자의대비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 趙氏)에 대해 정리해 본다.


1.개요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 趙氏, 1624년 12월 16일(음력 11월 7일) ~ 1688년 9월 20일(음력 8월 26일)) 조선 16대 왕 인조의 계비(繼妃). 본관은 양주(楊州). 정식 시호는 자의공신휘헌강인숙목장렬왕후(慈懿恭愼徽獻康仁淑穆莊烈王后)이며, 자의대비(慈懿大妃)로도 불린다. 한원부원군 조창원(漢原府院君 趙昌遠, 1583 ~ 1646)의 딸로 조부는 지돈녕부사 증 영의정 조존성(知敦寧府事 贈 領議政 昭敏公 趙存性, 1554 ~ 1668)이다. 아버지 조창원의 영향을 받아 검소하고 재물 욕심이 없는 성품이었다 전한다.


2. 인조의 계비

1635년 인렬왕후가 승하하고 1638년 음력 12월 인조의 왕비로 책봉되었다. 당시 나이는 14세이고 인조는 43세로 무려 29살이나 차이가 났다. 여기에 인조는 소용 조씨를 총애하고 있었기에 남편 인조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슬하에 자녀가 없다. 그리고 장렬왕후(자의대비)는 성격 자체가 조용한 성품이어서 소용 조씨기 실재 궁궐 안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데 대해서 애써 모른척 조용히 숨을 죽이며 지내게 된다. 1645년 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던 것도 실은 혼자 지내기 위함이 컸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게 볼모로 끌려갔던 소현세자와 세지빈 강씨와 자식들의 죽음에도 장렬왕후(자의대비)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던 처지였다. 이는 인조의 총애를 받은 소용 조씨(소의 조씨)가 왕비와 다름없는 대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3. 효종즉위와 대비

장렬왕후(자의대비)가 기를 펴게 된 것은 남편 인조의 죽임 때문이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하는데, 임종 직전에 인조 곁에는 소의 조씨가 있었지만 당시 왕세자(효정)이 명으로 장렬왕후가 인조의 임종을 지켜 보게 배려를 해주면서 장렬왕후는 이때부터 왕비의 권위를 얻게 된다.

그리고 효종이 즉위하자 대비가 되고 자의(慈懿)의 존호가 추상되어 자의왕대비(慈懿王大妃)가 되었다. 인조가 죽어서야 숨통이 트이게 된 것이다.

여기서 가장 곤란하게 된 것은 당연히 소의 조씨였다. 인조의 총애로 얻은 권세는 인조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고 만다. 특히, 조씨의 아들 승성군을 왕으로 만들려했다는 정황이 드러나면서 소의 조씨는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4. 예송논쟁

법적으로 의붓아들인 효종이 1659년 승하하는데, 이때 복상문제가 대두되고 3년상이냐 1년상이냐하는 논쟁이 벌어진다. 결국 송시열의 뜻대로 자의대비는 1년 상복을 입는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데 이를 1차 예송논쟁이라고 부른다. (차후 성세 설명) 현종은 즉위후 자의대비를 대왕대부로 높여 부르고, 이후 현종 15년 1674년 효종의 정비 인선왕후 장씨가 숨을 거두면서 다시 2차 예송논쟁이 벌어진다. 참고로 인선왕후는 자의대비(장렬왕후)의 며느리가 되지만 나이는 6살 위였다. 이번에는 9개월이냐 1년이냐하는 상복 논쟁이 벌어졌는데 국제에 의하면 맏며느리는 1년 둘째는 9개월이라고 되어 있다. 단순해 보이는 이 일은 당시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권력다툼에 그 이유가 있었고 자의대비는 자신도 원치않는 정쟁의 대상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5.최후

남편 인조, 법적아들 효종, 손자 현종, 증손자 숙종대까지 자의대비는 생존해 있었다. 숙종 14년 1688년 9월 20일(음력 8월 26일) 64세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능(陵)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東九陵)내에 위치한 휘릉(徽陵)이다.



6.올드코난 생각.

무려 4명의 임금들을 거치면서 그녀의 지위는 대왕대비까지 이른다. 하지만, 64년간의 삶 중 50년을 궁궐에서 보낸 자의대비는 외로움과 비통함과 비애를 느끼며 평생을 살았다. 남편 인조 시대에는 숨을 죽이며 살아야 했고, 효종 시기부터는 대비로서 대접을 받은 듯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절차였을뿐 자신의 거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택연금과 크게 다를 바 없던 삶이었다.

14살이라는 너무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되었던 자의대비는 살아서도 남편에게 외면을 받았고, 죽어서도 버림을 받게 되는데, 인조의 곁에는 인렬왕후가 묻혔고 자의대비는 홀로 휘릉에 묻혔다. 왕대비라는 직함은 허울이고, 실재 그녀의 삶은 일반 백성의 아낙네들 보다 더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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