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조선 유일의 궁녀 출신 왕비 장희빈 (張禧嬪, 희빈 장씨 禧嬪 張氏) 설명

올드코난 2016. 3. 10.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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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하면 대부분 장희빈을 꼽는다. 경종의 어머니이며 숙종이 사랑을 받았지만, 사약을 받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장희빈은 오랫동안 악녀라는 이미지가 강했지만, 최근에는 권력의 희생양으로 보는 시각이 많아졌다. 장희빈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기에 여기서는 간략히 정리해 본다.

조선 유일의 궁녀 출신 왕비 장희빈 (張禧嬪) 과연 악녀였을까? 


1.출생 및 가계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년 11월 3일 (음력 9월 19일) ~ 1701년 11월 7일 ~ 9일 (음력 10월 8일 ~ 10일), 조선 19대 왕 숙종의 빈(嬪), 20대 왕 경종(景宗)의 어머니. 본명은 장옥정(張玉貞) 본관은 인동(仁同). 아버지는 역관 출신 장형(張炯), 어머니는 장형의 후처 윤씨. 역관(驛官) 장현(張炫)의 종질녀이다. 조선 유일의 궁녀 출신 왕비다.

오빠 장희재 무과에 급제 경신년(1680년) 명문가의 자제만으로 구성된 내금위에 재직 1683년에는 좌포청 부장으로 있었다. 아버지 장형의 사촌형인 장현은 효종 8년에 이미 정2품 자헌대부를 제수받고 숙종 1년에는 이미 종1품 숭록대부에 올라 공을 세워도 더이상 품계가 올라갈 수 없어 자식과 조카가 대신 승봉되어야 했던 거물 역관으로 재산은 국중거부의 명성을 얻을 정도였고 장현 형제의 자식들은 무관 및 역관, 혹은 의관으로 고위직에 있었다. 사대부 가문은 아니었지만 조선에서 손꼽히는 대부호였고 사회적 위치는 절대 낮은 가문이 아니었다.


2. 궁녀에서 왕비로

장희빈이 궁녀생활을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자의대비 조씨의 사랑을 받았는데,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가 천연두로 요절하고 숙종과 관계(19금)를 맺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 金氏)에 강제로 출궁이 되었다가 얼마후 명성왕후가 감기를 얻고 사망하고 3년상이 끝난 1685년에 재입궁한다. 이때 숙종의 총애가 매우 컸는데, 계비 인현왕후 민씨와 집권세력 서인은 장희빈을 견제하고 장희빈을 출궁시킬 것을 숙종에게 수시로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러다 숙종이 기다리던 아들 (경종)을 낳게 되고 숙종은 매우 기뻐하지만, 서인들은 축하조차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까지만 해도 숙종은 참았지만, 얼마후 장희빈의 어머니 윤씨가 숙종의 어명을 받고 산후조리를 위해 궁궐로 오던중 서인의 이익수의 명으로 사헌부 관원들이 가마를 타고 있던 윤씨를 끌어 내리고 하인들에게 매를 때리며 체포하는 사건(옥교 사건)이 생기는데, 이에 숙종은 임금을 능멸한 것이라 분노하지만, 서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1689년 1월 11일 장희빈의 아들(경종)을 원자로 명호한다는 뜻을 알리는데, 서인들은 당시 이런 급작스런 숙종의 결정을 대비하지 못하다 1월 15일 원자로 명호가 내려지고, 당시 소의 장씨였던 장희빈이 정1품 빈으로 책봉되면서 후궁 서열 1위가 된다. 서인들은 이에 반달하고 숙종은 이에 분노하며 서인들을 파직하고 남인들에 실권을 준다. 이후 기사환국이 발발하면서 조정을 남인들이 장악하게 된다. 이후 당시 중전이었던 계비 인현왕후 민씨는 폐서인되고 쫓겨나고 장희빈이 왕비로 등극한다.


3. 강등

장희빈은 머리 부스럼증과 종기, 오랜 고질병 등이 있었던 것 같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인지 둘째 아들을 낳은지 100일도 되지 않아 사망하고 만다. 이때 숙종이 매우 슬펐다고 전하는데, 사망한 다음 달 1690년 10월 22일에 장희빈은 왕비 책봉식을 올린다. 그러다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난다. 장희빈은 왕비에서 희빈으로 강등되고, 폐서인되었던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위한다.


4. 최후

몇 년후 1701년 인현왕후가 사망하고 장희빈의 왕비 복위 움직임이 일어나지만 당시 숙종은 숙빈 최씨(영조의 어머니)를 총애하고 있었는데 숙빈 최씨는 장희빈이 인현왕후에게 저주를 해 그로 인해 죽은 것이라 고하고 숙종은 ‘무고의 옥’을 일으켜 결국 장희빈을 죽이게 되는데, 이때 신료들은 반대를 했었다. 숙종의 의지대로 죽인 것이다. 숙종의 자진라는 명을 받은 사약을 받고 죽었는데 당시 43세였다.

노론 입장의 《수문록》과 《인현왕후전》에는 장씨가 숙종에 의해 강제로 사사된 것으로 묘사되었고 정사인 《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자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5.사후

장례는 종친부 1품의 예로 지극히 성대하게 해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들 세자 윤(경종) 부부에게 상주로서 거애식에 참여하여 망곡례를 행할 것을 명하고 3년 복을 입게 한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장씨를 추존하려하지만 노론이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경종은 상소를 올린 유학자 조중우를 유배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하려 했지만 노론은 조중우에게 대역죄를 물어 사형에 처하게 만든다. 그리고, 성균관 장의 윤지술이 숙종이 장씨를 죽인 것은 빛나는 업적이니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연잉군(영조)를 왕세제로 책봉한후 왕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해 경종이 정치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자 경종은 분노하고 신임사화가 발발 노론이 숙청되고 어느 정도 힘을 얻게된 1722년에 장희빈을 옥산 부대빈(玉山府大嬪)에 추존하는데 숙종이 후궁 출신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어명을 내렸기에 즉시 왕후로 추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경종은 희빈 장씨를 왕비로 추숭하려 하지만 재위 4년만인 1724년에 사망하여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뒤를 이어 영조가 즉위하고 노론이 권력을 장악하게된다. 그리고 노른은 장희빈은 대역죄인으로 격하시키고 만다.

장희빈의 현재 무덤은 서오릉 경내의 대빈묘(大嬪墓)이다.


6.올드코난 생각

장희빈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길지만, 이렇게 마무리하고 개인적의 의견을 정리해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장희빈은 모습은 드라마 마지막 장면에서 장희빈이 억지로 사약을 먹는 장면이다. 특히, 배우 김헤수의 열연으로 그런 모습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에 장희빈은 요부 인현왕후 민씨는 현모양처로 묘사된 서적이나 드라마의 영향으로 이 두 사람에 대한 편견을 갖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가 먼저 생각해 봐야 할 점은 조선은 지독한 신분사회였다는 것이다. 


인현왕후 민씨는 전형적인 명망있는 사대부 집안 자식이었다면 장희빈은 부유했지만, 사대부 집안은 아니었다. 이 차이는 당시 조선의 권력을 장악한 서인들 눈에는 장희빈은 도저히 왕비로서 자격이 없던 것이다. 또 인형왕후는 실재 투기를 분명히 했음이 정사에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는 여자로서 당연히 느끼는 감정이다. 없었다고 여기는게 문제다. 왕비 인현왕후의 투기와 견제에, 사대부들의 무시를 받았던 장희빈은 친정어머니가 모욕을 당하는 것마저 봐야 했다. 독해지지 않는게 이상할 지경이다.


이런 장희빈을 숙종은 철저히 이용을 했다. 초기에는 분명 장희빈에게 마음이 있었지만 식어버렸고, 여기에 서인을 대신한 남인들은 교만에 빠지고 말았다. 숙종은 이런 남인을 내쳤고, 장희빈이 쓸모도 없어졌다는 판단에 아예 죽여 버렸다. 이런 남편을 만난 장희빈이 불쌍한 것이지, 욕을 해서야 되겠는가.

필자는 이렇게 정리해 본다. 인형왕후와 장희빈은 모두 불행하고 불쌍한 여인이었다. 누가 더 나쁘고 좋다고 따지지 말고 두 사람 모두 위로해 주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 보며 이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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