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효종의 정비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 설명

올드코난 2016. 3. 8.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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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에 의해 세자가 죽음을 당하고 둘때였던 봉림대군이 임금이 되어 효종이 된다. 그리고 부인이었던 장씨는 왕비가 되는데, 내조를 잘했다는 정도로만 알려진 정비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에 대해 설명해 본다.


1. 출생 및 가계

인선왕후(仁宣王后, 1619년 2월 9일(1618년 음력 12월 25일) ~ 1674년 3월 19일(음력 2월 23일)) 조선 17대 임금 효종의 정비(正妃)이며 현종의 어머니이다. 신풍부원군 우의정 장유의 딸로, 본관은 덕수, 정식 시호는 효숙경렬명헌인선왕후(孝肅敬烈明獻仁宣王后)이다.

광해군 10년이던 1619년 2월 9일(1618년 음력 12월 25일) 태어났는데, 아버지 장유(張維)는 인조반정 공신이며 이괄의 난에 인조를 보필한 공으로 신풍부원으로 봉해졌고, 정묘호란때는 인조와 강화도로 동행을 했고, 이후 병자호란때는 남한산성으로 호위를 한 인조에게는 충신이었다. 이후 우의정에 이르렀고, 인선왕후의 어머니는 안동 김씨 김상용의 딸로 김상용은 병자호란 당시 종묘와 사직을 받들고 강화도로 건너갔는데, 청나라 군대가 강화성을 함락시키려 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살한 인물이다. 인선왕후의 친가와 외가는 이토록 절개가 있고 청나라에 반대했던 집안이었고, 이는 인선왕후에도 그대로 영향을 주게 된다.


2. 대군부인에서 왕비가 된다.

인조의 차남 봉림대군(뒷날의 효종)과 가례를 올리고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의 작호를 받았는데,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패한 조선은 인조의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후 소현세자 부부와 차남인 남편 봉림대군과 함께 선양에서 8년간의 볼모생활을 하게 된다. 1645년 소현세자가 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그때서야 조선으로 귀국을 할수있었고 차남이었던 봉림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왕세자빈에 책봉된다. 몇년후 1649년 인조가 죽자 봉림대군(세자)이 즉위하고 왕비가 된다.


3. 훌륭한 내조

효종은 세자로 책봉될때부터 북벌을 주장해 인조를 기쁘게 했다. 여기에 효종의 부인 인선왕후 역시 집안 내력과 청나로 볼모 생활의 한까지 더해 적극적으로 효종의 뜻에 따르게 된다. 효종은 인선왕후에게 검소한 삶을 부탁했고 원래 성품도 검소했던 인선왕후는 사치와 낭비를 줄이고 무엇보다 인조 당시 권세를 누리던 소용 조씨를 처단하는데 인선왕후가 큰 역할을 하게되는 등 후궁들의 암투를 막아내 궁궐의 기강을 확실히 잡아주어 효종이 국정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준다.


4. 왕대비 시절

1659년 즉위한지 10년만에 효종이 죽고 아들 세자 연(현종)이 즉위하고 왕대비가 된다. 당시 현종은 19세 성인이라 수렴청정은 불가했다. 이즈음 인선왕후는 몸이 매우 비대하고 권력에 대한 욕망이 강해졌다는 것이 보이다. 대표적으로 효종이 죽었을 때 효종의 종기에 침을 좋았던 의원 신가귀 등을 국문해 죽이라고 주장하지만 신료들의 반대를 한다. 이 외에도 사사건건 조정을 간섭한 것으로 나오는데, 계속해서 거절을 당하자 인선왕후는 아들 현종과 사이도 나빠지게 된다.

1662년 효숙왕대비(孝肅王大妃)가 되고 현종 15년인 1674년 57살에 세상을 떠난다.


5. 사후

인선왕후가 죽은 뒤에도 인조의 계비이며 시어머니가되는 자의대비 조씨가 생존해 있었는데, 이때 효종의 사망후 벌어진 예송논쟁(기해예송)이 다시 불거지는데 이를 2차 예송논쟁(갑인예송)으로 본다. 의도치 않게 사후 예송논쟁에 이름이 거론된 것인데, 이 해 현종도 갑자기 죽고 만다.

능은 경기도 여주의 영릉(寧陵)으로 남편인 효종과 함께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릉의 방식으로 묻혀있다.

자식으로는 조선왕조실록에는 1남 6녀로 기록되어 있는데, 일찍 죽은 두 아들이 있었다. 현종과 , 숙신, 숙안, 숙명, 숙휘, 숙정, 숙경공주을 낳았다.



6. 올드코난 생각

전형적인 사대부 여인이었다. 남편 효종이 있었을때는 남편의 뜻을 잘 따라 내조를 잘했다고 보지만 사후 왕대비가 되어 왕실이 어른이 되자 군림을 하려 들었다는 점에서 권력욕이 강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일 현종이 조금 더 어린 나이에 즉위를 했다면 수렴청정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검소하다고는 하지만, 몸이 매우 비대했는데, 다른 이들에게는 검소함을 강요하고 엄격했지만 자신에게는 관대한 면이 있어 보인다. 특히 효종의 사후 책임을 물어 의원들을 모두 죽이려한데 대해서는 잔혹한 면도 있다. 인선왕후는 권력형 인간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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