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 내전(중국어 정체: 國共内戰, 간체: 国共内战, 병음: guógòng neìzhàn, 영어: Chinese Civil War)은 1927년 이후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사이에 일어난 두 차례의 내전을 말한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해방전쟁이라고도 부른다. 1927년에서 1936년까지를 제1차 국공 내전, 1946년부터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이 타이완 섬으로 옮긴 1949년까지를 제2차 국공 내전으로 구분한다. 여기서는 1차 국공 내전을 설명한다.
중국의 제1차 국공내전(國共内戰) 설명
1.제1차 국공합작
1911년 청나라가 공식적으로 무너지고 중국은 군벌들이 난립을 하는데 이중 가장 큰 세력을 가졌던 인물이 위안스카이였다.
개혁가 쑨원(손문)은 군벌지배를 종식시키고 중화민국의 통치권을 확립하기 위해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서방 국가들은 별다른 관심은 기울이지 않았고 쑨원은 1921년 신생 공산주의 국가 소련에 도움을 요청하고 이에 응한 레닌은 1923년 대표단을 상하이에 파견한다. 쑨원과 레닌이 교류하면서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군벌 세력으로 분열된 중국을 재통일하고 외세로부터 독립을 쟁취한다는 목표 아래 제1차 국공 합작을 이루게 된다.
2. 세력을 키우는 중국 공산당
쑨원은 군벌과 대항하기 위한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장제스를 비롯한 장교들을 소련으로 파견하여 군사 기술을 습득하도록 하는 한편, 광저우 교외에 황푸군관학교를 세워 자체적으로 현대적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 이 시기에는 공산주의자도 국민당에 입당하는 것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국민당 내에 공산당의 영향력이 상당하고 이즈음 저우언라이는 황푸군관학교의 정치부 교관이었고, 마오쩌둥도 국민당의 요직을 맡고 있었다. 요컨대, 공산당은 국민당 내에서 정당 안의 또 다른 정당으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3.쑨원의 사망
1925년 쑨원이 사망한다. 청의 멸망 이후 중국의 개혁을 위해 살다간 위대한 인물 쑨원의 죽음은 국민당과 공산당 입장에서는 오히려 호기였다. 왜냐하면, 쑨원은 권력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진정 중국을 위해 살다가 혁명가였다면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권력을 추기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4.국민당의 분열
쑨원이 죽자 장제스가 국민당의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이 되고 장제스는 군벌 타도를 위한 북벌을 준비하는데 당시 국민당은 우파와 좌파로 분열되고, 공산당이 계속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1926년 3월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혁명군 내의 공산당원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국민당 내 우파(장제스 계열)와 좌파(공산당 계열)의 대립은 격화되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은 민중의 지지로 후난 성, 후베이 성, 푸젠 성, 저장 성, 장시 성, 안후이 성의 6성을 국민당의 세력 안에 편입시키며 우페이푸(吳佩孚), 쑨추안팡(孫傳芳) 등의 군벌을 격파하였고, 만주 군벌 장쭤린과 대치한다.
5. 공산당 탄압과 4.12 사건
1927년 3월 상하이의 노동자들이 무장봉기하여 장제스 군대를 맞아들였다. 장제스는 이를 자신에 대한 민중의 지지로 확신했고 공산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싫어하는 상공인과 부유층이 중국 공산당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부추기고 장제스는 여기에 힘을 얻어 4월 12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처형을 벌인다. (4·12 사건) 중국 공산당은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지하로 숨어들게 되었다. 이로써 제1차 국공 합작이 결렬되고, 국민당과 공산당이 분열되어 첫번째 국공 내전에 들어가게 된다.
6.1차 국공 내전
장제스는 주로 농촌 지역에서 세력을 키우고 자치 정부(소비에트)를 구성하는 공산군을 토벌하는 이를 토공전(討共戰)이라 한다. 공산당의 군사 조직인 홍군은 홍비(紅匪) 또는 공비(共匪)로도 불렸다. 장제스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대규모 작전을 벌이지만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은 홍군을 완전히 분쇄하지 못한다. 홍군의 게릴라식 유격 전술 때문이 효과를 봤기때문인데, 국민혁명군은 대규모 토벌전에서는 토벌 방식을 바꾸어 대규모 진지, 토치카를 짓고 지구전적인 진지전을 펼쳤는데 홍군은 이 전술에 말려들어 주요 근거지인 장시 성 해방구를 잃게 될 위험에 처한다.
이때 홍군은 필사적인 후퇴 전술을 택해 중국 대륙을 돌아서 산시 성에 이르는 장정(長征)을 감행하고 주력군이 무사히 옌안에 도착해고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 군벌 출신의 장쉐량과 대치한다. 장쉐량은 공산당에 동조적이고 공산당이 주장하는 항일 정신에 경도되고 1936년 12월 장쉐량은 시안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를 설득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 통일 전선이 성립하게 되고 제1차 국공내전은 사실상 휴전으로 끝난다.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이 종식되고 2차 국공내전이 다시 시작된다.
7.1차 국공내전의 의의
1차 국공내전은 휴전으로 끝났지만, 공산당이 중국을 지배하는 명분을 얻게 되는 과정이었다. 특히, 2차대전 당시 중일전쟁에서 중국 공산당은 일본과 싸웠지만, 국민당은 일본 보다는 공산당 공격에 더 열을 올리면서 중국인들은 결국 공산당을 자신들의 지배층으로 인정을 하게 된다. 만일 장제스가 좀더 생각이 깊거나 인품이 있는 인물이었다면 중국의 지배자는 장제스가 될 수 있었고, 2차 대전 당시 일본에 의한 중국의 피해를 더 줄일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런 것은 2차대전 전까지 공식적으로 국공 내전이 중지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만일 1936년 내전이 중지되지 않았다면, 일본이 중국 침략은 더 수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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