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량(前涼, 301년 ~ 376년)은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한족 출신의 장궤(張軌)가 건국한 나라로 국호는 양(凉)이지만 같은 국호를 가진 국가가 많아 전량이라 불린다. 전량의 군주들을 정리해 본다.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전량(前涼) 황제(군주)와 연호
제1대양태조(凉太祖) 장궤(張軌)
동진 시호 무목공 (武穆公), 전량 시호 무왕 (武王)/재위기간 301~3014년/능호 건릉(建陵)
요약: 전량 태조 무왕 장궤(前涼 太祖 武王 張軌, 255년 ~ 314년, 재위 : 301년 ~ 314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전량(前凉)의 초대 왕이다. 자는 사언(士彦),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왕(武王)이다. 장궤는 전한(前漢)의 개국공신 장이(張耳)의 후손으로 서진(西晉)에서 관직에 나가 상서랑(尙書郞), 산기상시(散騎常侍) 등 중직을 역임했다. 301년에 팔왕의 난으로 서진이 혼란에 빠지자 장궤는 중앙 조정의 한계를 깨닫고 양주(凉州)에 부임할 것을 자청하고 호강교위·양주자사(護羌校尉, 涼州刺史)에 임명되어 현지의 선비족을 토벌하고 양주 지역을 제패하고 반독립적인 세력이 되었다. 양주를 장악한 이후에도 서진의 신하로 자처하고 영가의 난으로 낙양(洛陽)이 함락되고 장안(長安)이 전조(前趙)의 공격을 받을 때에는 원군을 파견하여 돕기도 하였다. 이러한 공로에 따라 서진에서는 장궤를 서평군공(西平郡公)에 임명하였다. 314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시호는 무공(武公)이었으나 354년에 장조(張祚)가 추존하여 무왕(武王)으로 시호를 올렸다.
제2대 양고조 (凉高祖) 장식(張寔)
동진시호 명원공(明元公), 전량 시호 명왕 (明王)/ 연호 영안(永安) 314년 ~ 320년/ 재위기간 314년 ~ 320년/ 능호 영릉(寧陵)
요약: 전량 고조 명왕 장식(前涼 高祖 明王 張寔, 271년 ~ 320년, 재위 : 314년 ~ 320년) 전량(前凉)의 제2대 군주, 자는 안손(安遜),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명왕(明王). 271년 장궤(張軌)의 아들로 태어나 314년 장궤가 병으로 양주자사(凉州刺史)의 직위에서 물러나자 뒤를 이어 양주자사로 임명되고 장궤가 죽자 서평공(西平公)의 작위도 이었다. 장안(長安)의 서진(西晉) 정부에 계속 복종하며 군사적 지원을 하였으나 317년에 전조(前趙)에 의해 서진이 멸망하자 이후 강남에서 동진(東晉)이 건국되자 이에 계속 복종하지만 동진의 정통성은 인정하지 않아 동진의 연호를 따르지 않고 서진 민제(愍帝)의 연호인 건흥(建興)을 계속 이어서 사용한다. 진주(秦州)에서 전조에 맞서는 사마보(司馬保)를 적극 지원하지만 사마보의 군대가 양주로 들어서는 것은 거부한다. 320년 유홍(劉弘)이 종교반란을 일으키자 장식은 반란을 수습하지만 유홍의 신자 염섭(閻涉)에 의해 암살당한다. 시호는 소공(昭公), 동진 원제(元帝)는 원공(元公)이라 시호를 하사하였다. 354년 장조(張祚)가 추존하여 명왕(明王)으로 시호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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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양 태종(凉太宗) 장무(張茂)
동진 시호 성렬공 (成烈公), 전량 시호 성왕 (成王)/연호 영원(永元) 320년 ~ 324년/ 재위기간 320년 ~ 324년/ 능호 평릉(平陵)
요약: 전량 태종 성왕 장무(前涼 太宗 成王 張茂, 277년 ~ 324년, 재위 : 320년 ~ 324년) 자는 성손(成遜)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성왕(成王)이다. 277년 장궤(張軌)의 아들로 태어나 320년에 장식(張寔)이 염섭(閻涉)에게 살해되자 장식의 아들 장준(張駿)이 어렸기 때문에 주위의 추대를 받아 장무가 양주자사·서평공(凉州刺史, 西平公)에 즉위하는데 장무가 사사로이 자사 직위를 계승한 이 사건부터 전량이 독립적인 정권으로 성립했다고 본다. 322년 진주(秦州)를 공격했고 323년 전조(前趙) 유요(劉曜)의 공격을 받았다. 장무는 이에 대항하다가 항복하여 복종하기로 한다. 유요는 전량의 국력을 인정하여 장무를 양왕(凉王)에 책봉하여 번국이 되었다. 324년 병사하였다. 시호는 성공(成公)이었으나 354년에 장조(張祚)가 추존하여 성왕(成王)으로 시호를 올렸다.
제4대양 세조(凉世祖) 장준(張駿)
동진 시호 충성공 (忠成公), 전량 시호 문왕(文王)/ 연호 태원(太元) 324년 ~ 346년/ 재위기간 324년 ~ 346년/ 능호 대릉(大陵)
요약: 전량 세조 문왕 장준(前涼 世祖 文王 張駿, 307년 ~ 346년, 재위 : 324년 ~ 346년) 자는 공정(公庭), 묘호 세조(世祖), 시호는 문왕(文王). 장식(張寔)의 아들로 307년에 태어났다. 320년에 장식이 죽었을 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인 장무(張茂)가 대신 즉위하고 324년에 장무가 병사하자 장준이 뒤를 이어 즉위했다. 전량은 이 당시 전조(前趙)에 번국이 되어 있었는데, 전조가 후조(後趙)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쇠약해지자 장준은 327년에 전조로부터 독립하였다. 전조가 후조에 의해 멸망하자 장준은 330년부터 하남(河南 : 간쑤 성 동부)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후조의 복속 요구에도 불응한다. 장준은 동진에 복속되어 있음을 표방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왕을 칭했다. 동진(東晉)과 통교하기 위해 성한(成漢)에 접촉하기도 하고 334년에는 동진에서 장준을 대장군·도독섬서, 옹, 진, 양주제군사(大將軍, 都督陝西, 雍, 秦, 凉州諸軍事)에 임명하였다. 장준은 서역의 귀자(龜玆), 선선(鄯善) 등의 여러 나라를 지배하에 두었으며 농서(隴西) 지역을 경영하여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또한 관중(關中)으로 진출할 뜻을 가지고 동진에 협공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강력한 세력을 바탕으로 345년에는 영토를 나누어 양주, 하주(河州), 사주(沙州)를 설치하고 대도독·대장군·가량왕(大都督、大將軍、假涼王)을 자칭했다. 346년에 사망했다. 시호는 문공(文公), 동진 목제(穆帝)는 충성공(忠成公)이라 시호를 하사하였다. 354년에 장조(張祚)가 추존하여 문왕(文王)으로 시호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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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양세종 (凉世宗) 장중화(張重華)
동진 시호 경렬공 (敬烈公), 전량 시호 환왕(桓王)/ 연호 영락(永樂) 346년 ~ 353년/재위기간 346년 ~ 353년/ 능호 현릉(顯陵)
요약: 전량 세종 명왕 장중화(前涼 世宗 明王 張重華, 330년 ~ 353년, 재위 : 346년 ~ 353년). 자는 태림(泰臨),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명왕(明王). 330년 장준(張駿)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346년에 장준이 죽자 16세의 나이로 뒤를 이어 즉위한다. 즉위 직후 후조(後趙)가 침공해와 진주(秦州) 지역을 빼앗기고 양주(凉州)를 방어하였다. 이때 장중화는 사애(謝艾)를 등용해 후조의 대군을 막도록 했다. 사애는 5차에 걸친 후조의 침공을 모두 막아내는데 성공하지만 황하 이남 지역은 모두 후조에 복속되었다. 후조가 멸망하고 관중(關中) 지역에서 전진(前秦)이 세력을 확대하자 장중화는 353년에 전진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그러나 황하 이남의 일부 지역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353년 말 병에 걸렸고, 어린 아들 장요령(張耀靈)을 세자로 삼았다. 당시 사애는 참소를 받아 주천(酒泉) 태수로 좌천되어 있었는데, 장중화는 죽으면서 유언으로 사애에게 정치를 보필하도록 하였으나 장조(張祚)가 유언을 감추고 발표하지 않았다. 시호는 환공(桓公), 동진 목제(穆帝)는 경열공(敬烈公)이라 시호를 하사하였다. 354년에 장조(張祚)가 추존하여 명왕(明王)으로 시호를 올렸다.
제6대애공 (哀公) 장요령(張耀靈)
묘호 연호 능호 없음, 재위기간 353년,
요약: 전량 애공 장요령(前涼 哀公 張耀靈, 343년 ~ 355년, 재위 : 353년)은 장중화(張重華)의 아들로 343년에 태어났다. 353년에 장중화가 병에 걸리자 10세의 장요령이 태자가 되었으며 곧이어 장중화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장중화의 서형(序兄)인 장조(張祚)가 장중화의 유언을 조작하여 후견인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장조는 곧 장요령을 폐위하여 양녕후(凉寧候)로 삼았다. 355년에 장관(張瓘)이 장요령을 복위시키려 하였기 때문에 장조에게 살해당했고 시체는 모래 구덩이에 매장당했다.
제7대위왕 (威王) 장조(張祚)
묘호없음/ 연호 화평(和平) 354년 ~ 355년/ 재위기간 354년 ~ 355년/ 능호 민릉(愍陵)
요약: 전량 위왕 장조(前涼 威王 張祚, ? ~ 355년, 재위 : 353년 ~ 355년) 폐위당하여 시호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위왕(威王)이라 부른다. 장준(張駿)의 서자(序子)로 장중화(張重華)의 형이다. 장중화가 353년에 병에 걸리자 장요령(張耀靈)을 태자로 삼고 장조를 후견인으로 삼았다. 장중화는 죽기 직전 유언으로 사애(謝艾)에게 후사를 부탁하였으나 장조는 유언을 조작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장조는 곧이어 장요령을 폐위하여 양녕후(凉寧候)로 삼고 스스로 양공(凉公)에 즉위하였다. 354년에 황제를 자칭하고 사연호(私年號)를 제정하였으며 선대 군주들을 모두 왕으로 추존하였다. 이에 반대하여 간언하는 신하들을 파직하거나 처형한 장조는 음행과 폭정을 자행하여 민심을 잃었다. 환온(桓溫)이 북벌을 일으켜 전진(前秦)을 공격하자 전량의 진주자사(秦州刺史) 왕탁(王擢)이 환온의 북벌을 장조에게 알렸다. 이에 장조는 왕탁이 배반할 것을 두려워하여 암살하려 하다가 실패하였으며 환온이 돌아가자 군사를 파견하여 왕탁을 공격하였고 패배한 왕탁은 전진으로 도망쳐 항복하였다. 355년, 장조는 하주자사(河州刺史) 장관(張瓘)을 몰아내려 하였으며 이에 장관은 반란을 일으켜 장요령을 복위시키려 하였다. 장조는 장요령을 살해하였으나 장관의 군대가 수도 고장(姑臧)에 육박하자 성 안에서 모반이 일어나 성은 함락되고 장조는 병사들에게 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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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경도공 (敬悼公)장현정(張玄靚)
묘호없음/시호 충왕 (沖王)/ 연호 태시(太始) 355년 ~ 363년/ 재위기간 355년 ~ 363년/ 능호 평릉(平陵)
요약: 전량 충공 장현정(前涼 沖公 張玄靚, 350년 ~ 363년, 재위 : 355년 ~ 363년)장중화(張重華)의 서자이며 장요령(張耀靈)의 동생. 354년에 장조(張祚)에 의해 양무후(凉武侯)에 책봉되고 장조가 살해되자 송혼(宋混)·장거(張琚) 등이 장현정을 서평공(西平公)에 추대하였다. 장조가 사용한 연호 화평(和平)을 폐지하고 다시 건흥(建興) 43년으로 돌아갔다. 뒤이어 수도 고장(姑臧)에 들어온 장관(張瓘)은 장현정을 양왕(凉王)에 추대하고 자신은 국정을 전횡하였다. 이에 반대한 이엄(李儼) 등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356년에는 전진(前秦)에 복속하여 속국이 되었다. 장관은 폭정을 행하였기 때문에 359년에 송혼에게 살해되었으며 뒤이어 송혼이 정권을 잡았다. 송혼은 장현정에게 양왕의 칭호를 버리게 하고 양주목(凉州牧)을 자칭하게 하였다. 361년에 송혼이 병사하자 송혼의 동생 송징(宋澄)이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곧 살해되었으며 장옹(張邕)이 정권을 잡았다. 장옹은 포악하였기 때문에 또 반정이 일어나 장옹은 자살하였으며 장천석(張天錫)이 정권을 잡았다. 장천석은 동진(東晉)의 연호 승평(升平)을 받들어 사용하였다. 363년에 장흠(張欽)이 장천석을 죽이려다 실패하자 장천석은 장현정을 살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였고 시호는 충공(沖公), 동진 효무제(孝武帝)는 경도공(敬悼公)이라 시호를 하사하였다.
제9대도공(悼公) 장천석(張天錫)
묘호 없음, 능호 없음/ 연호 태청(太淸) 363년 ~ 376년/ 재위기간 363년 ~ 376년
요약: 전량 도공 장천석(前涼 掉公 張天錫, 346년 ~ 398년, 재위 : 363년 ~ 376년)은 전량(前凉)의 제9대이자 마지막 국왕. 시호는 도공(掉公)이다.
장준(張駿)의 막내 아들로 346년에 태어났다. 354년에 형 장조(張祚)에 의해 장녕후(長寧侯)에 책봉되었고 361년에는 중령군(中領軍)에 임명되었다. 같이 정권을 장악한 장옹이 포악했기 때문에 장천석은 반정을 일으켜 장옹을 자살하게 하고 스스로 정권을 잡았다. 363년에 장흠(張欽)이 장천석을 죽이려다 실패하자 장천석은 장현정을 살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였다. 장천석은 366년에 전진(前秦)으로부터 독립하고 동진(東晉)의 종주권을 받들었다. 또한 세력 확대를 시도하여 367년, 반독립적인 세력인 이엄(李儼)이 다스리는 농서(隴西) 지방을 공격하지만 이엄이 전진에 항복해 전진의 구원군과 싸워 패배하고 왕맹(王猛)과 평화 협정을 맺고 귀환한다.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이 371년에 전량을 공격해오자 장천석은 전진에 복속하여 속국이 되었다. 장천석은 주색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고 후계자 문제로 전량 국정이 혼란에 빠졌다. 이에 376년 부견은 전량을 공격하여 멸망시켰고 장천석과 전량 왕족들은 포로로 장안(長安)에 끌려갔다. 장천석은 귀의후(歸義侯)에 봉해졌다. 383년 비수대전(淝水大戰)에 참전했던 장천석은 전진군이 패주하는 틈을 타서 동진에 항복하고 동진 조정은 장천석을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임명한다. 동진에서 살다 398년 사망했다. 동진에 도공(掉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비정통 평왕 (平王) 장대예(張大豫)
묘호 없음, 시호 없음, 능호 없음/ 연호 봉황(鳳凰) 386년 ~ 387년/ 재위기간 386년 ~ 3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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