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오호 십육국 전조(前趙) 설명

올드코난 2017. 2. 14.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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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의 왕조에 대해 알아 본다. 세번째는 전조(前趙, 304년~329년)로 유연(劉淵)이 건국했다. 처음 국호는 한(漢)이었지만 후에 조(趙)로 변경했다. 같은 시대 석륵(石勒)이 같은 이름 조(趙)를 세워 유연의 조를 전조, 석륵의 조를 후조(後趙)로 구별한다.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 전조(前趙) 설명

1. 건국 전

후한(後漢) 말기부터 중국의 통일 왕조들은 흉노(匈奴)와 선비족(鮮卑族) 등 주변 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였다. 특히 흉노의 분열 이후 남흉노가 대거 산시 성(山西省) 일대에 정착하여 중국의 북방을 방어하는 번병(番兵)의 역할을 하였다. 3세기 말, 팔왕의 난 이 일어나 서진(西晉)이 혼란에 빠지고, 남흉노의 좌부수(左部帥) 유연은 서진 황족의 권력쟁탈에 용병으로 개입하면서 자립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된다.


2. 한의 건국

업(鄴)의 사마영(司馬穎)에게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유연은 사마영의 몰락이 보이자 사마영을 속이고 업에서 빠져나와 흉노의 거주지인 병주(并州)로 향했다. 병주의 이석(離石)에서 거병한 유연은 304년 10월에 한(漢)을 건국한다. 흉노와 한나라는 기원전 2세기 형제의 맹약을 하였는데, 유연은 이 형제의 맹세를 근거로 이미 멸망한 형 한나라의 뒤를 이어 동생 흉노가 한나라를 건국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따라 유연은 한 고조(高祖), 후한 광무제(光武帝), 촉한 소열제(昭烈帝) 등을 조상으로 추존해 제사를 지낸다. 유연은 아들 유총(劉聰)과 친족인 유요(劉曜), 갈족(羯族)의 석륵 등을 거느리고 병주 중남부를 점령하고 서진의 수도 낙양(洛陽)을 압박한다. 308년 유연은 황제에 즉위하고 다음해에 수도를 평양(平陽 : 산시 성 임분)으로 옮겼다.


3. 서진 멸망

310년 유연이 죽고 장남 유화(劉和)가 제위를 물려받았지만 인망이 없어 동생 초왕(楚王) 유총이 모반을 일으켰다. 유화를 살해하고 제위를 계승한 유총은 311년 서진의 수도 낙양을 함락시켜 회제(懷帝)를 사로잡았는게 이를 영가(永嘉)의 난이라 부른다. 장안(長安)에서 민제(愍帝)가 즉위해 저항했지만 유총은 316년, 장안을 함락하여 민제도 사로잡았다. 이로써 서진은 멸망하였으며 이때부터를 오호십육국 시대라고 부른다. 유총의 치세에 한은 화북 일대를 공격하여 세력을 확대하였다. 유요는 장안 방면으로 진출하여 옹주(雍州 : 산시 성(陝西省) 중남부)·진주(秦州 : 간쑤 성(甘肅省) 동부) 일대를 점령하였으며, 석륵은 하북(河北)과 병주 북부를 점령한다. 유총의 치세에 유요와 석륵이 점령한 지방은 사실상 독립적으로 군벌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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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조 시대

318년 유총이 죽고 아들인 유찬(劉粲)이 뒤를 계승했으나 부하가 반란을 일으켜 유찬을 죽이고 유씨 일족을 몰살시켰다. 장안의 유요와 하북의 석륵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진하였으며, 유요는 죽은 유찬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하고 석륵을 조공(趙公)에 봉하였다. 12월에 석륵이 평양을 점령하여 반란을 제압하였으나 319년에 유요가 석륵을 공격함으로써 유요와 석륵 세력은 결별한다.

유요는 319년에 장안에서 국호를 조(趙)로 고치고 한의 황제들에게 제사하던 것을 폐지하고 흉노의 선우인 모돈 선우를 모시며 한나라의 후예를 자처하던 흉노의 한나라는 사라지고 흉노의 후예를 자처하는 조나라가 성립된다. 이 시기 석륵은 11월에 양국(襄国;현재의 하북성 형대邢台)에서 후조를 세우고 조왕으로 즉위한다.


5. 멸망

유요는 저·강족, 구지(仇池), 전량(前凉) 등을 공격하여 복속시키고 325년 낙양 근방에서 후조와 대결하지만 패배하고 이후 전량이 독립하고 구지의 저항이 계속되어 전조의 국력은 계속 약화되고 328년 겨울 낙양에서 후조와 전투를 치른 끝에 유요가 석륵에게 포로로 사로잡히고 만다. 아들 유희(劉煕)가 상규(上邽수)에서 뒤를 이어 즉위하지만 329년 석호(石虎)가 유희를 사로잡고 전조는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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