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십육국시대 후연(後燕, 384년 ~ 407년)은 총 4명의 황제가 있었다.
제1대 연 세조(燕世祖)무성황제(武成皇帝)모용수(慕容垂)
연호: 연원(燕元) 384년 ~ 386년, 건흥(建興) 386년 ~ 396년/ 재위기간 386년 ~ 396년/ 능호 선평릉(宣平陵)
요약: 모용수(慕容 垂, 326년 ~ 396년, 재위: 384년 ~ 396년)는 후연(後燕)의 초대 황제로 자는 도명(道明),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성무제(成武帝)이다. 전연(前燕) 모용황(慕容皝)의 다섯째 아들로 태자 모용준(慕容俊)의 시기를 받고 모용준이 즉위한 이후 모용패는 견제를 받아 지방으로 좌천되기도 하고 많은 제한을 받았다. 훗날 전진(前秦)으로 망명했다 370년 전연이 멸망하자 모용수는 전진의 장수로 각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후 모반해 384년 1월 모용수는 연왕(燕王)에 즉위해 후연을 건국한다. 396년 북위 정벌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돌아오던 도중 진중에서 병사한다.
제2대 연열종(燕烈宗)혜민황제(惠愍皇帝)모용보(慕容寶)
연호: 영강(永康) 396년 ~ 398년/ 재위기간 396년 ~ 398년
요약: 모용보(慕容 寶, 355년 ~ 398년, 재위 : 396년 ~ 398년)는 후연(後燕)의 제2대 황제로 자는 도우(道祐), 묘호는 열종(烈宗), 시호는 혜민제(惠愍帝)이다. 모용수(慕容垂)의 넷째 아들로 모친은 난빈이다. 모용보는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문약하여 난세의 군주감이 아니라고 평가되고 이로 인해 태자 지위를 위협받기도 했다. 395년에 북위(北魏)를 공격하였으나 참합피(參合陂)에서 탁발규(拓拔珪)에게 대패하였다. 이에 복수전을 치르던 도중 모용수가 396년 4월에 진중에서 병사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황제에 즉위한 모용보는 배다른 동생인 모용륭(慕容隆), 모용농(慕容農) 등의 보좌를 받으며 치세를 시작하는데 즉위하자마자 호구 조사와 개혁을 실시하여 민심을 잃었고 11세의 어린 아들 모용책(慕容策)을 태자로 삼아 후계자 분쟁의 원인을 만들기도 했다. 여러 반란을 겪었고 398년 난한이 모용보에게 항복을 청했으나 모용보는 거절하고 반란군과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제3대창려왕(昌黎王) 찬탈 군주 난한(蘭汗)
연호: 청룡(靑龍) 398년/재위기간 398년
요약: 난한(蘭汗, ? ~ 398년, 재위 : 398년)은 후연(後燕)의 제3대 황제로 황위를 찬탈하였다가 폐위되었기 때문에 시호는 없다. 모용수(慕容垂)의 당숙 또는 장인이며 모용성(慕容盛)의 장인이다. 384년에 모용수가 거병할 때부터 시작하여 후연의 장군으로 각지에서 활약하였고 양성왕(陽城王), 돈구왕(頓丘王)에 책봉되었다. 398년 2월, 후연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은밀하게 반란군에 동조하여 모용보(慕容寶)가 축출되도록 방관하였으며, 모용농(慕容農)이 배신하도록 종용하기도 했다. 반란군이 모용보를 축출하고 용성(龍城 : 랴오닝 성 조양시)을 점령한 뒤에 내분을 일으키자 이를 기회로 반란군을 일소하고 태자 모용책(慕容策)을 받들었다. 그리고 모용보에게 사신을 보내 돌아올 것을 청하였으나 모용보가 의심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난한은 용성에서 모용책을 모시고 종묘에 제사를 올리는 등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였고, 4월 경에 다시 돌아온 모용보는 이러한 난한의 모습을 보고 의심을 거두었다. 모용보가 용성으로 입성하자 난한은 모용보를 살해하고 스스로 창려왕(昌黎王)을 자칭하면서 후연의 정권을 잡았다. 난한은 대부분의 모용씨 일족을 살려두었으며, 모용보와 함께 떠돌면서 자신을 항상 의심하였던 모용성도 부인과 딸의 부탁을 받고 죽이지 않았다. 형인 난제(蘭堤), 난가난(蘭加難) 등이 모용성을 죽일 것을 계속 청하였으나 난한은 이를 거부하였으며, 오히려 모용성을 시중(侍中)에 임명하여 가까이 두었다. 이에 모용성은 난제와 난가난을 참소하여 난한과 사이가 벌어지도록 만들었다. 6월 경 모용성은 모용기(慕容奇)를 사주하여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하였고, 난한은 난제 등에게 토벌을 명하였다. 그러나 모용성이 다시 참소하여 난한은 사령관을 교체하였는데, 이로 인해 난제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난한은 아들 난목(蘭穆)을 파견하여 이들을 진압하게 하였다. 반란을 진압하고 귀환한 난목은 모용성에 의해 암살당했고, 난한도 모용성을 따르는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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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장황제(獻莊皇帝) 모용령(慕容令): 소무제 추숭
제4대연 중종(燕中宗)소무황제(昭武皇帝)모용성(慕容盛)
연호: 건평(建平) 398년, 장락(長樂) 399년 ~ 401년/ 재위기간 398년 ~ 401년/ 능호 흥평릉(興平陵)
요약: 모용 성(慕容 盛, 373년 ~ 401년, 재위 : 398년 ~ 401년)은 후연(後燕)의 제4대 황제, 자는 도운(道運), 묘호는 중종(中宗), 시호는 소무제(昭武帝). 모용보(慕容寶)의 장남으로 모후는 정씨(丁氏). 어린 시절부터 모략이 뛰어났다고 한다. 전진(前秦)의 장안(長安)에서 출생하여 비수대전이 벌어졌을 무렵 장안에 거주하고 있었다. 385년, 장안이 서연(西燕)에 의해 포위되자 부견(苻堅)은 장안 성내의 모용씨들을 학살하였는데 모용성은 성을 탈출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모용성은 서연의 모용충(慕容沖)을 의지하여 386년에 병주까지 이동 12월 경에 서연의 진중을 탈출하여 387년에 후연의 모용수(慕容垂)에게 귀환하였다. 모용성은 장락왕(長樂王)에 책봉되었다. 398년, 용성에서 모반이 일어나 반란군에게 함락되자 모용성은 모용보와 함께 탈출하여 각지를 떠돌았다. 모용보가 난한(蘭汗)에게 돌아가는 것을 반대하던 모용성은 결국 이탈하였고, 모용보가 난한에게 살해되자 모용성은 복수를 위해 난한에게 거짓 항복하였다. 난한은 모용성이 자신의 외손자였기 때문에 죽이지 않고 측근으로 삼았다. 모용성은 난한의 형제 사이를 이간질하고 모용 기(慕容 奇)의 반란을 사주하였다. 모용기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군의 지휘권 문제로 난제(蘭堤)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하고 돌아온 난목(蘭穆)을 모용성이 살해, 난한도 군대에 의해 주살되어 난한의 찬탈은 종식되었다. 모용성은 황제로 즉위하지 않은 채 자신의 책봉명인 장락왕을 자칭하며 후연의 황제를 대행하였다. 모용성은 치세 내내 수많은 옥사를 일으켜 많은 공신과 종친들을 처형하였다. 이러한 폭정으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한편 모용성은 398년 말에 황제에 즉위하고 건평으로 개원하였으나 이듬해 정월에 다시 서민천왕(序民天王)으로 칭호를 깎았다. 400년에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신성(新城)과 남소(南蘇)의 2개 성을 함락하고 700여 리의 영토를 개척하였으나 401년 8월, 용성 내부에서 일어난 단기(段璣)의 반란으로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제5대 소문황제 (昭文皇帝) 모용희(慕容熙)
연호: 광시(光始) 401년 ~ 406년, 건시(建始) 407년/ 재위기간 401년 ~ 407년
요약: 모용 희(慕容 熙, 385년 ~ 407년, 재위 : 401년 ~ 407년)는 후연(後燕)의 마지막) 황제이다. 자는 도문(道文), 시호는 소문제(昭文帝)이다. 모용희는 모용수(慕容垂)의 8남으로 모후은 황후 단씨(段氏)이다. 모용수가 거병한 뒤에 태어나 총애를 받았고 하간왕(河間王)에 책봉되었다. 398년에 용성에서 모반이 일어나 모용보(慕容寶)가 죽고 난한(蘭汗)이 권력을 잡았는데, 13세의 모용희는 고양왕 모용숭(慕容崇)의 보호에 힘입어 살아남고 대신 요동공(遼東公)으로 작위가 격하되는 데 그쳤다. 곧이어 모용성(慕容盛)이 난한을 죽이고 정권을 잡자 모용희는 하간공(河間公)으로 책봉되었다. 400년에는 고구려 원정에 선봉으로 종군하여 큰 전공을 세웠으며, 이로써 모용성에게 용맹함이 모용수에 버금간다고 평가되었다.
401년에 반란이 일어나 이를 진압하던 모용성이 죽자, 모용희는 태후 정씨(丁氏)의 지지를 받아 태자 모용정(慕容定)과 평원공 모용원(慕容元)을 제치고 16세의 나이로 후연의 군주가 되었다. 이는 당초 모용희가 태후 정씨와 사통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즉위한 뒤 모용희의 총애가 황후 부씨(苻氏)에게로 쏠리자 정씨는 이에 불만을 품고 병부상서 정신(丁信)과 더불어 모용희를 폐위시키려 의논하였는데, 이를 눈치챈 모용희는 정씨를 핍박하여 자살시키고 정신을 주살하였다.
이후 황후 부씨와 소의 부씨를 총애하여 이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었는데, 이로써 용등원(龍騰苑)을 크게 짓고 그 안에 경운산(景雲山)을 조성하며 소요궁(逍遙宮), 감로전(甘露殿), 홍광문(弘光門)을 짓고 천하거(天河渠), 곡광해(曲光海), 청량지(清涼池)를 파는 등 각종 토목공사를 남발하여 국력을 낭비하였다. 또한 귀빈 부씨와 소의 부씨가 민간에 다니며 잔치를 벌이는 것을 방조하였고, 그 자신도 전국 각지로 사냥을 다니며 백성들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이 가운데 황후 부씨를 황후로 삼았고, 소의 부씨가 죽자 그녀를 치료하던 왕온(王溫)을 잔인하게 죽였다.
402년부터 404년까지 고구려가 후연을 공격해 숙군성(宿軍城)과 연군(燕郡)을 공격당하자 405년에 고구려를 공격하여 요동성을 거의 함락하였으나, 성에 자신과 황후가 최초로 입성하기 위해 "성을 깎아 평지가 되길 기다려 짐이 마땅히 황후와 더불어 수레를 타고 들어가리라, 장군과 사졸은 먼저 오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공략에 실패하고 퇴각하였다. 405년 12월에는 북으로 거란을 공격하러 출정하였다가 거란의 기세에 겁을 먹고 소득 없이 퇴각하였다. 그러나 황후 부씨가 이에 따르지 않자 목표를 변경, 치중도 버리고 3천여 리를 달려 이듬해 정월에는 고구려의 목저성(木底城)을 습격하였으나 또한 실패하였다. 407년, 황후 부씨가 죽자 모용희는 슬픔에 빠져 관을 열고 이미 대렴까지 마친 시신과 교접하였다. 전국에 명을 내려 눈물을 흘리고 곡하지 않는 자를 조사하여 벌주었고 거대한 무덤을 축조하고 공신들을 순장하려 하였다. 무덤이 완성되자 모용희는 맨발로 황후 부씨를 들고 무덤안에다 묻어두고 장례를 치렸다. 이때를 틈타 용성에서 후연의 장군 풍발(馮跋)이 모반을 일으켜 모용운(慕容雲)을 추대하였다. 모반 소식을 들은 모용희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용성의 북문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군대가 흩어지면서 용등원으로 달아나 숨어있던 모용희도 사로잡혀 처형되면서 후연은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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