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오호 십육국 후진(後秦) 설명

올드코난 2017. 2. 14.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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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십육국 시대 후진(後秦, 384년 ~ 417년)은 강족 요장(姚萇)이 건국한 나라로 국호는 진(秦)이다. 건국자의 성을 따 요진(姚秦)이라 부르기도 한다.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 후진(後秦) 설명

후진을 세운 강족(羌族)은 중국의 서북방에 살던 이민족으로 후한 시대부터 중국으로 이주해 산시성(陝西省) 일대에 거주했다. 오호 십육국 시대에 들어와 요익중(姚弋仲), 요양(姚襄), 요장 등이 족장이 되어 전조(前趙), 후조(後趙), 동진(東晉), 전진(前秦) 등의 용병으로 중국 각지를 전전한다. 383년 전진의 부견(符堅)이 비수대전에서 패배하자 화북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던 요장은 반란군에 패배하고 부견의 처벌을 두려워해 위수 북방의 말목장으로 도주 384년 대장군·대선우·만년진왕(大將軍大單牛萬年秦王)을 자칭하는데 일반적으로 이때부터를 후진이 건국된 것으로 본다.


요장은 관중(關中)의 북부 일대를 장악하고 전진의 부견과 전쟁을 벌이고 385년 서연(西燕)에 의해 장안이 함락되자 요장은 장안을 탈출한 부견을 체포해 살해한다. 386년 서연이 장안을 버리고 이동하자 요장은 장안을 점령하고 이를 근거지로 황제에 즉위한다. 이때 진주(秦州 간쑤 성 동부)에서 부등(符登)이 전진의 잔존 세력들을 통합하는데 이후 부등과 요장은 관중의 패권을 놓고 오랫동안 전쟁을 벌이게 된다.


393년 말 요장이 병사하자 태자였던 요흥(姚興)이 뒤를 이어 요장의 죽음을 틈타 쳐들어온 부등을 격파하여 살해해 오랜 전쟁을 종식시켰다. 이후 숙부인 요서(姚緒)와 요석덕(姚碩德)의 보좌를 받아 관중을 평정하고 세력을 확대한다. 399년 동진을 공격해 낙양을 점령하고 한수(漢水)와 회수(淮水) 이북의 지역들을 장악하고 400년 서진(西秦)을 멸망시킨다. 


401년에는 후량(後涼)을 공격해 복속시키고 남량, 북량, 서량을 속국으로 삼았다. 직후 북위(北魏)와 분쟁이 일어나 402년에는 시벽(柴壁 산시 성 양분현)에서 크게 패배하고 양주(涼州 간쑤 성 중서부)의 패권을 잃고 북위와 중립적인 관계를 회복한 후 403년 다시 양주를 공격해 후량을 멸망시키고 남량, 북량, 서량을 다시 속국으로 삼았다. 405년에는 후구지를 복속시키고 407년 남연(南燕)을 속국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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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년 말 동진의 실권을 장악한 유유(劉裕)가 한수 유역의 12개 군을 반환하도록 요청하자 요흥은 유유와의 대결을 피하기 위해 이것을 승낙한다. 이듬해 남량의 확장에 밀려 양주를 상실하고 407년에는 혁련발발(赫連勃勃)의 하(夏)가 자립하여 후진은 오랜 전쟁에 돌입하였다. 후진은 하(夏)와의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쇠퇴하고 이로 인해 409년 서진이 독립하고 동진과도 지속적으로 대립하면서 많은 국력을 소모하게 된다. 


414년 이후에는 후계자 분쟁으로 혼란에 빠져 후진의 국력은 더욱 약화되다 416년 반란이 일어나는데 요흥은 이 반란을 진압한 직후 사망한다. 요홍(姚弘)이 뒤를 이어 즉위하는데 국내의 혼란은 계속되고 이를 틈타 동진의 유유가 북벌군을 일으켜 쳐들어왔다. 요홍은 북벌군의 침입을 막았지만 내분으로 인해 결국 실패하고 417년 장안이 함락되어 멸망하고 만다.


현재 남아 있는 후진의 문물은 초당사(草堂寺), 기공사장별(記功賜將莂 386년), 여헌묘표(呂憲墓表 402년), 여지묘표(呂他墓表 402년), 부씨여정정조상(苻氏女靜貞造像 407년) 등이 있고 이 시기 기년문서(紀年文書)로 투르판 문서 1점이 존재한다. 천수의 맥적산 석굴에는 후진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석불이 남아있다. 또한 현존하지 않는 문물로써 건초자웅도(建初雌雄刀 386년)가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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